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삼각산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그날이 오면’의 시 한구절이다. 민족소설가이며 시인인 심훈은 이토록 간절히 ‘그날’을 염원했으나 끝내 광복을 못본 채 1936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요절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조선조)이 강제 병합된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보기까지의 36년은 끝없는 광복운동의 연속이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삼국동맹국과 싸웠던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연합국의 승리가 안겨준 선물이 광복으로 알려졌으나 광복운동의 주체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강제합병 직후 대한제국의 해산된 군대가 중심이 되어 한동안 제국회복운동을 벌인 복벽운동을 비롯해 1919년에는 마침내 200만 민중이 들고 일어선 3·1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국내인사의 해외망명, 해외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하여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따라 그해 4월 10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시영의 신흥무관학교, 이동휘, 김좌진, 홍범도 등의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맹활약을 보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세력이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혁명노선으로 양분되면서 공산주의자들도 크게 활약한 이 무렵의 광복운동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끼리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광복의 기쁨속에 비운의 38도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미·소 점령군의 군사편의에 의했던 것이 그대로 굳어져 무려 55년이 흘렀다. 이로인해 6·25 전쟁을 치르는 등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 설움을 안고 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산가족상봉도 한반도에서만이 볼 수 있는 세기적 비극이다. 통일의 제2 광복절을 맞이할 날은 과연 언제쯤일는지. /白山

대통령의 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딸인 첼시(29세)가 지난 7월, 15일간 계속된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회담에서 아버지의 자문역할을 했다고 인터넷 신문 ‘드러지 리포트’가 보도한 적이 있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데니스 로스 중동 특사 등 사이에 서류철을 든 채 앉아 있는 첼시의 사진도 게재됐는데 백악관은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일단은 부인했다. 대통령의 딸이 ‘국정에 개입’한 것은 첼시가 처음이 아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막내딸 에이미(32세) 역시 아버지가 개최한 국가 공식 만찬 등에 참석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딸 패티 데이비스(28세)는 엉뚱한 언행으로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렸다. 엄격한 아버지와 남편 밖에 모르는 어머니에게 불만이 많았던 그녀는 돈에 쪼들린다는 이유로 플레이보이지 나체 모델을 자원해 포르노에 가까운 비디오를 찍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41세)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이래 스폿라이트를 피해 조용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달 1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막되는 민주당 전당대회 둘쨋날 연사로 나서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어머니 육영수여사가 비운으로 타계한 뒤 20대 때 퍼스트 레이디 대역을 5년간 했다. 1998년 4·2 보궐선거(대구달성)에 당선, 국회의원이 된 이래 짧은 기간이지만 정치적으로도 고도성장을 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놓고 찬반이 분분하고 있어 지금 딸의 입장에서 세상 인심을 야속해하고 있을 것이다. 박 부총재는 “이젠 여성대통령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통령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박 부총재는 매력적인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여권이 전망하고 있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과 같다”는 박 부총재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제는 ‘전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서마는 아닌 듯 싶다. /淸河

용두각

수원의 화성(華城)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벼랑 아래에는 물 맑은 연못이 있는데 이러한 전설이 있다. 조선조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성(1794∼1796년)할 무렵 방화수류정을 짓기 전 이곳은 광교산에서 흘러 내려온 망천(忘川·수원천)이 휘돌아 나가는 깊은 연못이 있었다. 승천을 위하여 천년 수양을 쌓는 용이 산다는 전설이 서린 연못이었다. 이 용은 연못가에 놀러 나오는 나이어린 한 처자를 바라보는 낙으로 하루 하루를 지냈다. 어느 날은 발이 미끄러져 연못에 빠진 처자를 아무도 몰래 건져주기도 했다. 어쩌다 처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은 인간이 아닌 처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아름다운 처자는 혼기를 앞두게 되었고 용은 승천할 날이 가까워졌는데 시름거리가 생겼다. 용이 어느새 처자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용은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에게 고민을 털어 놨다. 옥황상제는 용에게 인간이 되어 처자와 살든지, 아니면 처자를 잊고 승천을 하든지 택일할 것을 명했다. 승천을 택한 용이 어느 날 공중으로 떠오르며 연모했던 처자를 아주 잊을 수 없어 잠시 멈춰 처자가 사는 집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처자도 용이 승천하는 하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용은 가슴과 온몸이 굳어져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천년간의 노력이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용의 몸은 연못 옆으로 떨어져 내려 언덕이 되었고, 머리부분은 바위가 되었다. 후일 수원사람들은 용의 머리처럼 생긴 바위를 용두암, 용이 살던 연못을 용지, 또는 용연이라고 불렀다. 화성을 쌓을 때 용두암 언덕에 지은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누각이 벼랑 아래 용지 수면에 비치는 일명 용두각으로도 불려지는 방화수류정 난간에 기대어 전설을 떠올리면 수원팔경 중 하나인 ‘용지대월(龍池待月)’이 더욱 신비로워진다. /淸河

