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비

편서풍을 타고 날아드는 황사현상은 봄철의 불청객이다 황사의 진원지인 중국에서는 예부터 ‘황진만장’(黃塵萬丈) 이라고 했다. 미세한 황토입자가 먼지로 변해 만장이나 쌓인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사기나 조선실록 가운데 ‘흙비’ 란 기록이 나오것을 보면 조상들도 황사현상으로 애를 먹었던 것 같다. 이동성 고기압이 동쪽으로 이동할때 주로 나타나는 황사현상은 화북 몽골 등 내륙지방의 황토먼지를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곤 한다. 한반도를 지나 북태평양까지 날아간다. 날으는 높이도 4000m나 돼 황사현상이 심하면 시계가 흐려져 항공교통이 통제되기도한다. 봄에 많이 생기는 이유는 동아시아의 봄이 이상건조 현상을 일으킬 만큼 매말라 황토가 쉽게 날릴수 있기 때문이다. 황사현상이 기관지나 눈의 질병을 유발하는 것은 상식화된 가운데 벼멸구같은 병해충도 날아온다는 설이 있었다. 최근에는 축산업에 일대 타격을 주고있는 구제역도 병균이 황사를 타고 왔을 것이라고 당국의 말이 있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구제역같은 병균은 황사속에 섞였다해도 벌레나 벌레알과는 달리 태양광선에 노출돼 살균된다는 학설이 더 유력하다. 황사현상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내년부터 조성된다는 보도 (본지 11일자 7면)가 나와 주목을 끈다. 산림청이 중국당국과 함께 우란부허 사막등에 방풍림 설치를 위한 한·중 임업협력회의를 오는 7월에 갖는다는 것이다. 드넓은 내륙에 무슨수로 방풍림을 조성한다는 것인지 잘 알수 없으나 시도해보는 노력은 가상할만 하다. 올 황사현상은 유별나게 잦고 농도가 짙어 말 그대로 ‘흙비’를 방불케 한다. /白山

산불

지난 주 강원도 영동에서 산불이 일어나 이틀동안 계속돼 임야 천 수백헥타르를 태우고 강릉에서는 산간의 가옥에까지 불이 붙어 집 여러채를 태운가운데 3명의 사상자까지 냈다. 산불의 기세는 정말 무섭다. 한번 불붙은 산불은 뜨거운 열기바람이 삽시간에 주변의 초근목피를 건조시키면서 불바다로 만든다. 산불은 또 바람이 불면 더욱 거세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산불 자체가 산간의 기압골에 변화를 가져와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불똥이 20∼30m까지 튀는 바람에 계곡에서 계곡으로 건너 마구 번진다. 산불진화를 잘못하다가는 불에 갇히거나 열기와 연기에 질식, 자칫 인명을 잃기 쉽다. 중국의 삼국지에 흔히 나오는 것이 화공이다. 제갈량이 남만을 칠때 화공법을 썼다. 아비규환속에 수많은 인명이 불타죽는 것을 보고 “내가 제명에 못살 것이다”라며 자책했다. 제갈량은 그후 얼마 못가서 중원 원정길에 나섰다가 폐결핵이 도져 객사했다. 그건 그렇고, 김성훈농림부장관의 대국민담화가 가관이다. 법정 최고형을 구형한다지만 산불낸 사람이 잡힌적이 없다. 산불대책을 소홀히 한 자치단체장을 문책한다는 것이 말인즉슨 맞지만 그에 겁먹을 단체장은 없다. 관선단체장때보다 민선단체장 들어 산불이 더 잦은게 임기를 믿고 겁먹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전시용 반짝시책 따위만 신경쓰지 산불같은 것은 건성이다. 정부는 산불진화에 관련한 특수장비, 전문지원대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도내도 올들어 30여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지금은 아프리카 밀림처럼 바람으로 나뭇가지가 마찰을 일으켜 불이나는 예는 없다. 결국 사람이 불을 낸다. 입산자의 사소한 부주의가 큰 산불을 내는 것이다. 입산자를 단속해야 한다. /白山

