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에서 피어난 초월과 꿈의 해방…김기태 초대전 ‘그늘의 춤-유영의 시간’ [전시리뷰]

밤의 세계와 낮의 시간은 매 하루 똑같이 양분돼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무의식이 지배하는 밤의 세계, 그 속에서 펼쳐지는 꿈속 세상은 무한정으로 펼쳐나간다. 지난달 13일부터 팔달문화센터 지하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사)수원예총 팔달문화센터의 김기태 초대전 ‘그늘의 춤-유영의 시간’은 디지털 페인팅, 회화, 설치, 시 등 여러 형태의 작품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시도를 선보인다. 어딘가 정착하지 못한 ‘불안’은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 ‘꿈의 기억’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때로 나쁜 기억에 매몰되기도 했던 그는 놓쳐버린 기억을 포섭하려 했다. 악몽을 기록하는 과정은 현실을 살며 얽힌 불안의 실을 풀어나갔고,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직조하는 과정이 됐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유영’, ‘앙금’, ‘꿈’ 등의 단어들로 인지한 기억에 ‘해파리’, ‘거품’, ‘연꽃’ 등 구체적인 형상을 결합했다. 벨벳이라는 소재는 원경과 근경의 양위성을 제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은 거대한 벨벳 소재의 ‘유영 은하수 3’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붙잡는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벨벳 천에 강한 힘을 내뿜는 그림은 어린 시절 접했던 동화 속 도깨비 혹은 꿈에서 봤을 귀신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신비하면서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은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홀려 빠지고만 나르키소스의 수선화와 같이 보는 이를 빨려들게 만든다. 밤의 시간에 주목했다는 작가는 꿈을 기억할 때 시간이 선형이 아닌 형태로 기묘하게 섞이는 방식을 활용했다고 말한다. 어둠은 모든 걸 흡수하는 색이지만 벨벳은 빛은 반사하는 소재다. 작가는 “그림자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하듯, 기묘한 초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간다/ 한 때는 업혀 있었던 푸른 등을 동경했다/ 이제는 굽은 너의 등을 품는다” (김기태作 ‘유영 7’ 작업노트 중) 전시장에서는 그가 창작 과정에서 함께 구상한 시와 디지털, 회화 매체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시와 디지털 페인팅으로 표현된 ‘유영 7’은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인어공주와 같기도 파도 속에 생명력을 내뿜는 동물 같기도, 거대한 식물이 내뿜는 포효 같기도 하다. 작가는 ‘유영’의 이야기를 해파리와 거품 등으로 표현했다. 최소한의 본능만을 품은 채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해파리의 유연함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줄 수 있는 공간이자, 함께 효과를 낼 수 있는 공간이자, 여러 삶의 형태를 품을 수 있는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다. 또한 생명력이 넘치는 불순물에서 만들어내는 빈 공간인 거품과 방울은 포화한 상태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틔운다. 불안과 상처, 기억의 파편에 주목했지만, 작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화합을 발견했다. 끝없이 순환하는 원을 떠올리게 하는 ‘유영 4’가 그러하다. 한 번에 활짝 피고 다시 꽃잎이 지는 꽃봉오리의 모습은 생명력을 내뿜는다. 작가는 “과거를 ‘두렵고 새로운 무엇’으로 비유하는 우리의 마음을 비유했다”며 “쉽게 결딴날 수 없는 영역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전시를 통해 각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달 3일까지.