부동산중개료

고려시대부터 쓰인 객주(客主)란 말은 객상주인(客商主人)의 준말로 거래를 알선하는 위탁매매업자를 뜻한다. 거간(居間)은 객주밑에서 흥정을 붙이는 것으로 전업자를 거간꾼이라 하였다.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포목(布木)거간, 양사(洋絲)거간, 우(牛)거간, 금전(金錢)거간, 가(家)거간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가거간은 가쾌(家쾌)라고도 하며 집주름이라고도 했다. 집뿐만이 아니고 토지등 부동산거래를 알선해 전 근대적 복덕방의 원조라 할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말기에 100여개의 복덕방이 있어 500여명의 가쾌들이 활동하던 것이 서구문물이 들어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난립하기 시작했다. 1890년 이를 규제하기 위한 ‘객주거간규칙’이 제정됐다. 이에따라 한성부(서울)에 한해 허가제가 실시되었으나 1910년 이후엔 다시 자유화 됐다. 누런 삼베에 ‘복덕방’이라고 쓴 초기의 복덕방은 노인들이 소일삼아 거간노릇을 해주고 중개수수료로 선물이나 인사치레의 구전을 받았다. 복덕방이 신고제가 된 것은 1961년 제정된 소개영업법에 의해서였고 중개업자가 중개사 자격시험에 의한 면허제가 된 것은 1984년 제정된 부동산 중개업법에 의해서였다. 부동산 중개업은 점차 기업화되면서 이젠 전문직종이 됐다. 건설교통부가 중개료 현실화를 위해 만든 관련 규칙이 중개사 업계에서 비현실적이라며 세찬 반발을 하고 있다. 중개료 규칙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기는 신·구규칙 모두가 마찬가지다. 지켜지지 않는 규칙은 없는 것만 못하다. 정부가 부동산 중개료까지 관여하기보단 차라리 자율화하거나 자유화해 업자끼리 자유경쟁에 의한 시장원리에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白山

長官學

중폭 개각(8개부처 장관·3개부서 장관급)이 어제 있었다. 어떤 사람들일까. ‘기술의 기(技)자도 모르면서 권력으로 다스리려는 장관이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개혁성, 전문성, 참신성을 바탕으로 기용했다고 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거짓말하는 장관이 있다. 그런 장관이 돼지 않아야 한다. 무책임한 장관이 있다. 자신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장관이 돼야 한다. 대통령의 얼굴만 살피는 장관이 있다. 이런 장관은 장관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직언할줄 아는 장관이 돼야 한다. 장관이 자리에 연연하면 사람이 추해진다. 일은 장관노릇 십년할 의욕으로 하면서, 마음은 오늘이라도 당장 그만 둘수 있는 신념있는 장관이 장관다운 장관이다. 부처할거주의를 일삼는 장관은 장관재목이랄 수 없다. 장관은 부처업무를 장악, 부처공무원들의 존경을 받아야 제대로 일을 해낸다. 장관따로 부처공무원따로의 따따로가 된 실패한 장관들의 전철이 그런 교훈을 일깨워준다. 장관은 윗사람을 면종복배해서도 안되고 아랫사람들로부터 면종복배의 대상이 돼서도 안된다. 장관은 미래가치의 개척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장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형안이 요구된다. 장관은 정치인이 아니다.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장관의 품위를 스스로가 떨어뜨린다. 장관이 사심을 가지면 판단과 선택에 오류를 범한다. 장관을 그만 두어도 국민이 좋게 기억할 수 있는 장관이 돼야 한다. 장관이 장관답지들 못하면 나라 살림이 흔들리고 장관이 장관들다우면 국정이 편안해진다. 8·7개각의 장관들은 어떤 장관일는지? /白山