저질 쇼

지난 3월 31일 일부 장·차관과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파주산 육류 시식회’가 여의도 국회안 ‘의원동산’에서 있었다. 지금 전국적으로 축산농가를 긴장시키고 있는 구제역에 대한 일반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헌신적(?)인 행사였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과 환경부장관을 비롯, 농림부·축산업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이날 시식회에서 먹은 돼지고기·쇠고기는 당연히 구제역이 발생한 파주산 고기인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참석자들이 실제로 먹은 고기는 파주산이 아니고 농림부 산하기관인 한냉·양돈협회가 제공한 고기라는 것이다. 시식회에서 상당수 참석자가 안먹으려고 하자 주최측이 ‘이건 파주산이 아니라 한냉에서 사온 고기라 안전하다’고 말하자 50㎏을 구워 먹고, 남은 20㎏은 참석자들이 싸갔다고 한다. 며칠 뒤 이 저질 쇼가 탄로나자 국회농림해양수산위원장측은 행사준비를 맡았던 한냉·양돈협회가 31일부터 파주의 질병 발생 반경 20㎞ 이내의 육류 반출이 일절 금지되자 다른 곳에서 고기를 가져온 것으로 안다고 변명했다. 농림부측도 이 때문에 행사 이름을 ‘우리 축산물 시식회’로 바꿨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농림부 한 관계자는 당시 행사에 사용된 고기는 모두 한냉에서 갖고 온 것이라고 밝혔다. 구제역에 걸린 소·돼지고기가 인체에 전혀 해로움이 없다는 것은 이미 확실히 밝혀졌다. 차라리 ‘파주산 육류 시식회’를 열지나 말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다. 한복 입고 누드 쇼를 했다고 우기는 것 같은 정말 치사한 쇼가 아닐 수 없다. 당국의 매사가 이러하니 정부가 하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시식회의 음식도 가짜가 있으니 정말 믿지 못할 세상이다. /淸河

궁중사극

KBS-TV 사극 드라마 ‘용의 눈물’과 ‘왕과 비’가 끝나고 ‘태조 왕건’ 방영이 시작됐다.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용의 눈물’과 ‘왕과 비’는 시청자들의 인기와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용의 눈물’과 ‘왕과 비’ 등 궁중사극은 아무리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사실고증이 잘 안되고 정치사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등 문제거리가 많았다. 궁중의 과부인 대비들은 소복을 입고 여생을 보내게 마련인데 ‘왕과 비’에서 덕종비 인수대비(소혜왕후)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계속나왔다. 대비가 마구 걸어서 궐정을 왕래하거나 왕의 집무실에 멋대로 나타나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사실이 아니다. 궁중의 왕족이나 비빈들은 몇 발짝을 움직이려 해도 연(輦)이나 가마와 같은 것을 탔었다. 조선시대에는 신하들이 왕을 접견할 때는 항상 부복(俯伏)의 자세로 대화를 하고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임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는데, 사극에서는 신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마주 앉아 왕을 노려보면서 큰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연출됐다. 실록은 승리자의 기록인데 궁중사극이 실록을 위주로 제작되고 있는 데도 문제가 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남긴 자료들을 근거로 한다면, 패한 자, 또는 민초들의 삶을 그리기가 어렵다. 잘못된 궁중사극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그르칠 수 있고, 역사와 현실정치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눈을 해칠 수 있다. 극작가들은 물론 역사학자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극본자체가 문학적 창작에 속하기 때문에 픽션이 허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물을 다룰 때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특히 지나치게 시청률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국민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부양하는데 힘써야 한다. TV 방송국이 궁중사극을 제작할 때는 지나치게 시청자의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淸河

誤報를 바랐던 특종…

지난 3월 27일 7시쯤이었을까. 본사 편집국장에게 농림부 고위관리의 간곡한 전화가 걸려왔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파주지역의 가축괴질에 관련한 전화였다. 구제역이란 말은 빼달라는 것이었다. 1보는 이미 괴질로 나갔기 때문에 이날 제작하는 속보는 의사구제역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국장은 여러가지로 생각한 끝에 차마 의사구제역으로 못박지 않고 ‘구제역으로 의심되는 괴질’로 속보를 내보냈다. 사실은 은폐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확실한 역학조사가 나올때까지 구제역이란 말을 빼달라는 농림부측 생각이나 의심되는 사실을 숨길수 없다고 보면서 농림부측의 의중을 살린 본사 생각이나 다 국익을 고려한 것이다. 경기일보의 보도는 물론 근래 드문 특종이다. 그러나 제발 오보이기를 바라는 마음 없지 않았다. 지난 2일이었다. 마침내 가축검역기관에 의해 구제역으로 공식확인됐다. 그순간, 특종이 확인된 기쁨보다는 축산업 기반이 뻥 뚫리는 아픔이 크게 클로스업됐다. 대형교통사고로 사망자와 중상자가 속출한 가운데 마감시간에 쫓기는 취재기자가 중환자실 문턱에서 몇명이 더 숨질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몰매맞을 일이다. 하지만 기자가 그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숨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정확한 실상을 보도하기 위한 고충인 것이다. 신문을 만들다 보면 이런 어려움이 있다. 구제역은 불행히도 국지적 문제가 아닌 전국적 현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 축산업의 기반보호를 위한 범국민적 노력이 요구된다. 당국의 대책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내 소비가 늘어야 한다. 구제역은 인체와 무관, 무해하다는 국제사회에 공인된 관계당국의 말을 믿어야 한다. /白山

