强弩末

‘강노말(强弩末)이면 불능천로호(不能穿魯縞)’란 말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한서에 나온다. 전한(前漢)의 경제때 화친을 바라는 흉노의 사자가 장안에 들렀다. 강경론자들은 사자를 목베어 흉노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 장로만이 반대했다. “우리 한군이 수천리밖 흉노땅까지 원정하여 싸워 이기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인마(人馬)가 너무도 피로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앉아서 적을 맞은 오랑케들은 거의 희생없이 우리 군사들을 저지시킬 것입니다. 강노의 마지막 힘이 노호도 뚫지 못한 것과 같사오니 차라리 화친을 받아들이십시오”하고 간언해 마침내 경제는 화친을 맺었다. 한 장로의 간언은 ‘강력한 쇠내활로 쏜 화살이라도 그것이 날으는 힘이 약해진 끝에 가서는 노국(산동성)서 짠 얇은 명주천도 꿰뚫 수 없다는 말로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종말은 아무 힘이 없게 되는 세상 이치를 뜻한다. 자고로 현자(賢者)들은 이같은 이치를 터득했으므로 강했을 때 덕을 쌓았다. 반대로 어리석은 이들은 천년만년 강할듯이 모든 것을 힘으로만 밀어 붙이다가 얼마 못가 못당할 종말을 당하곤 했다. 범부들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사업하는 이들도 이런 세상 이치를 새겨들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하는 사람들, 특히 막강한 권력을 쥔 이는 더욱 명심해 두어야 할 좌우명일 것이다.

플래카드

시위나 대회군중들이 들고 행진하는 ‘플래카드’는 원래 대문에 붙이는 광고물이란 뜻의 프랑스 말이다. 이것이 구호등이 적힌 지금의 데모 개념으로 바뀐것은 프랑소와 1세때의 삐라사건에 유래한다. 1534년 10월 17일 밤 파리 시가지는 물론이고 궁중의 황제 침실문에까지 당시 교회의 부패 타락상을 비난하는 삐라가 나붙어 이를 ‘플래카드사건’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구에 일어난 종교전쟁의 계기가 됐다. 플래카드는 이제 시위등 뿐만 아니라 영리업체의 선전용으로도 널리 이용되어 시가지 곳곳에 걸려있음을 본다. 플래카드게시에는 관계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도시미관을 해칠만큼 마구 나붙은 그 많은 플래카드가 다 허가가 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컴퓨터의 발달이 가져온 또다른 형태의 플래카드가 있다. 인터넷은 그 위력이 실로 놀라운 현대판 플래카드다. 단문의 구호가 아닌 장문의 내용이 담긴 신형 전자식 플래카드인 것이다. 이같은 문명의 이기가 음란물 구설수에 이어 사이버폭력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특정인에 대한 욕설쯤은 예사고 음해를 일삼는 얼굴없는 폭력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16세기에 일어났던 ‘플래카드사건’이 종교전쟁의 발단이 된 것처럼 21세기들어 장차 ‘사이버분쟁’이 일어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점점 무섭게 변화해 가고 있다.白山

중양절을 맞이하여

음력 9월9일은 중구(重九), 또는 중양절(重陽節)이라고 전해온다. 이같은 명칭은 九가 양수인데 이것은 겹쳤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속설에는 제비가 음력 3월3일(삼짇날) 왔다가 9월9일(중양절)에 강남으로 간다고 한다.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9를 양수의 극이라 하여 이것이 겹친 9월9일을 큰 명절로 삼아 왔다. 그리고 이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음력 9월은 추수의 계절, 국화의 계절, 단풍의 계절이다. 옛 사람들이 이 좋은 시기를 그냥 보냈을 리 없다. 중양절은 중국에서 큰 명절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절기가 늦어 추석에 햇곡식을 거두지 못하면 추석차례를 중양절에 지내는 풍습이 있었고 성묘도 이날 하였다. 또 이 날은 국화구경을 즐겼다하여 상국일(賞菊日)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중양절을 명절로 정하여 잔치를 베풀어 임금과 신하가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짇날과 중양절 두 차례에 걸쳐 노인잔치를 크게 베풀어 경노사상을 드높이는 동시에 조상에게도 차례를 올렸다. 지방에 따라서는 이날 성묘하고 시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 문인들은 단풍 든 산과 계곡을 찾아 음식과 술을 즐기며 시를 짓고 풍월을 읊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단풍놀이는 서민층에까지 번져 봄철 화전놀이처럼 단풍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오늘날 즐기는 단풍놀이와 학생들의 가을 소풍은 이같은 옛 조상들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도 많고 복잡한 사건도 많지만 아무튼 계절은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 되었다. 중양절을 맞아 일상사 잠시 접어 두고 단풍 드는 자연의 섭리에 잠겨봄직도 하다./淸河

