월/드/컵/단/신

한국, AFC선정 3개상 휩쓸어 한국이 아시아축구연맹(AFC)의 5월 최우수팀 , 최우수감독, 최우수선수 등 주요 3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AFC는 6일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막을 앞두고 5월중에 가진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한국 축구대표팀을 최우수팀으로 선정하는 한편 최우수선수에 이영표, 최우수감독에 거스 히딩크 감독이 각각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한국대표팀은 5월중 가진 평가전에서 스코틀랜드를 4대1로 대파했고 잉글랜드와 1대1 무승부를 기록한뒤 프랑스에 비록 2대3으로 재역전패했지만 선전하는 등 맹활약했다고 AFC는 밝혔다. 프랑스 지단 2차전 출전 가능 로제 르메르 프랑스축구대표팀 감독은 5일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의 우루과이전 출전 여부와 관련, “본인이 원한다면 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르메르 감독은 이날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단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고 본인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긍정적으로 느끼고 있다”며 “출전 여부는 본인의 뜻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도핑케스트 ’이상무’ 금지약물과의 전쟁을 선언한 국제축구연맹(FIFA)이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 초반 도핑테스트에서 단 한 건의 양성반응이 나타나지않아 만족스러워 하고있다. 이번 대회 도핑테스트 총괄 책임자인 이리 드보르자크 박사는 5일 “이날 현재 프랑스-세네갈의 개막경기부터 지난 3일의 이탈리아-에콰도르전까지 11경기를 대상으로 실시한 도핑테스트에서 모두 음성반응이 나왔다”고 밝혔다. 드보르자크 박사는 또 “4일 열린 세경기 도핑테스트와 관련해서는 혈액검사에서는 역시 모두 음성반응이 나왔으며 소변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도핑테스트에서 ‘이상 없음’ 판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이번 대회에 처음 채택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에서 모두 음성반응이 나와야 한다. FIFA는 매 경기 하프타임에 경기장에서 양팀 관계자를 불러 검사 대상선수 2명씩을 추첨, 봉함한 뒤 경기종료 15분을 남기고 검사 대상자 명단이 든 봉투를 개봉해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팀당 2명씩 4명의 혈액과 소변을 채취한다. 채취된 시료는 서울과 도쿄에 설치된 실험실로 보내지고 실험실에서는 시료를 수령한 지 12∼24시간 이내에 검사결과를 FIFA 상벌위원회로 통보하게 된다.

아시아 3國 ’대망의 첫 출격’

한국, 일본, 중국이 2002 한·일월드컵축구대회에서 첫 출격하는 6월4일을 ‘아시아의 날’로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다. 공교롭게도 아시아 대륙에서 처음 개최되는 월드컵에서 같은 날 나란히 첫 경기를 갖게된 동아시아 3개국이 이날 월드컵 첫승 신고를 노리고 있는 것. 이날 공동 개최국인 한국, 일본과 월드컵에 첫 출전한 중국이 모두 승리하게 된다면 독일에 0대8로 참패한 사우디 아라비아가 구겨버린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우며 새천년 첫 월드컵을 아시아의 잔치로 만들 수 있다. 이들 3개국중 승패가 엇갈릴 경우 승리한 나라는 아시아의 영웅으로 떠오르겠지만 패한 나라는 남은 2경기에서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야해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자존심 경쟁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첫 출격 준비를 마치고 결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한·일·중 3개국은 이전 대회까지 단 한번을 제외하고 개최 대륙에서 우승국이 나왔던 전통이 자신들의 월드컵 첫승으로 이어지는 행운도 기대하고 있다. 54년 스위스대회에서 데뷔한 이후 지난 프랑스대회까지 5차례나 본선에 올라 4무10패에 그친 한국은 이날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벌어질 예선 D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첫 승에 도전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체계적인 훈련으로 체력과 전술을 업그레이드한 한국은 설기현-황선홍-박지성으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로 폴란드 수비의 조직력을 흔드는데 승부를 걸 예정이다. 예선 H조에 속한 일본은 사이타마경기장에서 벨기에와 첫 경기를 갖는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던 지난 프랑스대회에서 3패만 기록했던 일본은 일찌감치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을 영입해 이번 대회를 준비해왔고 마지막 평가전이었던 지난 25일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1대1로 비겨 상당히 고무된 상태다. ‘16강 진출 청부사’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을 앞세워 사상 처음 본선무대를 밟은 중국도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릴 코스타리카전에서 월드컵 첫 승 사냥에 나선다.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 강호 터키와 함께 C조에 편성된 중국은 경쟁국들중 가장 만만한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첫승 가능성은 희박해진다./월드컵 특별취재반

부동산/신성 ’미소지움아파트’