개각

개각이 임박하면서 장관자리하나 얻으려는 물밑다툼이 대단한 모양이다. 웃기는 것은 자민련 사람들도 한몫끼어 JP(김종필)에게 줄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경제부처 자리를 제의받은 어느 대학 경제학교수는 ‘책임지고 일할 자신이 없다’며 고사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느때고 쓸만한 사람은 마다하고 별볼일 없는 사람들은 나서는 것이 권좌를 둘러싼 세상 인심이다. 장관자리가 권좌이긴 하나 내각책임제와는 달라서 대통령중심제하에서는 임면권자인 대통령 눈치만 살피는 자리밖에 안된다. 이런 개각을 앞두고 청와대나 정치권 움직임보다 일부 신문이 한술 더떠 누군 어떻고 누가 어쩌느니 하며 믿거나 말거나한 하마평으로 야단인 것이 가관이다. 신문의 요란한 입각점치기는 아마 우리만이 있는 관행적 기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도 일종의 흥미위주의 폐단이다. 신문의 점대롱흔들기에 거명된 인사들은 설사 기용이 안돼도 기용설엔 포함됐으므로 그리 기분 나쁜 얘기는 아닐 것이고. 그나저나 개각 뚜껑이 열리면 또 한번 프로필(각료)이란 것이 대서특필 될 것이다. 프로필이란 것을 보면 ‘○○통’이고 ‘박학다식’하고 ‘청렴결백’하고 무슨 ‘귄위자’고 해가며 다 그럴듯한 인물묘사 일색이다 그런 각료(장관)들이 그때마다 일해온 것을 보면 별 신통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저 간단한 인적사항만 기재하면 될 일을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늘어놓는 프로필을 제대로 읽을 독자가 과연 얼마나 될는지. 장관이 바뀌면 부처 공보관실이 부랴부랴 미사여구로 만들어 배포하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찍어내는 지면낭비의 프로필이란 것을 또 볼때가 멀지 않은것 같다. /白山

경원선

경원선(京元線)은 서울에서 철원·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총연장 222.7㎞의 철도로 1914년 9월 6일 개통됐다. 지금은 국토분단으로 서울 용산역에서 신탄리(薪炭里)까지의 88.8㎞만 운행되고 있다. 국토를 가로 질러 수도 서울과 동·서해를 잇는 간선철도인 경원선은 함경선과 이어져 두만강 연안에 이르고, 국경을 지나면 대륙철도에 접속돼 산업·군사상 막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울과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였던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이나 경목선(京木線:지금의 호남선)에 비해 결코 작지 않았다. 따라서 그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였다. 프랑스, 독일, 일본이 외교적 압력을 가하면서 경쟁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내세운 ‘철도와 광산 경영은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원칙에 의거 모두 거부됐다. 1899년 6월 17일 정부는 경원선의 부설을 박기종(朴璂淙) 등의 국내 철도회사에 허가하고 6월 24일 이를 관보로 공포하였으나 자금사정으로 선로측량도중 중단됐다. 결국 경원선 부설은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의 마수에 식민지 경영수단으로 빼앗기고 말았는데 1911년 10월 15일 용산∼의정부 구간 31.2㎞를 처음 개통했고 1914년 9월 16일 원산에서 경원선 전통식(全通式)이 거행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건설을 제의함에 따라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되는 경원선 복원사업 추진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정부가 남측구간인 신탄리∼군사분계선 구간 16.2㎞의 복원을 위해 지난 91년 설계를 하고 1998년부터는 용지매입까지 착수했다니 그동안 일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경의선과 함께 남북한 산천을 힘차게 달리는 경원선의 기적소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淸河

수원 깍쟁이

‘깍쟁이’란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게를 차려 놓은 사람, 즉 ‘가게쟁이’에서 변화된 말로서 오늘날의 상인을 말한다. 국어사전에는 ‘인색하고 이기에 밝은 사람’ 또는 ‘몸집이 작고 얄밉게 약빠른 사람’ 등으로 풀이돼 있다. 옛날부터 수원(水原)은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은 화성군 태안읍 소재지이지만 병점리(餠店里)는 지명 그대로 떡점거리로 유명해 언제나 성시를 이뤘다. 또 현재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장안문 밖에는 1796년 조선조 22대 정조가 양재역(良梓驛)을 폐지하고 신설한 역참(驛站:역마를 갈아서 타던 곳)인 영화역(迎華驛)이 있어 상점들이 많았다. 지금 영화동이 예전에 역촌(驛村), 역말(驛馬), 또는 영말(역마을)로 불려졌던 연유이다. 그런데 수원을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 중에는 먼 길을 오고 가느라 노자(路資)가 떨어져 수원 사람들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병점이나 영화역 일대에서는 숙박비나 식비를 내지 않고 몰래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아무리 인심 좋은 수원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연히 계산에 밝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거나 하룻밤 유숙한 뒤 계산을 했거나 하지 못해 무안을 당하고 수원을 떠난 외지사람들이 ‘수원에는 가게쟁이만 산다’거나 ‘수원사람은 가게쟁이’라고 푸념 아니면 원망했을 것은 짐작이 간다. 수원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여러가지 말 가운데 ‘수원사람은 깍쟁이’는 그러니까 ‘수원사람은 가게쟁이’라는 뜻인데 ‘수원사람은 계산이 밝다’로 생각하는 게 옳겠다. 그 옛날 수원 가게쟁이들이 수중에 돈이 없는 길손들에게 어느 정도나 야박하게 대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양가는 길에 수원사람을 많이 사귀어라’고 했던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 /淸河