전국체전 정신

한 세기 전 개항으로 세계를 향해 바다의 문을 열었고, 다가오는 2000년에는 동아시아의 중심 공항으로 하늘의 문을 열게 된 인천에서 지금 제80회 전국체육대회의 열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다. 종합우승 4연패가 낙관적인 경기도와 개최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3위 입상을 목표로 한 인천시가 선전에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각 시·도간의 지나친 경쟁심과 스포츠맨쉽의 실종으로 전국체전이 얼룩지고 있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체급 경기에서는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부상 등을 이유로 기권, 상당수 경기들이 열리지 못하고 있고 육상과 수영에서 등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은 중도 포기하기가 일쑤다. 또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의자를 걷어차는 등 소란이 끊이지 않아 모처럼 체육관을 찾은 시민들의 눈쌀을 찌푸르게 하고 있다. 임원이 심판석으로 달려가 욕설을 퍼붓기도 했는데 이런 불상사는 각 시·도간 경쟁심도 그렇지만 경기에 임하는 일부 선수들과 지도자의 자세에 큰 문제가 있다. 모든 경기는 물론 이기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정당당한 승리여야 한다. 경기를 하는 사람은 경기를 사랑하고 즐기며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그 성과에 만족해야 한다. 또 경기를 심판하는 사람은 규칙에 따라 엄정하게 다스리고 경기를 명랑하게 이끌어야 한다. 선수와 심판, 그리고 체육지도자가 스포츠정신을 망각하면, 이번 전국체전은 자칫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하게 된다. 전국체전 정신은 체육을 통한 국민화합이다. 관람인이 없는 체육경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淸河

전화

말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유선이나 무선으로 보내어 다시 말로 재생하는 것이 전화다. 1876년에 발명돼 미국의 뉴욕∼보스턴간에 처음 개설되었다. 국내엔 1882년 3월 전화가 들어와 실험통화를 했다는 설이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1893년 3월 궁내부에서 전화가설을 추진하다가 동학혁명에 이어 청일전쟁이 일어나 중단됐다. 최초의 전화는 1896년 서울∼인천간에 개통됐다. 이 전화로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에 격분, 일본군 중위를 살해해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인천 감옥에 고종이 전화로 형집행을 면제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초기엔 전화를 어화통(語話筒), 전어통(傳語筒)이라고 했다. 체신기념관에 소장된 1905년의 전화번호부인 ‘각전화소청인표’에는 서울 50명, 인천 28명, 수원·시흥 각 1명으로 나타났다. 1950년대까지 자석식이었다가 공전식으로 발전한 것은 1960년대였다. 전화통화에 교환원이 필요없는 지금의 다이얼로 바뀐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전화놓기가 마치 하늘의 별따기처럼 꽤나 어려웠다. 전화매매에 요즘 돈으로 치면 수백만원상당의 권리금이 붙기까지 했다. 이토록 전화놓기가 어려웠던게 1980년대 들어 흔해지면서 전국 어디든 전화없는 집이 거의 없게 됐다. 전화보급이 1천만대를 돌파한 것이 7∼8년전으로 기억한다. 90년대 중반부터 이동통신이 활성화하면서 전화사정은 또 한번의 혁명을 가져왔다. 웬만한 사람치고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이동통신 가입자가 급속 확산돼 1천만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얼마전에 있었다. 이제는 휴대전화가 아무데서나 마구 터져 신종공해로 등장할 지경이다. 자동차는 많아도 자동차문화가 없는 것처럼, 전화는 많아도 전화문화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게임 감상법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포츠경기를 즐겼다. 스포츠행사를 종교행사로 삼기도 했다. 특이하게 알몸으로 경기를 벌였다. 고대 올림픽같은 당시의 스포츠엔 여자종목이 없었으므로 알몸경기는 물론 남자들 뿐이었다. 관객은 여성에게 허용되긴 했으나 기혼자에 국한, 미혼여성들에겐 관람불가 구역이었다. 처음부터 알몸스포츠였던 것은 아니다. BC720년에 열린 고대올림픽에서다. 스파르타선수 오르십포스가 달리기를 하다가 아랫도리를 휘어감아 허리에 맨 천이 떨어졌으나 주워맬 시간이 없어 그대로 달린 것이 효시가 되었다. 철학자 플라톤(BC427∼347)은 그로부터 3백수십년뒤의 사람이다. 그런 플라톤이 “외국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 알몸으로 경기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여기지만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몸스포츠는 꽤나 장구하게 이어졌던 것 같다. 현대스포츠는 알몸일 수 없는 대신에 유니폼의 간편화를 최대한 추구한다. 여자육상선수들이 배꼽쯤 드러내는 것은 배꼽T가 나오기 전부터 예사다. 88서울올림픽의 히로인 조이너가 매니큐어 귀고리에 가벼운 화장까지 한채 경기를 한 뒤로는 개인종목의 여자선수들은 몸치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남자선수들도 비슷하다. 농구의 경우 팬츠길이를 줄일 것을 검토한 적이 있는데 언젠가는 짧아질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인천체전을 관전하면서 가지각색의 시·도별 유니폼, 선수들 표정 등을 관찰해 가며 보면 한결 더 흥미로울 것이다. 현대스포츠는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승부 못지않은 활력소다.