‘기대되는 명품, 신성 미소지움아파트’새천년 주거문화를 선도하는 (주)신성이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에 짓고 있는 미소지움아파트가 오는 12월 완공돼 입주자들과 조우하게 된다. 신성은 인간·자연·첨단이 하나되는 공간, 입주자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독특한 공간설계와 하자없는 고품질 시공 등으로 최근 인기가 뜨고 있는 아파트건설업체중 하나. 50여년 동안 오직 건설분야에만 전념해 온 신성은 캄보디아,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폴 등과 아시아선수촌, 올림픽선수촌, 서해안·중부 고속도로 등 국·내외 유수한 건축물들을 시공, 지명도가 상당히 높다. 신성은 이같은 건설분야의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파트 건설분야에 뛰어들었고 우만동 미소지움아파트는 수원 입성과 재건축아파트의 교두보 확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우만동 미소지움아파트는 주변에 캐슬호텔과 수원 월드컵경기장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수원 교통의 사통팔달에 위치하는 등 최고의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여기에다 건축물의 동별 배치를 방사형으로 해 좁은 대지와 도심지 공사라는 악조건을 극복했다. 또 최대한의 일조권과 전망 확보는 물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세대간 프라이버시를 최소화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연결되는 도로변 아파트담장을 목재방음벽으로 시공, 도심지에서 느낄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환경도 조성했다. 특히 월드컵 기간동안 수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전통을 알리기 위해 목재방음벽에 태극 문양 및 정조대왕 능행차도, 만국기를 그려 넣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재현했다. 또 단지내에 자연 그대로의 조경, 한식 정자, 환경조형물과 성곽형보행자 출입문, 슈퍼밀러의 엘리베이터 도어, 3ZONE으로 구분된 지하주차장, 미려한 전광시계탑 등을 설치한다. (주)신성의 이재순과장은“올해 말 고객감동을 실현하는 명품아파트, 미소지움아파트의 완공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신현상기자 hsshin@kgib.co.kr

부동산/늘푸른주택 ’늘푸른 오스카빌아파트’

“탁∼ 트인 아파트! 탁∼ 트인 생활! 늘푸른 오스카빌”수도권 지역에서 부동산 투자의 핵심지로 손꼽히는 용인, 그중에서도 용인행정타운이 들어서는 용인시 삼가동 일대가 투자 1순위로 뜨고 있다. 바로 이곳에 수원, 오산, 화성 등 경기도내에서 아파트 브랜드 가치를 높이며 건실한 중견 건설업체로 성장하고 있는 (주)늘푸른주택이‘용인행정타운 늘푸른오스카빌’675가구를 선보인다. 30일부터 1,2순위 청약접수를 시작한 늘푸른오스카빌은 이달초 실시한 예비청약에서 단 이틀만에 400여명이 몰리는 등 높은 인기를 기록, 이번 본 청약 경쟁율은 예상이 어려울 전망이다. 이처럼 늘푸른오스카빌이 인기상종가를 올리는 것은 탁트인 전망과 뛰어난 교통여건으로 특히 투자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용인을 거쳐 에버랜드에 이르는 용인경전철이 2006년 완공되는 가운데 삼가역이 오스카빌 단지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청역(행정타운)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42번 국도가 단지 앞을 지나고 있어 승용차로 용인 중심가까지 3분, 분당까지 20분, 서울 양재동까지 4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또 단지에서 용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다 문화복지행정타운이 바로 코앞에 위치, 향후 유동인구 증가에 따른 상당한 시세차익도 기대되고 있다. 단지 뒤로는 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어 쾌적하고도 싱그러운 자연환경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입주자 입장에서 설계된 흔적들이 곳곳에서 묻어나고 건강을 생각하고 환경 친화적인 실내 공간과 함께 입주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각종 첨단 안전시스템을 갖춘 디지털 네트워크망 설치 등 첨단시설이 돋보이는 아파트다. 한편 그동안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무상으로 아파트를 제공해 온 늘푸른주택은 이번에도 도내 모범 소방관 및 국가유공자 5명을 선정, 늘푸른오스카빌 5가구를 기증한다. ▲생활의 편의를 극대화한 설계 일부 동의 1층에 기둥만을 배치하는 필로티 설계로 주민들의 편리한 왕래를 돕고 1층 높이가 다른 동의 3층 높이와 동일한 계단식 설계를 적용해 모든 가구가 시원한 조망권을 확보했다. 또 공간을 넓혀주는 안목치수 적용하고 현관 입구를 다용도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전실 설치 등 입주자를 배려한 설계가 눈에 띈다. 특히 1층 세대와 최상층 세대에는 각각 전용 정원과 다락방을 주는 특전도 제공한다. ▲안전과 편의를 책임지는 디지털 환경 정보화시대를 선도해 가고 있는 아파트답게 고화질의 동영상을 초고속으로 받아볼 수 있는 통신네트워크 구축으로 지역 커뮤니티는 물론 주변 상가 정보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또 모든 세대에 위성방송 수신 시스템을 설치, 지구촌의 다양한 정보와 뉴스를 접할 수 있으며 지하주차장과 어린이 놀이터의 상황이 24시간 모니터링되는 첨단 칼라 CCTV, 근접식 카드로 관리되는 차량통제 시스템 등 각종 첨단 안전시스템을 갖춘 디지털 환경을 구축한다. ▲자연친화형 테마공원 조성 단지 곳곳에 해, 달, 별을 주제로 한 새로운 개념의 테마공원을 조성해 단지 전체를 하나의 공원처럼 조성한다. 느티나무 숲, 지압보도, 답석과 잔디 등 자연의 기가 충만한‘해오름 마당’, 단풍나무 오솔길의 벤치에 앉아 도시생활의 낭만과 정취를 더해주는‘별 흐르는 길’, 가족과 이웃의 정을 나눌 수 있는‘달빛 정원’, 어린 자녀의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창작 놀이공간‘은하수 놀이터’등이 생활의 여유를 제공한다. 또 단지 외곽의 숲은 산책로가 조성돼 도심속에서 자연의 멋과 한적한 운치를 즐길 수 있다./신현상기자 hsshin@kgib.co.kr