경의선

白山 경의선은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를 종단,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국제간선 철도다. 전장 499.3㎞의 경의선이 1906년(광무10년) 4월 3일 개통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조정은 처음 부설권을 주었던 러시아 상사가 재력이 없어 못하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 외세배격을 위한 직영에 나섰다. 조병식을 총재로 한 ‘서북철도국’을 내장원에 설치, 서울∼개성간 철도 부지측량에 나섰다. 그러나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통감부는 서울∼신의주간 군용철도부설이 필요하다며 ‘임시군용철도감부’란 것을 두고 철도부대 병력을 동원해 제멋대로 공사에 나섰다. 조정은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할수 없이 50년간 임대조건으로 경의선 부설권을 내주고 말았다. 군인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경의선부설을 서두른 일본은 불과 733일만에 개통시켰다. 전근대적인 공법으로 하루에 730m를 부설한 셈이니, 공사가 얼마나 강행군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개통시키고나서 개량·보수공사(터널 신설 19군데 교량증개축 328군데)를 하는데 본공사기간보다 긴 4년이 걸렸다. 경의선이 만주까지 운행된 것은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가 가설되고 나서다. 전 구간이 복선화 된 것은 1943년 5월로 대륙침략과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였다. 1945년 8월말, 38선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면서 끊긴 경의선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울∼개성간마저 끊겨 문산간 46㎞만 운행해온지 오래다. 1차 남북장관급회담 합의사항으로 문산∼장단간 12㎞(남측구간), 장단∼봉등간 8㎞(북측구간) 등 허리가 끊긴 20㎞의 경의선 복원공사가 연내 추진을 보게 됐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철도종단점의 소원(표어)이 이루어져 비무장지대를 관통, 개성∼사리원∼평양∼안주∼신의주까지 달릴 날이 그리 멀지 않을것 같다. 여기엔 북측 공사비를 남북경협자금으로 입체하든지, 북측 차관도입에 남측이 보증을 서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이산가족

남북이산가족 사이의 이혼소송, 재산다툼에 관련한 몇몇 사례의 소송 및 법률문제가 일부 지상에 보도되고 있다. 생사여부조차 몰랐다가 살아있는 소식이 알려진 재회기대의 감격속에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성급한 흥미위주의 과장보도인지, 아니면 세태가 그런 것인지. 요절한 손창호 감독이 각본을 쓰고 주연한 영화로 ‘동경 아리랑’이 있다. 젊은 여성들이 일본에 가면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허황된 꿈에 부풀어 건너갔다가 호스티스로 전락, 그곳 건달패의 노리개가 되어 돈은 커녕 인생 자체를 망치는 내용이다. 손감독 자신이 일본에서 7년간 영화공부를 하며 직접 보고 들은 얘기를 소재로 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KBS-1TV 특별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그해 11월 14일까지 무려 136일동안(453시간 45분)에 걸친 생방송으로 1만189가구의 국내 및 해외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었다. 6·25 전쟁때 가족이 헤어진 경위를 화면을 통해 서로 확인하다가 “맞다! 맞어!”하며 손수건을 적시는 재회의 눈물속에 기쁨을 터뜨리곤 한 감동의 프로그램이었다. UPI는 ‘텔레비전사상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평했고 AP는 80여개국에 주요기사로 타전하는 등 세계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나중에 방송가에 들린 소식으로는 지극히 일부의 예이긴 하나 그중에선 ‘차라리 안만났던 것보다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 들려 뒷맛을 씁쓸하게 한 적이 있다. 돈 탓이다. 다시 만나고보니 복잡한 재산다툼이 벌어져 서로 그리워하며 만나지 못했을때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이다. 돈도 좋지만 정이 앞서야 한다. 사람의 도리가 앞서면 재산문제는 절로 잘 풀릴수가 있다. 사람의 도리를 정이 아닌 법으로 먼저 풀려면 잘 풀리지도 않고 더 어려워진다. 서로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이산가족들의 좋은 만남이 되기를 바라고 싶다. /白山