골프 대중화?

골프는 과연 대중스포츠일까. 장비구입만도 줄잡아 2백만원이 들어간다. 골프연습장 같은데서 배우는데도 역시 몫돈이 들어간다. 골프를 배운 초심자가 웬만해서는 부킹이 어렵지만 어렵사리 필드에 한번 들어선다해도 10만원짜리 수표 한장으로는 어림도 없다. 골프가 귀족스포츠로 혐오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토록 강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중스포츠로 보기엔 요원하다는 것이 서민들 정서다. 김대중 대통령이 어제 인천체전 체육관계자들과 가진 다과회 자리에서 골프의 대중화를 선언했다. “골프가 이제는 더이상 특권층의 스포츠가 아니며 중산층이나 서민 가릴 것 없이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이어 “서민들도 골프를 할 수 있도록 퍼불릭코스가 개발돼야 한다” 말했다. 서민들 가운데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그럴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은 서민층도 못되는 영세민인 것인지. 대통령이 밝힌 골프대중화의 대중은 어떤 대중이며,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서민은 어떤 서민인지가 궁금하다. 골프대중화 선언으로 고급공무원들의 골프행각만을 노골화시키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김미연 선수의 미 LPGA(여자프로골프)승전보끝에 이같은 골프 얘기가 나왔다. 김선수의 우승이 장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녀는 프로다. 프로선수들에게 고위층이 관심을 쏟는 것은 전두환 전대통령때 시작됐다. 김선수의 우승과 골프대중화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고 생각된다.

聖火

성화는 고대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신전에서 태양으로부터 채화하여 올림픽경기가 개최되는 주경기장의 성화대에서 경기가 끝날 때 까지 타오르게 하는 불이다. 채화식이 거행되는 장소는 그리스 남쪽 펠로폰네소스반도 엘리스지방의 피자티스에 있는 헤라신전이며, 채화된 횃불은 올림픽 개최지로 옮긴 뒤 릴레이로 봉송하여 주경기장에 점화한다. 이러한 의식은 고대올림픽 때 부터 비롯됐다. 인간만이 이용할 줄 아는 불은 성스러운 상징으로 떠받들어졌으며 제우스신에 의하여 4년마다 한번씩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채화되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우리나라가 스포츠경기를 위해 성화를 채화한 것은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때 부터이다. 이상백선생(제2대 한국 IOC위원)의 제의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 전국체전이 벌어지는 주경기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올림픽 헌장 제63조에는 성화는 1개여야 하며, 성화는 주경기장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타올라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황해로, 세계로, 미래로’를 슬로건으로 하여 인천에서 11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제80회 전국체육기간동안 인천종합경기장을 환하게 밝힐 성화가 지난 9일 ‘민족의 영산’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됐다. 태양열에 의해 채화된 성화는 강화군수의 제례에 이어 최초 봉송주자에게 전달돼 2박3일간 인천시 전역, 총 199.9㎞ 구간을 거쳐 11일 인천종합경기장에 도착된다. 마니산에서 채화된 성화가 인천종합경기장은 물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두워진 사람들의 마음속을 환하고 따뜻하게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淸河