‘바꿔’의 참뜻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중략) 누가 누굴 욕하는거야.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 너나 할것 없이 세상속에 속물들이야. (중략)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후략)/ 테크노 가수 이정현씨가 부른 ‘바꿔’란 노래가 총선을 틈타 더러 후보들의 로고송으로 애용되는 것 같다. 정치권에 식상하거나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 또 젊은층의 유권자들을 노리는 듯 하다. 하지만 뭘 바꾼다는 말인가. 바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바꾸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바꿔야 할 것도 있지만 안바꿔야 할 것도 있는 것이 세상사다. 다만 무조건 바꾸고보자는 것은 파괴적 사고방식으로 지극히 위험하다. 무책임하기도 하다. 바꿔야 할 것은 바꿔도 생각해가며 바꿔야 한다. 무턱대고 바꾼다고 다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바꿔’를 작사 작곡한 최준영씨는 어느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가사가 내포한 바꿔의 참뜻은 자신의 변화를 강조한 것’이라고. 그런데도 ‘바꿔’를 애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아마 그 반대인 듯 싶다. 자신의 변화보다는 타인의 변화를 더 강요하고 있는 양상이다. 남을 바꾸기 이전에 자신부터 먼저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바꾸자는 것은 가사가 말한대로 거짓이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중략) 누가 누굴 욕하는거야.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 너나 할것 없이 세상속에 속물들이야. (중략)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후략)/ /白山

수원중부署 ‘예식장’

경찰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원래 봉사니 친절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았던 경찰이 어느사이 ‘봉사경찰’이란 말이 생기고 ‘대민친절’을 강조하는 경찰상이 됐다. 아직은 미흡한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변화다. 과거에 경찰의 이미지가 안좋았던 것은 일제경찰의 영향이 무관하지 않다. 아이들이 울땐 “순사온다”고 하면 뚝 그치곤 했을만큼 악명높았던 것이 일제경찰이었다. 그 이전에는 “호랑이 온다”고 하여 아이들 울음을 그치게 했던 것이 ‘순사’로 바뀌었으니 일제경찰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다. 반세기도 더 넘는 예전 얘기다. 지금은 경찰행정도 조장행정화하여 적극적 개념으로 바뀌면서 여러가지 특수시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런가운데 수원중부경찰서(서장 박점수총경)가 강당을 무료예식장으로 개방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것이지만 생활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도 이용할만 하다. 우선 서장이 주례를 맡아준다하니 주례걱정없고 서원들이 빈 자리를 채워주다보니 하객걱정을 덜수가 있다. 무엇보다 전업예식장과는 달리 결혼날짜를 마음대로 잡을수 있고 또 시간에 쫓기다시피 해가며 예식을 치르지 않으므로 더 경건한 분위기를 가질수가 있다. 경찰은 시민생활을 밤낮없이 지켜주는 불침번이다. 시민생활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려는 다각적 노력은 평가할만하다. 수원중부경찰서 무료예식장은 민경친선의 뜻깊은 광장이 되기에 충분하다. 결혼은 인생의 새출발이다. 뜻깊은 광장에서 좋은 신혼부부의 출발이 많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白山