고영규기자 장에 가다/안성장(5)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엔 ‘맞춤’은 없고 ‘안성(安城)’만 있다. 안성장은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적당한 상태를 뜻하는 ‘안성맞춤’이란 고유명사가 생겨날 만큼 유기그릇(놋그릇)으로 유명했던 고장. 그러나 과거 한집 건너 하나씩 유기전이 있었다는 안성장에 더이상 유기는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안성IC로 나오면 안성의 서쪽 끝이 나오고,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일죽IC로 나오면 안성의 동쪽 끝에 떨어진다.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안성의 양쪽 끝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셈이다. 안성시 안성읍 서인리 13번지 일원 안성 시외버스터미널과 중앙시장 사이에서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 안성장은 전주장, 대구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장으로 명성을 떨쳤을 만큼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안성장은 한양보다 2∼3가지가 더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품의 종류도 많고 다양했다. 또 ‘기호삼남지교의 교차로’로 불릴만큼 조선팔도의 물건들이 등짐, 소바리, 마바리 등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을 거쳐야 한양에서 제값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농산물은 물론, 유기·한지·연죽·꽃신·가죽신·담뱃대·갓수선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산품과 과일상, 포목상 등이 안성장에서 1차 평가를 받아야 한양 육의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안성장의 규모와 유명세는 각종 문헌에 나타난다.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쌓이고, 공장(工匠)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양 남쪽의 한 도회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했다. 정조가 수원 새고을 계획을 세울 때 좌의정 채제공(1720∼1799)은 “안성장, 전주장처럼 상업이 흥하도록 해야 한다(‘정조실록 14’)”고 주장했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십육지’에서 “안성장의 거래품목은 24종 중 공산품이 반수가 넘는다”고 전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허생전’도 빼놓을 수 없다. 가난에 못이겨 공부를 그만둔 허생원은 한양 다방골 변 진사에게 1만냥을 빌려 안성으로 내려온다. 그리고는 안성장에서 대추·배·곶감·잣·석류·밤 등 온갖 과일을 매점매석한다. 그러자 안성읍이 발칵 뒤집혔고, 한양에서도 과일 품귀현상을 보여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며, 궁궐에서도 과일 맛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때다 싶은 허생원은 과일을 비싼 값에 팔았고 1만냥에 사모은 과일을 팔아 10만냥을 벌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해도 안성장의 규모와 각종 산물의 유통에서 안성이 차지한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안성에 수완 좋은 장사꾼이 없을 리 만무하다. 임선재 선생이 지은 ‘한국구전설화(경기도편)’에는 서울 상인을 속여먹은 안성 사람 얘기가 나온다. 어리숙한 안성 사람 하나가 서울에 올라와 명태를 가리키며 “저 크고 좋은 고기 이름이 뭐요?”하고 물으니, 주인은 멍청한 시골놈을 등쳐먹을 요량으로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 귀한 고기인데, 한 마리에 10냥이요”라고 대답했다. 안성 사람은 두말없이 10냥을 주고 사고는 갖고 온 자루에 넣고서 “잠깐 다녀올테니 자루 좀 맡아 주시오”하니 주인이 흔쾌히 맡아 줬다. 그런데 잠시 후 나타난 안성 사람이 자루에 넣어둔 돈 1천냥이 없어졌다고 펄펄 뛰는 게 아닌가. 포졸이 지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안성 사람이 “저 귀한 고기를 10냥에 사서 1천냥이 든 자루에 넣어 두고 잠시 맡겼는데, 돈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다. 포졸이 보기에 명태 한 마리에 10냥이나 받은 주인이 나쁜 놈이라, “네가 나쁜 놈이다. 시골 사람이 거짓말할 리 없다”며 주인에게 1천냥을 물어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도구머리’(현 안성시 도기동) 일화도 마찬가지. 갓 수선으로 유명했던 안성 도구머리에서는 갓 수선을 위해 찾아온 가난한 선비들과 갓 수선공간에 수선비로 다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갓 수선공은 꼭 제값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인해 지금도 이치에 어긋나는 억지를 부리면 ‘이 사람 도구머리에서 왔구만’하고 빈정거리는 속담이 전해온다. 안성 사람의 왕성한 상인 기질은 전래 민요에도 나타난다. ‘경기 안성 큰 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한닢 팔고 두닢 파는 것이 자미라//경기 안성 아기 숟가락 장사로 나간다/은동전이 반수저에 깨끼 숟갈이 격(格)이다.// 젊어서 한때 장돌뱅이 생활을 경험했던 주물유기 전수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안성유기장 김근수옹(87)은 “안성장이 흥한 것은 안성 사람의 상재(商才)와 신용 때문이며, 죽산·양성은 물론 평택장·음성장 등 주변 장들도 안성 장꾼이 도착해야 열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안성장은 ‘안성맞춤’의 명성은 간데 없고, 지극히 평범한 5일장로 전락했다. 현재 안성장에는 토박이 장꾼과 외지에서 온 장꾼 등 300여명이 4:6의 비율로 물건을 팔고 있다. 20∼30년전보다 손님과 장꾼들은 양적으로는 늘었다는 게 안성장 터줏대감들의 설명이다. “장의 규모는 과거에 비해 커졌어. 그러나 유동인구가 워낙 적고 상인 수는 늘어나 장꾼들의 벌이는 오히려 줄어들었어. 어쩌겠나, 서로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토박이 장꾼들의 하소연이다. 장날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입심과 덕담으로 손님을 부르는 장꾼. 안성장 최고의 명물 장꾼은 떨이 옷가지를 온몸으로(?) 파는 원점순씨(57)다. 원씨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5천원·1만원, 앗싸 앗싸” 바로 옆 길거리 리어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메들리’에 주체할 수 없는 끼를 실어 ‘관광춤’을 선보이는 원씨 주변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남편 임문식씨(61)는 아내의 춤에 넋을 잃은 손님들을 보며 그냥 흐뭇하기만 하다. “고정 단골손님이 1천명이 넘어. 20대 처녀부터 80대 할머니까지 내 춤에 기냥 맛이 갔거든.” 매년 겨울마다 지역의 환경미화원들에게 점퍼 300벌을 선물한다는 원씨는 맘씨좋은 우리네 이웃집 아줌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안성장 초입에서 닭·계란과 엄나무·옻나무·황기 등 백숙 재료를 팔고 있는 한연숙씨(53)가 외국인 부부 한쌍에게 닭을 건네고 있었다. “저 코쟁이 내외는 장날마다 오는 내 단골손님이여. 백숙이 뭐 ‘에너지 푸드’라나. 부부 금실이 좋은가벼. 백숙 좋은 걸 아는 것 보면…, 미국말? ‘애비씨(ABC)’도 몰러. 손짓 발짓 해대면 대충 알아듣고 사가.” 34년째 안성장을 지켜온 한씨는 “닭·계란을 팔아 시동생 6남매 교육하고 출가시켰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시골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장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눈에 띠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규례(76) 할머니는 “아둥바둥 돈버는 데 정신없는 안성장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장날마다 나온다”며 기자에게도 한참동안 구구절절 좋은 말씀만 하시다 다른 죄인(?)을 위해 발길을 옮겼다. 안성이 고향인 시인 조병화가 어느 글에선가 “30리길 40리길을 흰옷을 입을 장꾼들이 소를 몰고 돌아오는 내고장 안성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다. 게다가 얼큰히 한 잔 기울인 막걸리 목소리로 가락을 빼는 그 창을 듣노라면 그야말로 천하일품이다”라고 노래했던 안성 계촌리 우시장은 이미 새벽녘에 파한 상태였다. ‘전국의 돈이 안성으로 다 모였다’고 할 정도로 성시를 이뤘던 우시장은 불과 30년전까지만해도 하루 1천500여두가 거래돼 전국 최고를 자랑하던 용인 백암장(1·6)을 능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 20여두정도가 거래되고 있으며, 그나마도 송아지가 주를 이루고 나머지는 늙거나 병든 소들뿐이라는 게 농협 관계자의 말이다. 그 옛날 안성장에는 장날 때마다 안성 남사당패가 소고(小鼓)와 춤·줄타기·노래 등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를 펼쳐 흥에 겨운 구경꾼들이 등짐을 지거나 빈 지게를 진 채 덩실거리는 모습이 볼만했다고 전해진다. 주인공은 먹고 살기 위해 마을과 장터를 떠돌며 웃음과 기예, 몸을 팔았던 안성 남사당패 꼭두쇠 바우덕이(본명 김덕암). ‘안성청용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란 말이 안성장 장꾼들간에 구전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구한말 최고의 예술인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바우덕이도 이곳 안성장에서 기량을 뽐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그 영화롭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채 안성장은 경부선 철길이 평택으로 뚫려 교통의 사각지대로 변모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이상 전국의 물자가 안성에 머물렀다가 서울로 올라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앞서 일제 강점기에 값싼 도자기 제품을 대량으로 유입시켜 유기공업을 잠식한 것도 안성장 쇠퇴의 한 원인이다. 100여년전 프랑스 선교사가 안성에 터를 잡아 유래됐다는 ‘마스카트’와 ‘거봉포도’, 그리고 늦봄 도로변에 불야성을 이루는 딸기 등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안성장은 그 옛날의 영화를 잃고 평범한 5일장이 돼버렸지만 아직도 서민들의 삶 가까이에 자리잡은 훈훈한 시골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2002 장외서 뛰는 사람들/자원봉사자 이수련씨