수원문화재단, 어린이 국악체험극 ‘숲속음악대, 덩따쿵’…“가야금·해금 함께 연주해요”

어린이들이 가야금·해금·거문고·아쟁 등 국악기를 직접 만져보고 함께 연주도 펼칠 수 있는 특별한 체험극이 수원에서 열린다. 수원문화재단은 오는 22일 오후 4시 어린이 국악체험극 ‘숲속음악대, 덩따쿵’을 정조테마공연장에서 선보인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이번 공연은 토끼, 꾀꼬리, 곰돌이, 늑대, 여우로 구성된 숲속음악대 ‘덩따쿵’이 호랑이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멋진 국악 연주를 들려주는 국악 체험극이다. 해당 작품은 지역 간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해 우수 작품을 전국 순회하는 국립국악원 공모사업 ‘국악을 국민속으로’의 선정 작품 중 하나로, 국립민속국악원이 기획·제작해 2018년 초연 이후 전국 각지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다. 재단 관계자는 “이번 공연은 어린이들에게 국악에 대한 흥미와 친숙함을 한 층 더 높여줄 예정”이라며 “숲속음악대 덩따쿵은 완성도 높은 어린이 국악 공연으로 많은 아이들이 공연장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본 공연은 6개월 이상 관람할 수 있으며, 36개월 미만은 보호자 동반 여부와 관계없이 객석 입장이 불가하다. 티켓 가격은 1만 원이며, 인터파크 티켓을 통해 예매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수원문화재단 누리집에서 확인하거나 수원문화재단 정조테마공연장으로 문의하면 된다.

'이번주 뭐 보지?'...창작 뮤지컬 ‘애기봉’ 등 공연부터 전시까지

■공연_ 창작 뮤지컬 ‘애기봉’ 19~22일. 김포아트홀 /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에 전해 내려오는 ‘애기봉 설화’가 K-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애기봉 설화에 타임슬립 요소를 결합해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야기로 제작된 애기봉 뮤지컬은 김포의 역사와 문화를 ‘타임슬립 창작 뮤지컬’이라는 현대적 시각과 형태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또 국악과 트로트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는 한편 상모 돌리기, 비보잉 등 화려한 퍼포먼스도 함께 마련됐다. 애봉 뮤지컬은 한국적 소재로 줄곧 호평을 받아온 우상욱 연출이 메가폰을 잡았다. 실력파 유채하 작가와 강소연 작곡도 합류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4일간 총 6회에 걸쳐 공연될 예정이다. ■전시_ ‘Echo: 관계의 울림’ ~4월27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 ‘무채색 드로잉’이라는 큰 범주에서 고유의 특색을 보여주는 5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다. 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 작업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대표작들을 엄선했고, 최근작까지 포함해 작업의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장지 위에 날카롭고 뾰족한 연필을 새기듯 눌러가며 수많은 선을 만들어낸 ‘김범중’ ▲종이 위에 샤프펜슬을 사용한 드로잉 작업으로 지지대와 매체의 물성을 탐색하는 ‘박미현’ ▲구상과 추상, 회화와 드로잉의계를 넘나드는 ‘설원기’ ▲추상화와 사실적 회화의 경계에서 직감적이고 즉흥적인 작업을 이어온 ‘차명희’ ▲현대회화의 가능성과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탈출구를 찾는 ‘최상철’의 작품을 통해 더 큰 이야기, 더 넓은 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_ ‘Prism Project’ ~3월30일. 벗이미술관 / 미술관 창작 레지던시 4기 작가들의 1년간의 작업을 공유하며, 정신적 제약을 가진 환우들과 협력해 창작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전시다. 환우들과의 공동 창작을 통해 아웃사이더 아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창작 과정에서 발견되는 치유와 자기 표현의 힘을 탐구한다. 아웃사이더 아트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창작자들이 내면세계와 직관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예술이다. 창작자의 삶과 경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이 예술 형식은 기존 규범과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한다. 전시는 이를 현대적 맥락으로 확장해 사회적 약자나 주변부 예술가의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고 협업과 창작 과정 자체가 지닌 치유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프리즘이 빛을 통과해 다양한 색으로 확장되듯 이번 전시는 개별적인 예술적 개성과 집단적 창작이 결합해 예술의 본질을 새롭게 비추며 관객들에게 깊은 사유의 장을 제시한다.