돈 받는 봉사

1995년 6·27 지방선거 이후 4차례의 전국 선거를 거치는 동안 ‘돈 안드는 공명선거’의 핵심제도 가운데 하나로 칭송받던 선거자원봉사제가 정착되기도 전에 역사의 유물로 사라지려나 보다. 무보수·자발적 참여의 자원봉사자는 드물고 돈맥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성 봉사자’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봉사정신에 입각한 ‘무료’ 자원봉사제가 미국·영국 등에서 오랜 각고의 노력끝에 정착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출마 후보자들이 자원봉사자에게 음성적으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겨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실정이다. 순수한 자발성에 의존하는 시민단체 봉사자도 돈을 따라 움직인다는 분위기라니 더욱 어둡다. 이번 4·13 총선에서는 유달리 선거브로커들이 극성을 부린다고 한다. 심지어 선거가 끝난 뒤 돈을 주기로 약속한 ‘고액 외상봉사자’도 있어 자원봉사자를 쓰기가 겁난다고 후보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무료로 일해 주는 순수한 자원봉사자 급감현상은 공명선거를 위한 주감시자 역할을 담당하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더욱 큰 타격을 준다. 낙선운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총선연대에 한때 100여명까지 몰렸던 자원봉사자가 지금은 30명 정도만 남아 있는 딱한 실정이다. 이같은 현상은 날로 더해 가는 극심한 정치혐오주의 때문인 것 같다. 재산세도, 소득세도 한푼 내지 않았거나 병역을 기피한 자격미달 후보들은 신경쓸 일도 없지만 공명선거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에서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 떠나가는 현실은 돈이 좋기는 하지만 서글프다. 수고비를 받는 ‘봉사자’, 그것도 ‘자원봉사자’라니 기형어라고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淸河

얼마 전 수원시가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새 도로명 2천131개를 발표했다. 새로 지정된 도로명 가운데 수원의 정취가 느껴지는 까치말길, 산드레미길, 퉁수바위길, 솜말길, 청풍길, 활터재길 등 960개소는 자연지명을 살렸고, 지지대(길) 행궁뒷길, 화령전길, 만석길, 노송길, 칠보효자길 등 226개소는 정조대왕의 발자취와 ‘화성’이 있는 수원의 역사적 배경을 반영했다. 도청앞길, 매교장터길, 거북시장길, 곡선초등길 등 학교와 시장, 공원, 종교시설 등 공공시설의 이름을 딴 곳도 391개소가 있고, 교동은행나무길, 대추원길, 밤밭길 등 동·식물의 이름을 따거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도로명을 골고루 부여했다. 우리의 ‘길’은 크게 나누어 세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과 방도를 나타내는 길, 그리고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은 구상적 실체로서 본래는 단순히 본행을 위한 육상교통의 수단으로서의 길만을 가리켰다. 이런 뜻으로 길을 정의한다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땅 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말에서는 그 길의 양태나 규모에 따라서 오솔길·고샅길·산길·들길·자갈길·진창길·소로길·한길·지름길 등과 같이 ‘길’위에 어떤 관형어를 얹어 구체화하여 사용한다. 새주소 부여사업으로 수원시가 2년간 심혈을 기울여 새로 지정한 산드레미길 등 길 이름은 4월30일까지 주민의 의견을 수렴, 이의가 있을 경우에는 그 내용을 검토·심의하여 개명여부를 판단할 방침이라고 한다. 수원시가 마련한 새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수원 어느 곳이든지 그야말로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淸河

일가

시골 마을이 으레 집성촌(集姓村)이었던 시절이다. ‘한지붕 밑에 팔촌난다’는 말처럼 동네 사람이 거의 일가친척이었다. 육촌, 팔촌은 말할 것 없고 더 이상되는 촌수도 형님 아우, 아제 조카 하며 지냈다. 동네에서 뿐만이 아니다. 지금같은 교통편이 없었던 때여서 백리길도 마다 않고 걸어 일가집을 왕래하곤 했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엎어지면 코닿는 곳에 일가가 살아도 왕래가 뜸하다. 아니, 한해가야 한번 볼까? 몇해가도 만나보지 못한 친척들이 많을 것이다. 안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다. 못살던 때도 친척간에 인정을 내며 살았는데 전보다 잘 산다면서 친척간의 인정은 더 메마르기만 하다. 예전은 농경사회중심으로 생활이 단순했기 때문에 겨울철 농한기 같은 시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다. ‘저마다 바쁘다’고 곧잘 말한다. ‘먹고 살기가 바쁘다’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인정의 결핍을 합리화 시켜줄 수 있는 구실은 못된다. 찾아가지 못하면 전화 한통화로 물을 수 있는 안부마저 외면, 무심하게 지내기가 예사다. 그저 내집하나 아무 탈없이 지내면 그만이라는 정신적 폐쇄공간속에 일가가 멀어져가는 세태가 됐다. 이러다가는 사촌, 육촌이 길에서 스쳐도 못알아보는 세상이 되지 않겠나 싶다. 과연 사람이 산다할 수 있을는지. 새봄에 집안 어른들에게 안부전화라도 열어 겨우내 어떻게 지냈는지 여쭈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찾아가면 더욱 좋겠지만…. 문명이 발달하면 왜 인성을 잃어가는 것인지 누가 한번 연구해 볼만한 과제일 것 같다. /백산