전자시대의 행정사무

근대에 타자기, 복사기 등 사무기기의 발달은 행정사무의 능률화에 변혁을 가져왔다. 지금은 전자시대다. 컴퓨터의 눈부신 발달은 행정사무를 지면화(紙面化)에서 화상화(畵像化) 추세로 가고 있다. 행정사무의 화상화는 종전의 결재(보고포함) 양식이 얼마나 비능률적인가를 드러낸다. 경기도가 결재단계 등을 대폭 축소한 행정체제개선지침을 시달한 것은 행정사무의 전자화 조치로 시의적절하다. 결재를 5∼6단계에서 3∼4단계로 축소, 위임전결권을 강화한 것은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게 된다. 내친김에 화상결재도 검토할만하다. 결재단계가 많아 결재받다가 시간 다 보내는 폐단은 폐단대로 낳으면서 책임소재가 불분명했던 것이 종전의 결재체제였다. 회의도 마찬가지다. 청, 국과별 회의로 오전 한나절을 거의 회의로만 보내는 것은 전 근대적 행정문화의 유산으로 심한 낭비다. 회의는 횟수가 적을수록 좋고 시간이 짧을 수록 좋다. 회의가 잦고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무슨 일이 잘 안된다는 징후다. 행정수행을 위한 회의를 30분이내로 제한하는 도의 지침은 전자문화시대 들어 이행할만하다. 화상회의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첨단감각과 맥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 행정사무문화다. 정보산업의 눈부신 발달은 행정사무문화의 부단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원래 행정관리의 목표는 지침에 따라 구체화 된다. 이번의 경기도 행정사무개선지침이 구체적 명확성, 인식의 통일성, 일체적 협동성에 의해 새로운 행정사무문화로 성숙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白山

화성 사랑

조선조 제22대 임금 정조가 수원에 축성한 화성(華城)이 복원되기 전 수원 사람들은 사대문(四大門)의 보존 형태를 ‘동문(창용문)은 도망가고, 서문(화서문)은 서 있고, 남문(팔달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장안문)은 부서지고’라고 비유했다. 여자애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이 말에 무슨 동요의 곡을 붙혀 불렀다. 화성의 사대문중 장안문과 창용문이 부서지고 도망간 것은 6·25때 였다. 서울 숭례문보다 규모가 더 큰 팔달문, 장안문과 창용문의 이층 누각이 멸실되고 성벽과 수많은 누각들이 파괴, 훼손됐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막대한 국고지원들 받아 1975년부터 5년간 ‘화성성역의제’에 따라 화성의 복원 공사를 마쳤으나 도시형편상 남수문, 남공심돈, 남적대, 남암문은 도시형편상 복원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25일 저녁 화서문에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가 주최한 ‘화성 바로 알기’학술 발표회에서 화성 미복원 시설 현황이 공개됐다. ‘화성에 배포된 정조때의 문헌’, ‘화성 주변경관 계획에 관련 연구’에 이어 발표된 화성 미복원 시설은 36개소로 밝혀졌는데 다소 난관은 있겠지만 지금도 복원이 가능한 시설들이어서 화서문 성문밖 야외에서 밤9시30분까지 열린 세미나 인데도 참석자들로 하여금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성 바로 알기’세미나의 주제 발표자나 토론자들은 도시 공학박사 등 박사들이 많았는데 따로 학위를 명명 하자면 ‘정조학(正祖學)박사’들 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각계의 인사 백여명이 모여 지난 7월25일 창립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은 물론 그날 참석 자들은 ‘화성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미복원된 화성의 시설물들이 모두 복원 된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복원이 전혀 불가능 한 것은 우선 표지석과 안내판 이라도 건립하는 것이 좋다. 앞으로 화성연구회가 할일이 너무 많다. /淸河

시내버스

시내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서면 승객이 우루루 몰려든다. 정류장 사정에 따라 버스가 서야하므로 줄을 설수도 없고 서봤댔자 소용이 없다. 출퇴근 시간이면 버스정류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 노선 저 노선마다 버스 승강구를 향한 아귀다툼이 벌어진다. 버스차장은 단 한사람이라도 더 태울 욕심으로 꾸역 꾸역 밀어넣는다. ‘버스 옆구리가 터질 지경’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차장은 승강구 계단 바닥에 간신히 두발을 걸친채 차체를 두어번 탕탕 두드리는 신호로 개문발차 시킨다. 차가 출발하면서 온몸으로 승객을 밀어대어 간신히 문을 닿는 차장은 대개가 10대 여차장이었다. 서울 시내버스가 60년대 중반까지 이런 실정이었다. 그 무렵의 시내버스 운송사업은 황금산업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승용차 대중화추세로 대중교통사업이 예전같지 않다. 비록 예전같진 않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은 사회의 중추기능 산업이다. 수원시내버스가 서울등지와 연결된 장거리버스에 승객을 잠식당하고 있다. 운행 배차간격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배차 시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배차시간을 지키지 않으므로 승객이 기피해 타산이 맞지 않을수도 있다. 임창열 지사가 시·군 시내버스요금인상안(어른 500원서 600원·중고생 340원서 400원·초등생 200원서 250원)을 두고 서비스개선책이 마련된뒤 실시키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비스개선은 시내버스업계의 자구책 이기도 하다. 시내버스승객이 증가하는 것은 승용차이용이 줄어드는 것으로 교통정체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60년대 콩나물버스는 배차간격만은 잘 지켰었다. 편리하고 쾌적한 현대형 시내버스로 변모, 대중의 교통수단으로 더욱 더 많이 이용될수 있기 바란다. /白山