민낯 같은 무대의 빛나는 감동…'더하우스콘서트' [공연리뷰]

더하우스콘서트는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되고 있다. 2002년 박창수 예술감독의 연희동 자택에서 시작된 이 공연이 시작될 무렵 ‘하우스콘서트’는 붐을 일으키며 관객을 매료하기도 했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는 공연은 더하우스콘서트뿐이다. 손 뻗으면 닿을 무대, 몸으로 느끼는 진동 더하우스콘서트는 2002년 7월 12일 연희동의 가정집에서 시작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박창수 예술감독은 “음악회를 만드는 일은 곡을 쓰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자택에서 첫 하우스콘서트를 올렸다. 각각의 공연에서, 그리고 그 공연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뤄 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겼다. 박 감독은 하우스콘서트에 대한 첫 영감을 “서울예고 재학 시절 친구들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연습하던 기억”이라고 말한다. 음향 시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집이지만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몸으로 진동을 느끼며 직접 듣는 음악의 감동은 그 어떤 연주회장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작품을 만드는 심정으로, 감동을 나누겠다는 의지로 시작한 더하우스콘서트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강당 같은 공간에 피아노 혹은 보면대가 놓여 있으면 그곳이 무대인 것이고 관객은 마룻바닥 위 드문드문 놓여 있는 방석에 앉으면 된다. 관객은 편의에 따라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하며 ‘방구석 음악회’를 감상하고 연주자들은 관객의 숨소리와 눈빛을 동력 삼아 민낯 같은 무대를 헤쳐 나간다. 대가와 신인, 관객 모두에게 공평한 이곳 1천78회, 20여년의 시간 동안 거의 매주 쉬지 않고 열리고 있는 하우스콘서트의 2025년은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과 피아니스트 박영성의 듀오 연주로 시작했다. 연희동 자택을 시작으로 광장동, 역삼동, 도곡동 등 녹음실과 스튜디오를 거쳐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 정착한 지 10년째인 더하우스콘서트는 매회 50~100명의 관객이 찾는다. 이날은 새해 첫 하우스콘서트라는 기대감과 설렘 때문인지 예술가의집 마루가 꽉 찼다. 공연이 끝난 후 진행된 미니 토크에서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대표는 유튜브를 통한 생중계 동시 접속자 수도 100명을 훌쩍 넘었다며 고무적인 새해 출발을 알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은 201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0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 연세대 음대 관현악과 조교수로 재직 중인 임지영은 최근 올바른 세대교체의 정석과도 같은 국내 바이올린계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행보와 연주력을 갖추고 있는 연주자다. 임지영은 아주 정성껏 연주하되 지루하지 않았고 정석적이면서도 대중이 좋아할 요소를 갖춘 소리와 매력을 갖춘 연주자였다. 특히 그녀의 연주 중 발동작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개 서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리를 고정한 채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음악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음악에 따라 춤을 추듯 따라가는 스탭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연주나 감상을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도 연주자가 온전히 음악에 몰두했다는 느낌을 줬고 저음에서 고음, 지판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는 만큼 보폭도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져 감상에 오히려 도움을 준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날 함께한 피아니스트 박영성은 “함께 연주하지 않은 곡을 찾는 것이 빠르다”고 말할 정도로 자주 호흡을 맞추는 파트너로 연주 초반부 두 연주자 모두 ‘영점’을 맞추는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였지만 곧바로 완전한 앙상블을 보였다. 임지영은 연주 후 토크 시간에 “관객으로서 하우스콘서트를 즐기러 올 때마다 분위기가 매우 좋았는데 실내악이 아닌 듀오로 오게 돼 설레었다”며 “(하우스콘서트가) 최근 연주 중 가장 기대되는 무대여서 심혈을 기울였는데 쉬는 시간 없이 세 곡을 연달아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며 웃었다. 그 말처럼 슈베르트 ‘론도 D.895, Op.70’, 그리그 ‘소나타 2번, Op.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소나타 Op.18’까지 한 곡 한 곡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소리꾼 장사익이 마다하지 않는 무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각각 15세, 17세일 때 그들을 먼저 알아보고 연주의 기회를 준 곳이 바로 더하우스콘서트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더 많이 주목받고 있는 최근이지만 하우스콘서트는 그저 언제나 이 무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더하우스콘서트는 2월에도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예술가의집을 지킨다.