食補

도라지는 거담진해에 좋다. 미나리는 청혈작용을 하며 파는 칼슘, 무는 비타민이 많다. 콩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된장은 항암효과가 있다. 같은 콩이지만 두부나 콩나물은 또다른 영양소를 지닌다. 참깨, 마늘 등은 성인병 예방에 좋다. 우리의 전래 먹거리는 이처럼 약재효과가 있다. 예를들자면 여기에 다 적을 수 없을만큼 많다. 쑥갓 하나만 더 들겠다. 쑥갓은 비타민 A가 듬뿍 들어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고 발육에 도움을 준다. 피부의 각질경화도 막아준다. 이런 효능을 가진 비타민 A는 다른 식품, 즉 버터에도 들긴 들어있다. 그러나 효과는 자연식품(쑥갓)이 가공식품(버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서양의 음식문화는 굽고, 중국은 볶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무치는 것이 많고 국이 특징이다. 많은 자연식품을 무쳐먹는 것은 식품이 지닌 약효적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으므로 100% 흡수한다. 국을 끓인다 해도 굽고 볶는 것보단 훨씬 덜 파괴된다. 우리 조상들이 일상경험으로 축적한 음식문화는 이처럼 위대하다. 육식보다 채식을 많이 했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데 있다. 비록 과학적으로 설명은 못했으면서도 가장 과학적인 음식문화를 물려준 것이다. 춘곤증이 있기 쉬운 계절이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밥맛을 잃기가 쉽다. 이런때일수록이 잘 먹어야 잃은 식욕을 되찾는다. 봄나물같은 자연식품을 즐겨먹는 것은 더욱 좋다. 보약도 밥을 잘 먹고나서 보약이다. 아무리 좋은 보약도 보약만 먹고는 살아갈 수 없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홍문화 약학박사는 “백가지 보약이 있다해도 식보(食補)를 당할 수 없다”며 밥 잘먹는 것이 가장 큰 보약임을 강조한다. /백산

담배

WHO(세계보건기구)가 담배규제에 나섰다. 오는 5월 각국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담배통제협약문안을 작성하는 1차 회의에 이어 2003년까지 정식협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WHO는 담배가 인체에 미치는 해독의 심각성이 단순한 권고만으로는 시정되지 않는다고 보고 이같은 강제규제 추진을 벌이는 것이다. 이로인해 세계 각국의 담배제조업체가 크게 긴장하고 있다. 여기에 최대 담배 생산업체인 미국의 필립 모리사 같은 회사는 흡연보상위기에 몰려 담배사업의 파산신청을 검토중이다. 미국 5대 담배회사가 소송이 계류된 흡연 피해자들에게 보상할 판결 규모는 무려 5천억달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앞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94년 담배를 마약류로 분류하는 법을 만들어 담배광고 및 판촉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클린턴은 백악관에서의 흡연을 전면 금지시킨데 이어 담배 세금을 크게 올리는 의료계획법을 만들기도 했다. 또 같은 해 미 국방부는 4월 8일을 기해 국내외 모든 군사기지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하는 금연령을 내렸다. 장병의 직접 금연이 아닌 영내 금연으로 담배를 끊게하므로써 건강을 도모하고 근무시간의 낭비절감같은 부수효과를 가져왔다. 담배를 끊는 사병은 외출·외박을 더 내보낸다. 이는 미국이 아닌 우리 국방부가 최근 장병의 금연유도를 위해 시달한 ‘금연운동 활성화지침’이다. 부대마다 흡연·금연구역을 두어 엄격히 관리하면서 금연사병은 외출·외박 특혜로 금연 파급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군장병 흡연율은 72%로 일반인의 68%보다 높은 것이 입대해서 담배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끽연권보다 혐연권이 우선시 되는 것이 나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백산