“일본사람들이 수원월드컵 홈페이지의 일본어사이트를 보고 많은 정보를 습득, 수원을 방문했으면 좋겠어요” 수원시청 정보통신과에서 수원월드컵 홈페이지 일본어사이트를 관리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이수련씨(38·여·화성시 태안읍)는 일본인들에게 수원을 널리 알려 이해를 ㄷ는 데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93년 결혼과 동시에 학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남편 조성환씨(39)를 따라 7년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다 지난해 여름 귀국한 이씨는 주위의 권유로 대륙간컵축구대회때 자원봉사센터에서 일본어 전화안내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월드컵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화로 일본관광객들에게 숙박, 교통 등을 안내하며 그들의 불편이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일을 맡았던 이씨는 많은 일본인들이 전화를 해오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받았던 친절에 보답한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대륙간컵대회가 끝나고 자신의 전공인 전산학에 관한 일을 찾으며 웹디자인을 배운 이씨는 지난 3월25일부터 자신의 전공과 일본어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수원월드컵 홈페이지 일본어사이트 관리자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씨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원에 관한 정보와 수원월드컵을 홍보하는 각종 자료를 실용 일어와 일본 웹 사이트상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웹언어들로 번역, 수원월드컵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과 홈페이지에 잘못된 표현들을 수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웹 사이트에 적합한 좋은 단어를 선정해 일본인들이 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이씨는 월드컵이 끝나면 웹 사이트를 통해 한국을 일본에 알릴 수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지난해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난생처음 축구경기를 관전한 이씨는 “경기를 보면서 나자신도 모르게 흥분과 긴장감을 느꼈다”며 “축구는 현장감 넘치는 경기장에서 봐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아들 현진(10)과 딸 윤진(6)을 보면서 외국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한국을 알리는 일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는 이씨는 누구보다도 월드컵의 성공개최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정민수기자 jms@kgib.co.kr