한해와 수해

한해와 수해는 글자 한자 차이지만 뜻은 정반대다. 뜻은 다르지만 무섭기는 마찬가지여서 한해도 무섭고 수해 또한 무섭다. 으레 한해끝에 수해가 닥치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여 한해대책끝엔 수해대책이 따르곤 한다. 한해와 수해는 모두 재해다. 당국의 재해대책이 한해와 수해를 망라한 ‘중앙재해대책본부’ ‘경기도 재해대책본부’로 한 것을 보면 타당성이 인정된다. 글자 한자 차이로 그때마다 간판을 바꿀수 없으므로. 마른장마속 가뭄으로 애를 태우더니 400㎜ 안팎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마침내 한해끝에 수해가 닥쳐 야단이다. 주로 한수이남의 경기남부지역이 피해지역이다. 연중행사처럼 수해를 당한 북부지역이 무사히 넘긴 것은 다행이나 이번엔 남부지역이 물벼락을 맞았다. 뭐라 할까, 기우제와 기청제를 번갈아 올려야 할지. 예전엔 한해땐 기우제, 수해(장마)땐 기청제를 올리곤 하였다. 지금은 이런 제를 안올리지만 절박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행중 다행히 집중호우는 하루 소나기로 끝나 계속되는 장마홍수는 면했다. 그래도 피해가 상당하다. 한해와 수해는 대자연의 조화속이긴 하지만 피해정도는 물의 다스림, 즉 인간의 치수에 달렸다. 치수는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다. 중국 하(夏) 왕조의 시조 우(禹) 임금이 순(舜) 임금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치수설화는 물을 다스리는 것이 백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지금도 다름이 없다. 수해가 났지만 날씨가 또 가물것이다. 가물다가 역시 수해가 닥칠 수 있다. 앞으로도 벼이삭이 팰 무렵에 부는 계절풍, 가을장마 등을 예상할 수 있다. 재해대책은 평소 꾸준하여 그칠날이 있어선 안된다. /白山

인공기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나라문장(汶章)규정’은 대통령령이다. ‘애국가’는 그나마 규정조차 없다. 안익태작곡 작사미상의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일종의 관습법(관행)에 의해 애국가로 부를 뿐 애국가로 규정한 실정법규는 없다. 북측은 국장(國章), 국기, 국가(國歌), 수도를 헌법7장(168조∼171조)에 조문화해놓고 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기는 기발의 가운데에 넓은 붉은 폭이 있고 그 아래우에 가는 흰 폭이 있으며 그 다음에 푸른 폭이 있고 붉은 폭의 기대달린쪽 흰 동그라미 안에 붉은 오각별이 있다. 기발의 세로와 가로의 비는 1대 2이다.’ 헌법169조 인공기 조문의 내용이다. 지난 정상회담때 남북의 국기가 공식 사용되지 않았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하여 태극기와 인공기 게양은 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회담기간중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울의 대학내 인공기게양에 대한 사법처리방침 보도(당일 아침 TV)를 보고 김대중대통령에게 돌아갈 것(회담무산)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는 황원탁청와대외교안보수석의 말(이북도민회주최 강연회)이 있었다. “얘기가 사실보다 더 나갔다”(황수석), “돌아가라고 한 적은 없다”(박준영청와대대변인)는 해명이 나중에 있긴 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어도 회담기간중 일어난 일의 처벌방침보도에 유감을 표명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대통령의 평양수행에서 돌아와 적절치 못한 실언을 한 것이 황수석이 처음은 아니지만 말하나 가려서 제대로 할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답답하다. 그나저나 앞으로 인공기 게양사건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주목된다. 텔레비전의 남북관계 보도에서 태극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맞댄 그림을 보이곤 한다. 민족화해의 뜻은 좋지만 아직은 역기능이 우려된다. /白山