무기력한 인간사회

기원 전 14세기경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MOSE)는 사람이 만약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때는 그 생명으로써 갚게 하고, 눈을 상하게 했을 때는 눈으로써 갚게 하고, 이를 다치게 했을 때는 이로써 갚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Jesus)는 그렇게 한다면 원한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복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살인자에 대한 사형은 법이 대신 복수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는 이 또한 시인하지 않았다. 예수는 모든 것을 자비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 말을 너희들은 들었노라. 하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 사람이 만약 너의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을 내 놓아라. 너를 소송하여 하의를 뺏으려 하는 자 있거든 상의도 내어주어라….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는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자 함이로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 햇빛을 악한 자의 위에도 선한 자의 위에도 비춰주며, 비를 올바른 자에게도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도 내리도록 하시도다.” 예수의 이러한 박애정신을 실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수도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가르친 것은 하나의 이상의 지표를 내세운 것이다. 사람은 이 예수의 ‘자비’를 온전히 실행은 못할 망정, 접근하려는 노력은 해야겠다. 그러나 자고 나면 인심이 달라지고 마치 카인(cain)의 후예들처럼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요즘 사회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을 내놓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하기란 참으로 벅차다. 오늘날은 인간사회가 너무 무기력하다. /淸河

자유 희망사항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스벨트(1882∼1945)는 젊어서 정계에 입문했는데, 불행하게도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엄습한 일대 경제 공황 속에서 대통령에 뽑혔다. 루스벨트는 대담하게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한 뉴딜정책을 써 파탄지경의 경제를 바로 잡는 데 성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의 여론을 통일하여 연합국측에 가담케 하고 ‘민주주의 병기장’으로서 대량의 무기를 공급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의한 선전포고와 함께 자신도 참전하여 독일과 일본의 군주주의를 꺾는 데 압도적인 역할을 했다. 루스벨트는 승리를 눈 앞에 두고 과로로 쓰러졌지만 현대사의 눈부신 주역으로 칭송을 받는다. 루스벨트는 정치가로서의 많은 능력과 재질을 갖추었는데 특히 변론이 능변이었다고 한다. TV가 없었던 당시 루스벨트는 ‘노변담화(爐邊談話)’라는 타이틀로 라디오를 통하여 대중과 접촉했다. 타이틀 그대로 난롯가에서 허물없이 정담을 나누듯 대중에게 이야기한 그의 ‘노변담화’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한국의 이른바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히틀러식으로 선동하고 절규하고 지역감정에 불이나 지르는 것 과는 달랐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1941년 1월 6일 조회 연설에서 ‘4가지 자유’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전체주의적 파시즘국가들과 대립하는 자유세게의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를 말한 것으로 ‘언론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가난에서 벗어날 자유’, ‘공포에서 벗어날 자유’였다. 오늘날의 한국도 아직 이 네가지 자유에서 모두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더도 말고 한가지만 추가할 게 있다. 국민들이 ‘저질·불법 국회의원선거에서 벗어날 자유’이다. /淸河

비례대표

요즘 4·13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인선중인 비례대표, 소위 전국구의원 후보자 명단을 보면 비례대표제 무용론이 또 다시 불끈 솟구친다. 지역구 의원에 대한 전문성 보완이나 유권자 사표 방지 등 본래의 취지는 이미 강 건너 갔고 이익·관변단체장들을 위한 자리 나눠주기용에서부터 낙천자 반발 무마용이 되었다. 각당 총재의 충성파에 대한 선심용과 정치자금 모금용에 이르기까지 원칙이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거의 확정적인 전국구 후보들의 행적을 보면 그동안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아왔던 사람들도 많다. 이익·관변단체장들을 끌어 들여 그들 단체의 표를 모아보려는 속셈이 훤히 보인다. ‘재정기여도’라는 명분으로 전국구를 전국구(錢國區)로 전락시킬 조짐 또한 여기 저기서 드러난다. 열악한 재정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벼락부자 아니면 돈 힘 믿고 세상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금배지를 함부로 내주려한다면 크게 잘못될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렇게 걱정스럽고 어수선한 비례대표 후보선정 시한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자민련 명예총재가 얼마 전 비례대표 순번 7번을 자청했다고 한다. 자민련은 아마 5번까지를 당선 안정권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잘못되면 명예총재가 국회에 진출하지 못할 불상사가 생기는 모험이다. 5번안에 들어갈 사람은 넘치는데 5번 이상은 아무도 받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7번을 자청한 이유라고 한다. 워낙 정치고수라서 진심인지 선거전략인지는 며칠 더 두고 보면 알겠지만 만일 다른 당 총재나 대표도 안정권 밖의 비례대표 순번을 자청한다면 욕은 조금 덜 먹을 것 같다 /청하