옛소리 기행(14)/강화 김병기의 시선뱃노래

옛소리 기행(14) 한강을 치오르던 소리 강화 김병기의 시선뱃노래 우리 민족의 소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리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다. 태어나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를 비롯해 성장을 하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듣고 부르게 된다. 성장기에는 직접 동무들과 어울려서 소리를 하고, 장성해가면서 일노래를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생을 마감하고 가는 길에도 상여소리나 회다지소리를 듣게되니 일생을 소리 속에서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많은 소리들은 때로는 삶의 목적으로 불려지는가 하면 즐거움이나 슬픔을 나타내기도 하고, 공통된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불려지기도 한다. 삶의 장소와 목적에 따라서 각기 다른 소리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소리가 갖는 의미가 깊기도 하고 무척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어기야 디여차 어이기야 빨리 저어라 어야디야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손질 맞춰 빨리 저어 저 배 보다 먼저가세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화장에야 밥지어라 배고파서 노 못젓겠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애아범아 빨리 저어라 마포장을 얼른보고 마누라두 자식들도 봐야겠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시선뱃노래다. 우리 소리의 특징은 사설이 꾸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들어 민속경연대회 등을 거치면서 정제된 사설을 만들기도 하지만, 삶의 터전에서 나타나던 소리를 보면 자신이 처해진 환경을 노래할 뿐이다. 그 소리가 운이 맞든지 틀리든지, 아니면 앞뒤 문맥이 연결이 되든지 안되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리를 메기는 사람이 자신이 처해있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사설로 표현하면, 받는 사람들은 그저 즐겁게 소리를 받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소리의 다양함을 창출했고, 현장성이 강한 소리, 혹은 창자의 내적 심성을 외부로 표출하는 소리가 되며, 지역적 특성과 주변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는 반농(半農), 반어(半漁)의 마을이다. 어업과 농업이 공존하는 마을 외포리는 3년에 한번씩 도당굿을 한다. 이 마을은 과거에 배가 40∼50척이나 있는 강화에서 제일 큰 포구였다. 이 곳에서 3대째 터를 잡고 살면서 어려서부터 고깃배 소리를 듣고 자란 김병기씨(남, 66세,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583-12)는 집에서 배를 부렸으며, 40대 초반에는 직접 자신이 배를 부렸다. “어려서 바닷가에 가면 만선이 된 배가 한바탕 풍장을 치면서 만선기를 꽂고 들어오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나가서 신명나게 춤판을 벌이곤 했죠”. 김씨는 아직도 그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만선이 된 고깃배가 모두 포구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철이 되면 미처 포구로 들어오지를 못하고 바다에서 바로 딴 배로 옮겨 싣게되고, 시선배가 고기를 받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 마포나루로 향한다. “시선배는 보통 5∼6명이 타게되는데 바다에 나가 어선에서 고기를 옮겨 싣고 마포나루로 갑니다. 시선배를 자대배, 운반배, 장누기배라고도 부르는데 고기를 옮겨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리를 주고받으면 그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어요” 먹는 것은 사자밥이요 자는 곳은 칠성판이라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이놈의 바람은 왜 안부느냐 바람이 불어야 노를 안젖지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이이야 에이허 손바닥이 다 부르텃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소리를 보면 그 소리꾼이 처해진 상황을 알 수 있다. 배를 타는 어부들은 언제나 자신의 명(命)을 하늘에 맡기고 다닌다고 한다. 땅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시신이라도 있지만 바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하기에 언제나 그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먹는 밥은 사자밥이고 누운 곳은 칠성판이라고 표현을 했을까.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자신의 명을 하늘에 맡기는 것이죠. 풍랑을 만나면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둘째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기 때문에 더 두렵죠. 그래서 소리를 더 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소리를 하다 보면 피곤한 것도 잊을 수가 있지만 그런 두려움도 가시게 되거든요”. 소리를 하면서 어려움과 고통, 엄습하는 불안감을 다 떨쳐버릴 수 있다는 것이 김병기씨의 말이다. “소리가 별거 있나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소리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다 소리죠”. 갯가에서 살다보니 보고, 배운 것이 뱃소리다. 자신이 직접 시선배의 선주로 한강을 거슬러 마포나루를 다니다 보니 소리에 대한 철학도 생겼단다. 1991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인 인천근해 갯가노래 뱃노래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각종 행사에서 회원들과 함께 소리를 하는 김병기씨는 더 늙어 힘에 부치기 전에 마땅한 후계자를 정해 소리를 전수해야 하는데 삶의 터전이 사라진 지금 누가 소리를 배우려고 하느냐며 걱정을 한다. “예전에는 참으로 많은 소리가 있었죠. 고깃배를 타고 나가면, 나갈 때부터 고기를 잡아 포구로 들어올 때까지 소리가 없으면 일이 되지를 않았으니까요”. 그 많던 소리들이 차츰 잊혀져 가고 있는 것에 김씨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연습을 할 때도 배 모형을 만들어 배를 타고 소리를 한다. “소리는 현장감이 있어서 분위기가 제대로 나지 않으면 생명이 없어요. 그래서 모형이나마 배를 만들어 연습을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 팔자가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비단이불을 펴놓고 창포 밭에 금잉어 놀듯 굼실굼실 잘도 노는데 내신세는 어이하여 칠성판을 떼메고 다니나 구구절절이 애환이 서려있다. 언제나 자신의 명은 자신 것이 아니라는 뱃사람들의 불안감, 그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뱃사람들의 처해진 환경이다. 우리 소리는 그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창출된다. 애써 꾸미려고도 하지 않고 기교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소리를 한다. “참 힘들었죠. 요즘이야 동력선이니 기계가 알아서 하지만 예전에는 손이 부르트도록 노를 저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노를 저으면서 하던 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한사람이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분주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김병기씨. 자신의 선대들이 불렀고, 자신이 부른 소리 시선 뱃노래. 강화 외포리에 배를 띄우고 신명나게 풍장을 울리면서 고기를 푸는 그 모습이 그립다. 글/하주성(민속연구가) ※시선뱃노래 사설 저기 가는 저 할머니 딸이나 있거든 사위나 삼으쇼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아이야 그렇구 말구 보리밭에서 김만 매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딸은 하나 있건마는 나이가 어려서 못삼겠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아이구 어머니 그 말 마우 참새는 작아두 알만 까구 제비는 작아두 강남을 가요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중략) 사귀지 못할 친구는 뱃놈의 친구요 정들만 하면 뒤보듯 떼놓고 뚝 떠나간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달은 밝구 명랑한데 고향생각이 절로난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애아범아 빨리 저어라 행주참이 늦어간다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한양 마포에 돈 실러가세 (어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이 어기야 에이야 허어 두루나)