스타 안무가 호페쉬 쉑터 ‘꿈의 극장’, 한국 초연 선보인다

세계적인 스타 안무가 호페쉬 쉑터의 최신작 ‘꿈의 극장’이 내달 14일부터 이틀간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은 성남아트센터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국제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한 공동 제작 공연으로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캐나다 등 유럽 및 북미 20여 개 극장과 축제가 참여할 예정이다. 호페쉬 쉑터의 꿈의 극장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억압의 경계를 탐구하며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춤과 음악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쉑터 특유의 역동적인 안무와 직접 작곡한 라이브 음악,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더욱 다이내믹하게 보여주는 강렬한 조명이 어우러져 시각과 청각을 압도하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에너지 가득하고 생동감 넘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현실의 날카로움을 동시에 표현해, 관객들을 익숙한 듯한 낯선 꿈의 극장으로 인도한다. 쉑터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현대무용계 혁신의 아이콘으로, 무용뿐 아니라 작곡, 영상, 영화 등 여러 방면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하며 전 세계에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예술가다. 지난해 6월 파리올림픽 문화 올림피아드의 일환으로 파리시립극장에서 초연했으며, 같은 해 10월부터 영국의 무용 전문 공연장 새들러스 웰스를 비롯해 유럽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에서는 성남과 중국 상하이에서만 만날 수 있다. 쉑터는 작품에 대해 “춤과 음악은 도구일 뿐,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무용에 대한 지식이나 안무가에 대한 정보, 어떠한 선입견이나 경계심 없이 관객에게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성남문화재단 관계자는 “쉑터는 이 작품에서 압도적인 에너지와 감정의 폭발을 통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들에게 강렬하고 충격적인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바란다”고 말했다.