1912년 4월 영국의 4만6천t짜리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를 뉴펀들랜드 남방 북대서양상에서 침몰, 2천2백여 승선인원중 1천5백여명을 익사케한 것은 타이타닉호와 충돌한 거대한 유빙의 빙산이었다. 지난 20세기에 해수면이 높아졌다고 보는 과학자들은 세계 곳곳의 빙산이 녹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남·북극의 해빙이 가속화하고 있어 해수면은 훨씬 빠르게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인구 1만1천여명의 남태평양 섬나라 투발루가 바닷물에 잠겨간다는 보도가 얼마전에 있었다. 해발 4.5m인 투발루는 바닷물이 3.2m까지 치솟아 6시간동안 물에 잠긴적이 있고 인근 무인도 두곳은 지난해 아주 바닷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세계적인 환경단체로 꼽히는 미국의 월드위치는 지구상의 얼음이 급격히 줄어듦으로 인해 심각해진 환경위기를 경고한 것으로 보도됐다. 북극해의 유빙이 6%줄었고 두께도 3.1m에서 1.8m로 얇아졌으며 남극대륙 역시 거대한 빙붕이 속속 떨어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얼음은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사라져가고 있다. 고산지대의 네팔에서는 빙하가 급속히 녹는바람에 홍수까지 났으며, 미국 로키산맥의 빙하 또한 해빙현상을 보인다. 빙하는 이밖에도 많이 녹아 2050년이면 25%가 없어지고 2100년에는 알래스카와 히말라야를 제외한 빙하는 모두 사라질 것으로 과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로 지표온도가 높아져 태양열 일부를 적정선에 유지시키는 얼음이 녹는바람에 지구의 온난화가 더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대기오염은 이처럼 빙산과 빙하를 파괴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대기오염 뿐만 아니라 폐수오염으로 먹는 물까지 망치는 판이다. 지하수도 점점 고갈되는 실정이다. 물의 소중함을 한층 더 강도높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세계 물의 날’이다. /백산

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淸朝)를 무너뜨린 손문은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공화정체를 선언, 대총통에 취임했으나 이내 군벌인 원세개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스스로 제위에 오른 원세개의 독재, 제3혁명에 의한 퇴위등 우여곡절끝에 국민당 중심의 국민정부가 들어선 것은 1919년 10월이다. 손문의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표방한 국민당은 이때부터 집권당이었다. 손문에 사사하여 국민당혁명군 총사령이던 장개석은 1928년 북벌군을 지휘, 그해에 국민당정부 주석이 됐다. 중·일전쟁땐 모택동과 국공합작, 항일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있을때는 장개석 국민당주석의 적잖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제2차대전후 장개석은 중화민국 총통에 취임했으나 모택동에게 밀려 1949년 대만으로 옮겼다. 1975년 장개석 사후 그의 아들 장경국이 총통이 됐고 이등휘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이번 대만의 정권교체는 대만에서만 50년만일뿐 대륙시절까지 합치면 1919년 국민당 창당이후 실로 81년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잃은 것이다. 대만의 변화는 본토사람의 득세다.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당선자 역시 1951년 대만에서 출생한 토박이다. 장개석과 함께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노쇄했고 그 자녀들 역시 대부분이 대만에서 낳고 자라 대만사람이 다 됐다. 17세기말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한인(漢人)들이 이주, 원주민인 고사족(高砂族)을 누르면서 청나라 영토가 된 대만은 1895년 일본의 영유가 됐다가 1945년 2차대전후 중국으로 되돌려졌다. 파란 많은 36㎢의 섬, 대만의 장래가 궁금하다. /백산