聖火

성화는 고대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신전에서 태양으로부터 채화하여 올림픽경기가 개최되는 주경기장의 성화대에서 경기가 끝날 때 까지 타오르게 하는 불이다. 채화식이 거행되는 장소는 그리스 남쪽 펠로폰네소스반도 엘리스지방의 피자티스에 있는 헤라신전이며, 채화된 횃불을 올림픽의 개최지로 옮긴 뒤 릴레이로 봉송하여 주경기장에 점화한다. 이러한 의식은 고대올림픽 때 부터 비롯된 것으로, 인간만이 이용할 줄 아는 불은 성스러운 상징으로 떠받들어졌으며 제우스신에 의하여 4년마다 한번씩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채화되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우리나라가 스포츠경기를 위해 성화를 채화한 것은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 때 부터이다. 이상백선생(제2대 한국 IOC위원)의 제의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화, 전국체전이 벌어지는 주경기장까지 봉송하는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올림픽 헌장 제63조에는 성화는 1개여야 하며, 성화는 주경기장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타올라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황해로, 세계로, 미래로’를 슬로건으로 하여 인천에서 11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제80회 전국체육기간동안 인천종합경기장을 환하게 밝힐 상화가 9일, 오늘 오전 10시 30분 ‘민족의 영산’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된다. 태양열에 의해 채화되는 성화는 강화군수의 제례에 이어 최초 봉송주자에게 전달된 뒤 2박3일간 인천시 전역 총 199.9㎞ 구간을 거쳐 11일 인천종합경기장에 도착하게 된다. 오늘 마니산에서 재화된 성화가 인천종합경기장은 물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두워진 사람들의 마음속을 환하고 따뜻하게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淸河

가장 세계적인 향토문학

해마다 제일 먼저 발표되는 노벨문학상은 6개의 노벨상 가운데 가장 큰 주목을 받는다. 노벨이 당초 남긴 노벨문학상에 대한 견해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인물에게 줄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경향’이라는 말이 첫 수상자 때 부터 논란의 대상이 됐다. 1901년 심사에서 에밀 졸라가 유물주의자로 알려졌다는 사실과 생전의 노벨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락되고 프랑스 시인 쇨리 프뤼돔이 대신 상을 받았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앙리 베리그송, 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수상했으나 톨스토이, 입센, 릴케, 발레리 등 순수문인은 번번이 탈락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건물내의 노벨도서관에 대부분 스웨덴어, 영어, 불어, 독일어로 번역된 20여만권의 현대문학작품을 수집해놓고 문학상 선정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는데, 97년 스웨덴어로 번역된 한국작품은 김소월, 조병화, 김지하시인의 시집뿐이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이 심사의 공정성이 부족하다, 서구인끼리의 잔치다, 로비를 잘해야 한다, 한국문학이 수준은 높으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등의 주장이 있으나 과연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되고자 얼마나 노력했는가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가까운 일본은 어떻게 두명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가. 우리는 ‘향토문인’하면, 소위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고 지방에서만 활동하는 무명문인으로 보통 알고 있는데 향토문학과 문인은 그 향토의 풍물·사상 등을 그려내는 문학이다. 가장 향토적인 문학이 가장 세계적인 문학임을 재인식하고 세계화·국제화를 외치는 정부도 이제는 문인들과 함께 진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淸河