도깨비

‘도깨비 장난 같다’는 까닭을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짓을 이르는 말이다. ‘도깨비 놀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어 가는 일이다. ‘도깨비 살림’은 있다가도 별안간 없어지는 불안정한 살림이다.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도깨비 달밤에 춤추 듯’ 등 도깨비의 행동을 비유한 말은 꽤 많다. ‘도깨비’를 국어사전에서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괴상한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짖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도깨비는 귀신인 듯 하지만 귀신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도깨비는 본디 ‘돗’과 ‘아비’를 합쳐 ‘돗아비’라고 했다. ‘돗’이란 ‘도섭’이라는 우리의 옛말이다. 도섭은 ‘능청맞고 수선스럽게 변덕을 부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아비’란 한 가족에서 아버지가 가장 윗사람이듯이 작은 무리의 우두머리인 남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돗’이 ‘불’이나 ‘씨앗(種子)’의 뜻을 지녀 ‘돗’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고로 도깨비는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 ‘돗아비’가 ‘돗가비’로 변하였고 그것이 다시 ‘도깨비’로 변한 것이다. ‘돗가비’라는 표현은 조선 7대 왕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불릴 당시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써서 1447년(세종 29년)에 펴낸 <석보상절>이라는 책에 ‘돗가비에게 부탁을 해 복을 빌었다’라고 처음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옛날 이야기에도 귀신은 원한을 품는 경우가 많고 인간을 해치지만 도깨비는 조금은 멍청하고 짖궂어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 인간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오히려 복을 가져다 주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요즘 ‘도깨비 놀음’같은 일이 많이 벌어지지만 그래도 까닭을 모르게 재산이 부쩍 부쩍 늘어감을 이르는 ‘도깨비를 사귀었나’같은 긍정적인 말도 여름밤에 가끔 생각해 보자. /淸河

당쟁

우리나라 왕권시대에는 왕의 호칭에 태조(太祖)·정조(正祖)·태종(太宗)·세종(世宗)과 같이 조(祖)나 종(宗)을 붙였는데 이러한 호칭이 그 왕들의 이름은 아니다. 왕들이 죽은 뒤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 사당에 붙인 칭호로 묘호(廟號)라고 했다. 묘호는 그 왕이 죽은 뒤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조정에서 대신들이 추천하고 왕의 결재를 받아 정했다. ‘조’나 ‘종’을 붙이는 원칙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했는데 공이 많은 임금은 ‘조(祖)’, 덕이 많은 임금은 ‘종(宗)’자를 붙였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애매한 원칙이다. 공이 많은지 덕이 많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은 한 왕조를 건국하였거나 거의 망한 왕조를 부흥시킨 왕에게만 ‘조’를 붙이고 기타 왕들에게는 ‘종’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도 태조(왕건)외에는 모두 종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조’를 붙이는 것이 ‘종’을 붙이는 것보다 더 권위있고 명예로운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후계자인 왕이나 실세 신하들이 아첨하느라고 억지로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여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격이다. 조선 왕조 10대 왕으로 조신유생(朝臣儒生)간에 당쟁이 격심한 혼란중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폭군으로 지탄받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연산주(燕山主·1476∼1506·재위 1495∼1506), 그리고 조선 15대 왕으로 당쟁에 휩쓸려 임해군·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서인파에 의한 인조(仁祖)반정으로 폐위된 광해주(光海主·1575∼1641·재위 1608∼1623)는 군(君)으로 봉작돼 종묘에도 들어가지 못해 묘호가 없다. 당쟁에서 이긴 쪽의 권세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예나 오늘이나 냉혹하고 인정사정 없는게 당쟁이다. /淸河

베트남전

전선없는 전쟁이라고 했다. 베트남전의 특징이다. 적인지 양민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는 베트공(월남인민해방전선)이었다. 군복차림이 아니다. 평상복에 편제(군)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마을의 주민들이 갑자기 짚단더미 등에 숨겼던 총을 꺼내어 쏘아대곤 했다. 길가던 집단 행상의 과일더미 같은데서도 총을 꺼내어 전투를 벌이곤 했던 것이 베트공이다. 전투원인지 비전투원인지를 가릴 수 없었던 베트남전은 그래서 ‘지옥의 전쟁’ ‘악마의 전쟁’으로 불리웠다. 비전투원으로 알고 무심히 보았다가 전투원으로 둔갑한 베트공들에게 수없이 당했다. 파월장병들의 희생이 컸다. 이러다보니 영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사살하는 예가 더러 있었다. 죽지않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했던 것이다. 이 바람에 억울하게 죽은 양민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정부 패망과 함께 하노이정부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된지 25년이 됐다. 근래 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설이 이따금씩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물론 양민이 학살당했다면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전쟁실상이 외면된 감상적 발상으로 사선을 넘나든 파월장병들의 긍지를 손상시키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 전시의 전쟁터를 평시의 시각과 잣대로 보는것 부터가 판단의 균형상실이다. 마치 대단한 인도주의 정신인 것처럼 양민학살설을 말하는 이들에게 양민위장의 베트공에게 당한 국군의 희생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 것인지 묻는다. 하기좋은 말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베트남전의 특성을 알고 말을 해도 해야 한다. /白山