글씨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했다. 당(唐)나라가 관리를 뽑는 전형방법으로 이 네가지를 기준한데서 유래한다. 용모, 말씨, 문필, 판단력을 테스트했던 것이다. 이 네가지 기준은 근대사회까지 품격의 척도로 전래되어 좀 괜찮은 사람을 말할때 ‘신언서판이 반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세번째인 문필은 글과 글씨를 말한다. 필치와 필체로 글(필치)도 좋아야 하지만 글씨(필체)를 잘 써야 했던 것이다. 세계에서 동양 삼국의 한문권 문화에서만 쓰이는 붓글씨가 쇠퇴한 것은 펜촉이 나오고 부터였다. 잉크에 묻혀가면서 글씨를 쓰는 펜이 또 자취를 감춘 것은 60년대 후반 볼펜이 등장하고 나서였다. 그러나 볼펜시대에 들어서도 글씨는 역시 잘 써야 했다. 글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했다. 달필(達筆)은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았다. 한동안 타자기가 많이 쓰였다. 타자기시대에도 중요시 되던 글씨가 컴퓨터시대에 들어서서는 거의 외면돼가고 있다. 손으로 글씨를 쓰기보다는 컴퓨터를 더 많이 사용한다. 사무를 보면서 글씨를 쓰는 예는 거의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N세대의 한문실력은 부모이름도 못쓸 만큼 엉망이고 어쩌다 쓴다해도 쓰는 것이 아니고 그리다시피하는 것을 많이 본다. 요즘엔 초·중고등학생들 가운데서도 한글마저 글씨가 엉망인 학생이 많다고 한다. 컴퓨터 바람에 글씨쯤 잘 못쓰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풍조가 과연 괜찮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컴퓨터 입력을 통한 글(글씨)보다는 육필 글씨가 더 정감을 준다. 컴퓨터의 편익도 좋지만 인간미를 기계에 아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글씨쓰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산

초대권

각종 공연장에 무료입장할 수 있는 초대권은 당초 객석을 채우기 위한 고육책으로 시작됐다. 출연자가 자기 PR을 위해 무더기로 입장권을 사서 친지나 제자들에게 뿌리는 사례도 적지는 않았고 반대로 출연자의 가족이 출연자의 인기도를 높여줄 목적으로 다량의 입장권을 구입, 초대권 형식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초대권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공짜 심리와 특권의식의 발로가 됐다. 지금도 외국의 유명 교향악단이나 인기 오페라·뮤지컬 공연이 있을 때면 국회의원 비서관이나 정부 부처 직원들이 초대권을 보내라고 공연 주최측에 전화를 건다고 한다. 티켓 값을 줄테니 ‘초대’ 도장이 찍힌 입장권을 달라는 요구도 한다는 것이다. 초대권 소지자는 특권층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프랑스·일본·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선 홍보를 위한 프리뷰 공연에서 평론가·언론·후원기업에 초대권 몇장 보내는 것으로 그친다. 일본에서는 현장에 올 수 있는지 확인해 최종적으로 초대자 명단을 작성, 초대권을 발송해 사석(死席)을 예방한다. 지정석이 있는 초대권을 받고도 입장하지 않아 객석의 이곳저곳이 비어있는 우리의 공연문화와는 다른 것이다. 공연기획자 재팬아트의 경우 2천석 규모의 공연에서 4%(20장)정도를 홍보용 초대권으로 제공하고 출연 성악가들에게는 1장의 초대권을 준다. 3년째 2백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뮤지컬 ‘노틀담의 곱추’를 공연중인 파리 팔레 드 콩그레 관계자는 ‘고위 공직자들로부터 초대권 청탁이 들어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공짜 티켓을 요구한다구요? 그건 조직폭력배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조직폭력배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초대권 갖고는 입장하지 않는 공연장 문화가 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청하

봄비

“이 비 그치면/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푸르른 보리밭길/맑은 하늘에/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이 비 그치면/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임 앞에 타오르는/향연(香煙)과 같이/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동양적 서정 세계를 부드럽고 아늑한 율조로 읊은 이수복(李壽福) 시인의 ‘봄비’라는 詩다. 산과 들을 적시는 봄비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 봄엔 풀리게/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풀리게 하옵소서./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초록의 눈물, 그리고 땅속의/벌레들 마저 눈뜨게 하옵소서./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새 소리, 물 소리에/귀는 열리게 나팔꽃인양,/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불붙게 하옵소서” 연천 태생의 박희진(朴喜璡) 시인의 ‘새봄의 기도’라는 詩다. 그리운 사람처럼 기다리던 봄비가 16일 전국적으로 내렸다. 잠시 내린 이 봄비로 지난 2월 19일부터 한달가량 전국에 내려졌던 건조주의보가 경기도와 서울, 강원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제됐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도와 인천에 적게 내려서인가, 도무지 봄비가 왔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정치꾼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자연이 오염되었는가, ‘봄은 찾아 왔는데 봄이 정녕 온 것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李白의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이수복의 ‘봄비’같은 봄비가 온누리에, 그리고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속에 종일 내려 박희진의 ‘새봄의 기도’처럼 나뭇가지마다 초록눈물이 맺혔으면 좋겠다.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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