가을들녘

가을 들녘은 어디를 가든 한폭의 그림처럼 풍요하다. 희망과 평화와 보람이 담겨있기도 한다. 참새떼를 쫓는 어린 아이들이 논에서 살찐 미꾸라지며 메뚜기를 잡곤 했다. 벌써 오래된 50년대의 얘기다. 지금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사용이 금지된 맹독성 농약을 국내에서는 남용하는 판이다. 미꾸라지나 메뚜기가 살래야 살수가 없다. 가을 들녘이 조류의 극성으로 피해가 적잖은듯 하다. 벼를 쪼아먹는 참새떼도 참새떼지만 밭곡식까지 조류가 덮친다고 한다. 논에 세우는 허수아비가 밭에도 들어서고 있다. 그렇지만 효과는 그리 신통치 않은것같다. 병충해가 농약에 면역되는 것처럼 조류도 허수아비를 허수아비로 알아보는 면역이 생겨 위엄이 서지 않는 것이다. 논밭뿐만이 아니다. 과수원에도 까치 까마귀 떼가 날아들어 배를 마구 쪼아먹는다. 종이봉지속에 든 배맛을 어떻게 알아보는지 조류가 쪼아먹은 것일수록 잘 농익은 것이 일품이다. 세태 따라 변하는 것인지 가을 들녘도 예전의 정경과는 많이 달라져간다. 새떼만이 아니고 인간들도 극성이다. 볏가마 도둑은 있어도 벼도둑은 없었다. 못먹고 못살던 시절에도 그랬다. 지금은 햇볕에 말리던 벼를 밤에 멍석만 덮어 전처럼 들판에 그대로 놔두지 못한다. 벼도둑때문이다. 심지어는 고추같은 것을 밭에서 송두리째 뽑아 트럭으로 훔쳐가는 도둑도 있다. 피땀흘려 가꾼 한해 농사를 망치는 이런 인간들이야말로 조류보다 못하다 할 것이다. 환경친화, 순박한 인심의 예전과 같은 가을 들녘의 정경을 살릴 수는 없는 것인지.

AP통신

1950년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 가운데는 국내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군인이 더러 있었다. 특히 낙동강까지 후퇴하고 9·28수복으로 북진하는 와중에서 더 심했다. 행패는 부녀자들 겁탈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워커대장에 이어 부임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을 불러 그같은 탈선을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엄히 단속하겠습니다. 하지만 각하! 우리 병사들은 목사가 아닙니다.” 리지웨이 말은 목사가 참전했으면 그같은 불상사는 없겠지만 전쟁은 치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오산전투에서 전원 전몰한 스미스부대의 추념비는 지금도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말해준다. 그 치열한 공방전 가운데 어느 미군병사가 참외밭 임자를 찾아 ‘좀 따먹어도 되느냐’며 허락을 받았다는 숨은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미공군의 공습에 의한 충북 영동군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이어 육군에 의한 경남 마산시 곡안리 양민학살사건이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당시 낮에는 이쪽 세상, 밤에는 저쪽 세상이 되곤 했던 전쟁터의 민간인들은 밤은 밤대로 낮엔 낮대로 적과 내통했다며 숱하게 학살당했다. 전쟁의 속성이며 비극이다. 전쟁은 이처럼 참외임자의 허락을 받는 얼굴과 양민을 학살하는 얼굴, 두 얼굴을 낳는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미언론에 의해 제기된 것은 충격이다. AP통신이 기록문서를 추적, 보도한 것을 워싱턴포스트지가 받아 사설로 다루었다. 이미 50년이 다되는 일을 추적한 것도 놀랍고 이를 보도한 것도 놀랍다. 아마 우리같으면 국익에 어긋난다며 매국노취급당하기가 십상일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미전쟁문서도 경이롭고 미국의 진정한 언론자유 또한 경이롭다. 우리와는 격차가 심한 인권의 참다운 면모가 어떤것인가를 보는것 같다.