폭발력 탑재한 '밀레니엄 특급'

한국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신세대 스타’ 이천수(21·울산 현대). 인천 출신의 이천수는 인천 부평고 동기생인 최태욱(안양 LG), 송종국(부산 아이콘스), 차두리(고려대) 등과 더불어 한국축구의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는 대표적인 차세대 스타중 한명이다. 172cm, 62kg의 가냘픈 체구에도 불구 볼다툼에서 지지 않는 근성과 툭툭 볼을 치며 상대 수비를 따돌린 뒤 쏜살같이 치고들어가는 스피드, 낮고 빠르게 문전을 향하는 센터링 등 이천수의 플레이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최태욱과 함께 지난해말 대표팀의 좌우 공격을 이끌다가 올해 초 북중미골드컵 때 무릎에 이상이 생긴데다 3월 유럽 전지훈련에서는 발등을 다치는 등 잇따른 부상으로 주춤하자 축구팬들은 어쩌면 이번 월드컵에서 그의 경기모습을 보지 못할까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의 신뢰속에 지난 달 27일 중국전에 교체 투입된데 이어 16일 열린 스코트랜드와의 평가전에 선발 출장한 이천수는 날카로운 돌파와 침착한 문전처리로 이날 선제골을 터뜨리며 한국의 4대1 대승을 이끌어 월드컵 출격에 이상이 없음을 입증했다. 고려대 1학년이던 지난 2000년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 국가대표를 오가며 일약 한국축구의 차세대 선두주자로 떠오른 이천수는 ‘밀레니엄 특급’이라는 자랑스런 별명까지 얻으며 거침없는 질주를 했다. 특히 그해 4월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뒤 5월 유고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체격이 큰 유고의 수비수들을 현란한 스피드와 개인기로 농락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리던 이천수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칠레와의 예선전에서 상대 수비의 안면을 가격해 국제경기 4경기 출장금지의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후 히딩크 감독으로 부터 외면당한 이천수는 시련기를 맞이하다 8월 유럽전지훈련에서 진가를 발휘, 왼쪽 날개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대표팀내에서 단연 1위인 체력과 순간스피드가 장점인 이천수는 대표팀 필승전술인 3-4-3 전형의 핵심으로 자리했다. 이천수는 “이제는 예전과 달리 여유가 생겼고 경기에 나서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던질 준비가 돼 있다”며 월드컵 본선에 대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있다./황선학기자 hwangpo@kgib.co.kr