제헌절

1948년 5월 10일 첫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 공포한 것이 7월 17일 제헌절이다.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세운 날과 같다. 정부수립으로 1공화국이 탄생한 것은 1948년 8월 15일이다. 서상일헌법기초위원장과 유진오전문위원 등이 초안한 당초 헌법안은 내각책임제였던 것을 이승만박사가 반대해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우리 헌법은 실로 파란만장한 역정속에서 아홉차례나 고쳐졌다. 1차개헌(52년 7월 2일)은 대통령직선제에 국무위원불신임제가 가미된 이른바 발췌개헌, 2차개헌(54년 11월 29일)은 초대대통령에 한한 3선허용의 사사오입개헌, 3차개헌(60년 6월 15일)은 4·19후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2공화국헌법, 4차개헌(60년 11월 29일)은 반민주행위처벌을 근거화한 개헌, 5차개헌(62년 12월 26일)은 5·16 혁명세력이 추진한 대통령중심제의 3공화국헌법, 6차개헌(69년 10월 21일)은 대통령간선제, 7차개헌(72년 12월 27일)은 이른바 유신헌법인 4공화국헌법, 8차개헌(80년 10월 27일)은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후 전두환 노태우소장 등 신군부세력이 추진한 대통령 간선제의 5공화국헌법이다. 지금의 6공화국(노태우 김영삼 김대중대통령)헌법은 87년 6·29 선언이후 그해 10월 29일 국민투표에 의해 제정됐다. 이토록 상처투성인 헌법은 그나마 효력이 중지되는 초법적인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소장과 김종필씨 등이 일으킨 5·16으로 약 1년6개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의해 10개월동안 헌정이 중단된 비운을 겪었다. 대부분 집권자의 통치편의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이 우리 헌법의 개헌특성이다. 헌법은 문자 그대로 ‘법의 법’이다. 제헌절을 맞아 헌법을 존중하면서 국리민복을 이룩하는 정치사회가 참다운 정치발전이라고 생각해 본다.

야생동물 보신

야생동물이 정력과 건강에 좋다는 속설때문에 까마귀가 좋다하면 전국의 까마귀가 멸종될 정도로 수난을 당한다. 오죽하면 파리, 모기가 몸에 좋다고 소문나면 아마 순식간에 없어질 것 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보기 드문 야생 동물 일수록 효험이 많다는 속설은 더 무섭다. 희귀한 야생 동물이 암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밀렵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 사는 300g 정도의 까치살모사는 20만원을 호가하고 같은 뱀 이라도 백사(白蛇)처럼 특이하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다. 천연기념물은 ‘위험 수당’이 붙어 더 비싸다고 한다. 반달곰은 3억원, 사향노루는 3천만원에 팔릴 정도다. 야생동물을 잡는 것은 불법이지만 멧돼지·고라니와 같이 제한된 지역에서 일정 기간 사냥이 허가되는 종류도 있다. 청설모·어치와 같이 숫자가 너무 늘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동물은 지역에 따라 사냥 대상이 된다. 이런 동물이라도 독극물·농약을 사용하거나 올무·덫으로 잡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멸종위기 또는 보호야생 동물은 물론 일반 뱀이나 개구리도 함부로 잡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환경부가 조수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과 자연환경보전법상의 동식물 관련 규정을 ‘야생 동물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로 통폐합하고 처벌기준을 대폭 강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마련 중이기 때문이다. 7월중으로 입법 예고할 이 법률 개정안에는 양서류, 파충류를 포함한 야생 동식물의 무분별한 포획 및 채취 제한 조항과 함께 야생동물 밀렵 밀거래자는 물론 야생동물을 사먹는 사람까지 처벌토록 하는 규정이 포함된다고 한다. 야생동물에게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병원성 세균이나 바이러스, 환경 호르몬이 많이 들어 있어 ‘야생동물 보신’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 생각이 문제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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