[영상] 쇼는 계속된다...100년사 곡예 ‘동춘서커스’ [로컬이슈]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은 서커스 공연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장내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며 천막극장의 막이 올랐다. 자칭 ‘예술회관급’ 의자에 앉은 관객들의 몸이 무대를 향해 앞으로 쏠렸다. 청년 일곱 명이 기다란 봉 하나에 매달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터였다. 한 손으로 봉을 잡고 옆으로 뉘인 몸을 곡예사들은 마치 땅을 걷듯 공중을 걸었다. 몸의 근육을 세밀하게 쓰는 섬세한 움직임과 고도의 집중력. 100년의 역사와 자존심을 건 한편의 공연이 또다시 시작됐다. 편집자주 지난 9일 오전 11시 안산 대부도의 동춘서커스단 상설공연장엔 강한 바람을 뚫고 주말 첫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의 줄이 꼬리를 물었다. 곳곳에 붙여진 ‘대한민국 최초의, 최후의 서커스단’ 문구는 공연단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동춘 박동수씨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서커스단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예술단체이기도 하다. 100년의 역사만큼 사연도 숱하게 많다. 민족문화가 말살됐던 일제강점기에 전국 순회 공연을 펼치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줬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만남의 장, 지역의 축제가 됐다. 황금기는 1960~70년대였다. 서영춘, 백금녀, 이봉조, 하춘화, 정훈희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과 대중음악가들을 배출한 스타 등용문이자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였다. 단원은 270명에 달했다.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드라마와 영화, 스포츠, 음악 쇼 등에 환호했다. 급기야 1985년 큰 태풍 피해를 보면서 동춘서커스단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동춘서커스단의 단장 박세환씨(81)가 동춘에 입단한 지 23년째였다. “대중문화예술의 원조이자 산실 역할을 해 온 동춘서커스단이 해체되는 걸 지켜볼 수만 없어” 박 단장은 1987년 동춘을 인수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를 반복하며 2011년 현재의 자리에 짐을 푼 동춘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현재는 지역의 명물로 전국 각지에서 동춘서커스를 찾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연간 관람객만 15만명. 대부도의 자연경관과 함께 동춘서커스단의 볼거리가 더해지자 인근 상권은 더욱 살아났다.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안정 궤도에 들어섰지만 박 단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서커스에 대한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고 단원 양성이 어려워 서커스 단원은 현재 서른 명 안팎으로 크게 줄었다. 7년 전부터 한국 단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중국 등 해외에서 계약을 맺어 단원들을 데려와 공연을 선보인다. 동춘서커스단의 명맥을 잇고 한국 서커스 활성화를 위해 박 단장은 공연장 인근에 부지를 마련해 서커스 아카데미와 박물관, 극장을 만들 계획이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의 산실인 동춘의 역사를 잇고 브랜드를 키워내겠다는 각오다. “우리는 대강할 수 없어요. 브랜드 가치를 지키고 살려야 하니까요. 앞으로 또 100년 써내려 갈 동춘의 역사를 여러분이 함께 지켜봐주세요.” 박 단장의 목소리에 강한 힘이 실렸다. 인생을 타는 서커스, 어른에겐 청춘을... 아이에겐 동심을 “여러분이 앉아 계시는 15m 상공에는 가느다란 철선이 하나 있습니다. 그 외에는 한 치의 땅도 없습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서독 서커스가 이와 똑같은 연기를 보냈을 때 여러분들은 ‘저것이 과연 사람이냐 귀신이냐’ 손바닥이 째지도록 박수를 쳤던 묘기~. 여기 동춘의 곡예사가 보여 드리는데 박수 하나 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 인정도 사정도 피도 눈물도 애국심도 없는 분들입니다.” 장내에 쩌렁쩌렁 하게 울리는 박세환 동춘서커스단장의 멘트가 끝나자 객석에선 떠나갈 듯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장에 줄을 매달고 펼치는 실크 공중 곡예, 단체 모자 저글링, 변검변복, 몸에 끈만 매단 채 하늘에서 커플이 선보이는 공중 로맨스 등 공연마다 관객들은 마술에 걸린 듯 탄성을 토했다. 눈속임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증명하는 정직한 무대. 매일의 연습과 땀, 고된 노력으로 빚어낸 무대. 자신의 한계를 매일 깨치고 성장해야 성공하는 무대. 때로는 상대만 믿고 몸을 던질 만큼 상호 신뢰가 있어야 설 수 있는 무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라운 서커스에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재미와 신기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곡예사들에게서 삶의 한 단면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인터뷰 박세환 단장 “100년 지킨 ‘서커스 사랑’... 미래 100년도 이어갈 것” 경주 출신인 박 단장은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63년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했다. 그때만 해도 동춘은 스타의 등용문이었다. 이곳에서만 58년 근무한 박 단장은 1987년 당시 잠실 아파트 3채 가격에 동춘을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박 단장은 “숱한 위기와 고비 속에서 동춘이 100주년을 맞았다니 만감이 교차한다”며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선 아직 할 일이 많다”했다. Q. 쉽지 않았을 텐데. 왜 동춘서커스단을 계속 이어갔나. A. 서커스를 사랑했다. 남녀노소, 외국인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서커스다. 지방 공연을 가면 백발의 노모와 손자가 와서 함께 박수치고 즐긴다. 이런 공연이 또 없다고 생각했다. 흥행은 무조건 될 거고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엔 다 서커스단이 있다. 무엇보다 동춘은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원조이자 산실이다. 그런 동춘서커스단이 해체되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대중문화예술의 원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다. Q. 국내 유일한 서커스단이다. A. 우리나라에선 서커스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부 문화예술에만 관심과 지원이 쏠려 있고 전통 대중문화예술인 서커스에는 관심이 없다. 중국은 서커스단만 600개이고, 관련 학교만 500개에 달한다. 그동안 서울과 경기도 등에서 시립서커스단을 만들려고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사당 이후 대중예술의 원조 역할을 한 게 서커스다. Q.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나간 원동력이 있다면. A. 10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동춘이 어려울 때 이를 알려주고 존재의 가치를 보도해준 매스컴과 국민의 응원 덕분이다.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2009년 신종플루로 지역 축제가 모두 취소되며 관객이 급감했다. ‘이제 정말 폐업하자.’ 그때 시민들이 되살려 주셨다. 2009년 12월23일 김포 실내체육관에서 눈이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1천300석이 매진됐다. 20일 공연 기간 내내. 어딜가도 1만5천원 쓰는데, 동춘서커스에 1만5천원 못 쓰나 하며 시민들이 살려 주신 거다. 이 같은 국민들의 지원과 사랑에도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단원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고 운영도 하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와 정부 등의 지원이 절실하다.