나이야 가라! ’내 삶’을 살련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모시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한국여성개발원이 최근 전국 15개 시·도 성인남녀 3천107명 및 여성정책 관련 전문가 2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부모를 ‘시설’에 모시는 것에 대한 일반인의 찬성률이 남성 60.6%, 여성 78.2%로 나타났다. 노인부양에 대해서는 남성 39.4%, 여성 21.8%만이 ‘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답했다. 노인부양의 문제는 의학 및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평균수명의 연장이 가져온 축복인 동시에 화근(?)이다. 노인문제 중 가장 큰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대부분의 노인이 노인전기인 60∼74세 때는 젊어서 모은 재산이나 자식들에 의지해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지만 의료비 등 생활비가 급증하는 75세 이후(노인후기)에는 자식들도 ‘그동안 할만큼 했다’는 핑계로 외면하기 십상이다. 나이가 많아 갈 곳이 없는 노인들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노후문제는 제쳐둔 채 오로지 자식의 성공만을 위해 뼈빠지게 일해왔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는 것은 냉대와 허탈감 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식도 떠나고 건강까지 잃어버렸다. ‘이럴줄 알았다면 자식농사를 위해 모든 재산을 털어넣지 않고 저축이라도 할 것’하고 후회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경기도 여성정책국 노인복지담당 노완호 사무관은 “가족의 노인부양 기능 약화는 심각한 국가적 현안”이라며 “노인정책은 일부 저소득 노인에 대한 생계지원 차원을 벗어나 이제 전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전예방적인 정책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사무관은 또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위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노후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미래까지 걱정하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30·40대부터 재정과 건강, 취미생활 등 노년준비를 꼼꼼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늙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노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밝은 노후모임 서혜경 대표는 “노인이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노인에 대한 썩 유쾌하지 않은 통념들을 갖고 있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라면서 “차세대 노인들도 노후문제는 자신이 책임진다는 생각을 갖고 준비를 서두르는 것은 물론 노인문제 전반에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최근 일부 ‘능력있고 현명한’ 노인들은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노년기 인생이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젊음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며 제2의 인생을 펼치고 있다. 60세 이상의 할머니가 야학을 운영하며 사회봉사를 한다든지, 외국어 자원봉사나 영어·한문강습 등을 한다는 얘기들이 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다. 또 성을 즐기기 위해 70세 할아버지가 비아그라와 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를 복용하고, 할머니는 호르몬 치료를 선호하다는 얘기가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보통 사람의 예는 아니지만 플라톤이 법률을 완성한 것이 80세이고, 프랭클린이 망원경을 발명한 것도 80세였으며, 평생 어부 베드로는 60세 이후에 각성해 새로운 그리스도의 삶을 열었고,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가게 앞 흰수염 달린 노신사도 64세 때 창업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내일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할 만큼 노후보장이 안된 국내 여건에서 노인들의 자아성취란 아직 요원한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김한영의 기전 문화기행/연천의 선사유적