秘書

진(秦)나라가 16년만에 망한 것은 황제 호해가 우매한 틈을 탄 조고의 전횡때문이었다. 조고는 자신의 위엄을 시험하고자 사슴을 말이라며 황제에 바쳤으나 아무도 직언하는 신하가 없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낳은 조고는 환관이었다. 비록 내시였지만 황제를 지근에 두어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행세를 했다. 조선조에선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는 정사를 관여치 못하게 했다. 비서들이 설쳐 잘되는 일이 없는게 고금의 이치다. 자유당정권때 ‘비서정치’란 말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당간부나 장관이 만나려고 해도 박모비서관의 허락부터 먼저 받아야 했다. 청와대 전·현직 공보수석의 두 박씨가 구설수에 오른 것은 매우 유감이다. 현 공보수석은 중앙일보사장 홍석현씨가 개인탈세 혐의를 두고 검찰에서 조사받으면서 ‘집권(김대중 대통령)기간동안 잘 협조할테니 선처를 부탁했다’며, 홍씨구속은 언론탄압이 아니라고 공식 발표하고 나섰다. 이에 발끈한 것은 중앙일보보다 검찰이다. 대검은 “홍사장과 청와대 사이에 무슨 말이 있었는진 알 수 없으나 그런식의 선처를 요구한 사실이 없다”며 심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중앙일보는 지난 1월 전공보수석이 편집국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인사압력이 있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이같은 전·현직 공보수석의 구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실체를 가려내야 한다. 정권의 도덕성과도 연계된다. 홍씨에 대한 처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전·현직 공보수석에 대한 진실규명이다. 비서는 말을 아끼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직분이다. 자고로 비서가 설쳐서 잘된 일이 없다. 비서를 잘 다스리는 것은 비서를 거느린 이의 책임이기도 하다.

찬바람

어느덧 아침의 찬 세수물보단 더운물이 좋게 느껴진다. 덥다고 호들갑을 떨던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절후란 절묘하다. 오는 9일의 한로(寒露)를 며칠 앞두어서인지 벌써 내륙지방에서는 서릿발이 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고보니 가을하늘이 점점 멀어져가면서 가로수 이파리도 달라지고 있다. 좀 있으면 초겨울이 성큼 다가서면서 연말연시 소리를 듣게 될 판이니 역시 세월은 빠르다. 서민들에겐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이 겨울철이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사람들은 벌이가 신통치 않게 되어 걱정이기도 하지만 우선 생활비가 훨씬 더 든다. 난방비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모든 겨우살이가 돈이 더 들어야 해결된다. 서민들에게는 이처럼 겨울넘기기가 힘겹지만 각종 재해 또한 겨울철에 더 많이나 걱정이다. 화재, 안전 및 교통사고등 이같은 불청객들이 시민 생활을 위협한다. 시·군 등 지방행정은 ‘월동대책’을 세울때가 돼간다. 한데, 해마다 거의 베끼다시피하여 복사판 ‘월동대책’인게 많다. 올해는 좀더 내실있는 대책이 담겼으면 한다. 현실감있고 현장감있고 책임감있는 내용이어야 내실있는 대책이랄 수 있다. 영세민들의 겨우살이도 도와주고 각종 재해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줄 아는 자치단체가 돼야 할 것이다. 1999년도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그보단 20세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올 한해를 잘 마무리 짓는 준비를 지금부터 서둘 필요가 있다. 가을은 원래 좋은 계절이라는데 물난리를 두어차례 겪다보니 올 가을도 어느새 짙어 멀어져 간다. 바람이 차가워진다./白山

檀君

단군은 한국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태초의 임금, 개국신으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전해져오고 있는데 10월 3일은 BC 2333년 단군이 왕검성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날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이후 매년 10월 3일에 민족의 축일을 기리는 기념식과 대제 등의 행사를 치러왔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지난 94년 이전까지만해도 개천절이란 표현조차 사용하지 않았고 일체의 기념식행사도 치르지 않아 왔다. 단군과 관련된 내용을 신화로만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 93년 10월 2일 북한사회과학원이 ‘단군릉 발굴보고’를 통해 단군릉과 단군부부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후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유물사관을 제치고 단군을 인정했다는 것은 계급사관으로부터 민족사관으로 회귀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기에 커다란 태도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단군에 대해 집착하게 된 이유는 기본적으로 평양지역이 한민족의 발상지임을 재삼 부각시키는 동시에 북한정권이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진 정권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뒤늦게나마 북한이 단군릉 발굴을 계기로 개천절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고 단군제를 개최했다는 사실은 민족통일의 공통분모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단군제에서는 국조 단군을 기리기 보다는 단군과 관련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단군을 ‘원시조’로 부르면서 김일성 주석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추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단군은 있다>고 기록한 일본 조선총독부중추원 발행 ‘조선사료’ 3권이 공개돼 단기 4332년 개천절을 더욱 뜻깊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교에 세워진 단군동상이 우상이라고 하여 또 파괴될 우려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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