중심잡기 예술가 변남석의 ‘NEW 세상의 중심을 잡다’

변남석 작가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밸런싱 아티스트(Balancing Artist)’다. 돌을 세우고, 병을 세우고, 자전거, 세탁기, 공중전화부스 등 크기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서리나 귀퉁이에 중심을 잡아 세운다. 그의 예술성은 CNN, BBC, 디스커버리 채널, FOX TV 등 글로벌 미디어에 출연하며 예술의 경계를 넘어선 독창적인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두바이와 싱가포르, 홍콩, 카자흐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밸런싱 아트를 널리 알리고 있다. ‘중심잡기 예술가’인 그가 이번엔 소리의 균형과 충돌, 공명을 탐구한 전시를 선보인다. 오는 18일부터 28일까지 열흘간 수호갤러리(성남시 분당구) 열리는 변남석 개인전 ‘NEW 세상의 중심을 잡다’는 사물로 균형잡던 그의 기존 작업을 확장한 무대다. 수호갤러리의 2025년 대주제 ‘환경과 예술’을 기반으로 열리는 ‘2025 NEW 세상의 중심을 잡다’ 전시에선 소리라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충돌하며 공명하는지를 보여준다. 바이올린과 빗자루 모양을 한 대나무 등이 오브제가 됐다. 환경음, 자연의 소리, 대화 등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지나쳤던 소리들이 조형적 요소로 기능하며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달 26일 오후 2시에는 변 작가와 함께하는 아티스트 토크와 관객과 참여형 퍼포먼스가 열린다. “소리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형성하며 감각적 경험을 조직한다. 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균형을 탐구하며, 우리가 감각하지 못했던 조화를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태종과 세 아들은 어떻게 ‘안녕’을 빌었나…한국 창작무용 ‘녕, 왕자의 길’ [공연리뷰]