김한영의 기전 문화기행/연천의 선사유적 ‘전곡리안’ 돌도끼와 호모파베르의 새벽 “가없는 저 천공(天空)의 침묵이 나를 한없이 전율하게 한다”고 말한 이는 기지에 찬 명상의 언어로 그의 시대를 우수 어린 색깔로 물들인 바로크의 보편지성 블래즈 파스칼이지요. 안도 바깥도 없는 태허의 광막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섬뜩함에 대한 파르르한 떨림. 이 체험과 더불어 파스칼은 형이상학적 관념들이라는 너더분한 표토(表土)를 걷어내고, 그 심층에 자리한 물리적 실존적 하늘을 ‘발굴’해 냈지요. 그러한 자기인식은 양주 태생의 방랑시인 김병연이,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宇宙一身泛泛鳧)라고 탄식한 구절에도 생생히 묻어 나오지요. 벌써 십수년이 지난 일입니다. 부석사 안양루에 걸린 편액에 새겨진 이 구절을 본게 말입니다. 되돌아오는 길에 19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게 투영된 우주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롱이’(전곡리 구석기인을 상징하는 캐릭터 이름)의 영토에 발을 디딘 나를 전율케 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태고의 전설과 신비를 간직한 채 말없이 흐르는 저 한여울(大灘=한탄강)처럼, 전우주 온생명의 대순환을 실어나른 하마득한 시간, 그 시간의 침묵이 내게 불연듯 섬뜩한 느낌을 던져줍니다. 유적지 입구 아그배나무 그늘에서, 흐들흐들 개나리꽃 망울 터지듯 재잘대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사는 게 그렇게 재밌느냐고 짐짓 물으니,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어린 벗들의 웃음소리에 묻어나는 생의 약동이 마치 수십만년의 침묵을 깨우는 소생의 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귓전에 남습니다. 벗이여, 그렇습니다. 한 달음에 수십만년 전 경기도 옛 땅으로 달려 왔습니다. 한 손에 주먹도끼를 움켜쥔 고롱이가 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뿔큰사슴을 뒤쫓다 문득 멈춰서 올려다 보았을 그 하늘 아래,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오르내렸을 그 강언덕 위에 지금 내가 서있습니다. 기껏해야 100년의 시간을 체험하는 우리들의 이지(理智)와 상상으로는 도시 헤아릴 길이 없는 까마득한 어느 한 날. 처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은’(開天成地) 태고의 그 날로부터 굽이치는 여울을 이룬 우주의 시간이 한탄강 가에 잠시 머물렀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지요. 경계도 단절도 미움도 아픔도 없던 그 날, 잘린 허리의 통증과 신열이 어느 곳보다 더 절절히 느껴져 오는 이곳에 고롱이가 정착했다는 것은 그 자체 어떤 계시의 전언(傳言)을 담고있는 것은 아닐런지…. 원숭이와 거의 다를 바 없는 한 무리의 짐승사람들이 아프리카 남동부 울창한 숲에서 들로 나와 진화의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500만년 전. 인류의 어렴풋한 기억이 전하는 바로는, 이때 굼벵이에게 구르는 재주를, 어름치에게 헤엄칠 수 있는 지느러미를, 노랑부리저어새에게 날렵한 날개를, 반달가슴곰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각각 나누어 준 까닭에 더는 줄게 없는 신이 고민하다가, 인간에게 덥석 지혜와 손(직립)을 주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인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되고, ‘곧선 사람’(homo erectus)이 되고, ‘손쓴 사람’(homo habilis)이 되었다지요. 손과 지혜가 없다면, 글머리에서 인용한 바로크의 수학자가 꿰뚫어 보았듯이, 인간은 광포한 자연의 바람에 하릴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다른 짐승들과 달리 사람에게만 손과 지혜를 준 것이 온생명의 순환이라는 시각에서 볼때 과연 축복이었는지 많은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하지요. 문명이란 돌도끼로부터 핵폭탄으로의 진화과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라거나, 전우주 뭇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암세포와 같은 존재라는 깊은 통찰들은 제쳐 두고라도, 더 많은 돈과 이익을 위해 이성(지혜)과 도구(손)로 무수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즈음의 행태들을 볼 때 그렇지요. 남아프리카에서 이동을 시작해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한반도 전곡리에 도착한 고롱이와 그의 동료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풍성한 구석기 문화를 일궈냈지만, 1962년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지요.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등 일본인 관변학자들이 두만강변 동관진에서 발견된 유적도 쉬쉬 덮어가며 꾸며낸 식민사관의 잔재 탓이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요. 수차 전곡리 발굴을 주도한 배기동 교수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아무리 낮춰 잡아도 10만년 전, 거슬러 오르면 50만년 전 고롱이가 강변에서 사냥한 뿔큰사슴의 가죽을 벗길 때 사용했을 이 주먹도끼. 그것은 이 땅에 살았던 경기도의 가장 이른 선주민인 고롱이를 나와 연결해 주는 시간의 터널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고롱이는 긴 시간의 간극을 사이에 두고 공간적으로 같은 지역을 산 인연 외에는 지금의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이 한탄강가에서 코뿔소와 뿔큰사슴을 쫓다 홀연히 사라진 ‘시간의 나그네’라고 해야할 것이지만, 마치 나의 고조할아버지거나 이웃집 아저씨나 되는 것 같은 끈끈한 친근성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시기의 상한이 아니라 지표물인 석기의 양식(형태)과, 그것이 선사문명의 전개에서 어떤 전형성을 갖느냐하는 점이지요. 다시 말해, 이 주먹도끼가, 한탄강과 자연환경이 유사한 북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을 서북으로 흐르는 솜므 천 연안의 생타슐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유구를 표준으로 한 아슐리앵(acheul en)형 문화에 속한다는 사실이 전곡리를 세계 고고학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게 한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총성없는 전쟁이 반도체와 철강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하, 아프리카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 유럽이 한 축을, 동북아시아가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치열한 고고학적 발굴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최근 유물조작을 주도하고 자살한 일본인 고고학자는 대륙과 대륙 간에, 문명과 문명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 빚어진, 선사 유적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지요. 그는, 말하자면, 일을 꾸미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내버리는 일본 고고학의 ‘가미가재’ 특공대였던 셈이지요. 최초로 전곡리의 돌도끼를 감정한 보르드나 전곡리를 방문한 클라크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아슐리앵 문화에 속하는 유물임을 확인하고, 김원룡과 배기동 같은 국내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고 연구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고롱이가 일구어낸 선사문화는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아프리카와 유럽 이외의 지역에는 아슐리앵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구중심적 문화사관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동시에, 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서구인들에 의해 강요된 선사에 대한 인식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뒤바꾼 ‘사건’이었지요. 이 사건은, 이집트와 인도를 포함한 오리엔트 동쪽에는 아예 ‘역사’가 없거나 정체되었다는, 변형된 형태의 서세동점 이데올로기를 바로 잡고, 타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벗이여. 지금 전곡에서는 수십만년 전 고롱이의 삶과 죽음을 새기고 그 흔적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를 헤아리기 위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곡리 구석기 문화제’가 바로 그것이지요. 대중의 눈높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고롱이가 주연한 자연과 우주적 순환의 웅대하고 숨가뿐 드라마를 추체험하는 제사(축제는 원래 제사를 뜻하지요)의 제단에서 연예인들의 얕은 재주를, 그것도 비싼 돈 들여 불러와 보고 들어야 하는 심경 씁쓸한 바 있지요. 문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런 식의 관심끌기는 가장 손쉬운 동시에 가장 천박한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지상의 문화재들이 소실 파괴된 까닭에, 살아 생전 연천을 사랑했던 이색이나 허목의 유적, 그리고 옛 왕들의 유구 몇을 제외하면 이봐라 할 문화유산이 남아 있지않은 고장 연천. 선사 매장문화재가 연천에서 발견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겠지요. 고롱이의 흔적 하나로 모든 것을 갚음하고 남음이 있으니까요. 문화란 그런 것이지요. 있다고 해서 밥 먹고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없으면 근본적으로 초라한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전곡의 선사유적은 활용 여하에 따라 밥 먹고 사는데 일조할 잠재성이 충분한 유적이지요.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문화인류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이만한 유적도 없을테니까요. 지역사회가 전문가들과 더불어 고롱이가 남긴 흔적을 잘 보존하고 사회적 활용가치를 모색한다면 시쳇말로 장사가 될 아이템이라는 말이지요. 벗이여, 또 다음 연재를 기약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들의 주먹도끼인 인터넷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우주적 시간의 거센 여울 저 너머로 영영 흘러가버린 고롱이에게도 이 엽신을 배달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과 함께 이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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