무엇이든 뜻한 바대로 행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모든 소유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행복’마저도 이룰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안녕’과 ‘평안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숱한 삶을 목격해 왔다. 지난달 25~26일 아르코예술 대극장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중 하나인 (주)아트로버컴퍼니의 창작무용 공연 ‘녕(寧), 왕자의 길’은 조선의 3대 왕 태종과 그의 세 아들의 운명과 삶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수단인 ‘몸짓’을 통해 “평안한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지존이면서 동시에 아비로서 고뇌했던 한 남자와 권력이라는 소용돌이 앞에 운명이 뒤바뀐 세 아들의 이야기는 전통의 한국무용과 세련된 음악의 결합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태종 이방원. 형제는 물론 처가에도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왕좌를 지켜낸 인물이자 저물어가는 고려 왕조를 정리하고, 조선이라는 새 시대를 연 개국 공신. ‘피’의 길을 걸어간 태종은 그래서일까 그의 세 아들 양녕, 효령, 충녕에게 ‘평안하다’는 뜻의 녕(寧)을 대군의 이름으로 내렸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총 5장의 옴니버스 형식의 구성돼 인트로 격인 1장 ‘왕좌의 길’에서부터 세 왕자의 인생이 담긴 각 장을 거쳐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날을 반추하는 태종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왕좌-무위-구도-태평-평안의 길로 표현된 이들의 춤사위는 네 인물이 다다르고자 했던 ‘평안함’을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에게 욕망 혹은 꿈이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녕(寧), 왕자의 길’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다. 장구와 꽹과리를 등 전통악기와 첼로 등 서양악기의 결합, 살풀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한’의 정서에 재즈와 전자음악의 결합으로 세련됨을 더했다. 첫째 양녕이 걸어간 2장 ‘무위의 길’은 리드미컬한 음악, 자아도취의 표정 연기와 자유분방하고 강한 몸짓, 형형색색의 의상들로 표현됐다. 족쇄 같던 세자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풀어헤친 도포 자락과 춤사위에서 그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진 3장 ‘구도의 길’에서 둘째 효령대군은 한스러운 음악과 함께 등장한다. 역동적인 그의 형과는 정반대의 정적인 무대였다. 앞서 파랑, 노랑, 초록 등의 색색의 의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2장과 상반되는 분위기로 3장에서는 통일된 색상의 바지, 어두운 모자를 쓴 무용수들이 무채색의 단체 군무를 선보인다. 아버지에 의해 운명이 뒤바뀐 형과 자신 대신 왕좌에 오른 아우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인 효령. 그의 혼란스러움과 고뇌, 권력에 대한 환멸과 허무는 곡선의 몸짓으로 표현됐다. 승무에서 장삼의 긴 소매를 허공에 흩뿌리고, 무용수들이 펼쳐낸 소맷단의 길을 걸어나가 모자를 벗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세속을 떠나 진리를 탐구하며 불도의 길을 걸어간 그가 추구하는 ‘녕’은 ‘구도’에 있었다.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대왕이 된 셋째 충녕의 삶은 4장 ‘태평의 길’에서 표현된다. 그곳은 ‘화합’의 무대라 할 수 있다. 양녕의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춤사위와 효령의 정적이면서도 강직한 몸짓은 충녕에 이르러 직선과 곡선이 모두 어우러진 카리스마와 온화함으로 탄생했다. 일렉트릭과 전통음악의 결합은 분위기를 한층 더하며 백성을 위한 혁파의 길을 걸어간 세종을 나타냈다. 무대의 정수는 태종이 마지막 남겨진 자신의 평안을 찾는 5장 ‘평안의 길’이었다. 무장 가문으로 유명한 이성계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도와 건국을 이뤄내고, 왕좌의 길에 오르기 위해 숱한 피를 뿌려야했던 남자. 마지막 장은 태종이 지난 삶을 반추하고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넋을 기리는 일종의 살풀이와 같았다. 핏빛의 붉은 조명과 함께 등장한 태종.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무용수들 사이에서 왕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몸을 긁어내기도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기도 끝내 쓰러지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빛의 군무는 그를 둘러싼 폭풍 같은 정쟁이며 그 사이로 곤룡포를 입은 태종은 살풀이를 춘다. 이내 살풀이 천을 허공에 뿌리고, 날리는 그의 모습은 혈육과 수많은 목숨에 대한 넋을 풀고, 과거를 회상하며 끝내 자신도 평온함과 평안함에 이르고 싶었음을 느끼게 만든다. 흰색 천으로 쓰러진 넋의 얼굴을 덮어나가고 무언의 울부짓음과 절규하는 ‘용의 눈물’은 한 인간이자 군주, 아비로서의 그의 인생을 떠올리게 했다. 최재헌 연출가는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풀어보고자 했다”며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소리를 풍기는 첼로를 사용하는 등 한국적인 것에 서양의 악기를 접목하고 재즈와 전통음악을 결합하는 등 특히 음악에서 여러가지 각도로 시도해봤다”고 밝혔다. 이어 “아들들만큼 평온하길 바랬을 아버지의 마음을 한국무용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며 “자신의 평안함을 위해 욕심도 내고, 후회도 하는 모습은 모두가 공감해봄직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작품은 올해 말 국립정동극장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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