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104년전인 조선왕조 고종32년(1895년) 11월이다. 상투를 강제로 잘린 선비들은 부모에게 큰 불효를 저질렀다며 식음을 마다하고 호곡하기도 했다. 단발은 남자뿐만이 아니고 미혼의 여자들에게도 가해져 나중엔 단발랑(斷髮娘)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나 여자들에 대한 단발은 강제가 아니어서 뒷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딴 전래의 처녀들 모습을 60년대까진 깊은 산골같은데선 더러 볼 수 있었다. 점점 단발에 익숙된 남자들은 ‘하이칼라’라 하여 머리에 잔뜩 멋을 부렸다. 머리카락에 광택과 방향을 내는 반고체의 포마드를 바르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일본말로 ‘고데’질까지 했다. ‘고데’란 머리털을 지져 다듬는 가위 모양의 집게로 불에 달구어 포마드 질을 한 머리털을 가지런하게 지져 부치는 것으로 그래야 멋쟁이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945년 광복이후 포마드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유행된 것이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린 장발이었다. 1970년대엔 순경들이 가위를 들고 장발족의 머리를 길거리에서 자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장발로 즉심에 가는일도 있었다. 장발붐이 가고나서 1990년대에 불어닥친게 무스바람이다. 예전의 포마드대신 무스를 바른 지금의 젊은이들 머리에 다른게 있다면 꼿꼿하게 세우는 점이다. ‘고데’는 않지만 머리카락을 노랗게 만들어 뒷모습으론 남녀를 구별하기 어려울때가 있다. 세월따라 달라지는 것이 유행이긴 하다. 하지만 환경호르몬탓으로 민물고기의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마당에 남성의 여성취향 또한 혹시 환경호르몬 탓이 아닌가 하여 걱정된다. /白山
뭇짐승 가운데 왕인 사자가 곰과 원숭이, 토끼를 시종으로 삼았다. 그런데 차차 지내보니 곰은 미련하기 짝이 없고 원숭이는 너무 교활했다. 토끼는 살살 눈치만 보면서 잔 꾀를 부렸다. 그래서 사자는 무슨 구실이라도 만들어서 이 세 시종들을 모두 잡아 먹어 버려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어느 날 사자 왕이 세 시종을 불러다 놓고 커다란 아가리를 쫙 벌리며 물었다.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느냐?” 곰은 비린내가 너무 고약하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자왕은 대왕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마구 말을 하니 죽어 마땅하다고 곰을 잡아 먹었다. 원숭이는 “냄새가 정말 향기롭다”고 말했다. 왕을 속이는 교활한 놈이라고 원숭이도 잡아 먹었다. 토끼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인은 요새 감기에 걸려 코가 막혀서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습니다. 며칠 후 감기가 물러가면 다시 맡아 보겠습니다” 사자왕은 하는 수 없이 토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밖으로 나온 토끼는 그 길로 깊은 산속을 향해 줄행랑을 쳐버렸다. 요즘 한국사회에는 정계와 재계 등 가릴 것 없이 실권자 앞에서 사실대로 말하는 곰 같은 사람이 적다. 원숭이 같이 아부하는 부류들이 더 많고, 토끼처럼 살아남을 궁리만 하려고 잔꾀를 부린다. 토끼처럼 임기응변에 능한 자는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 일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라고 곧이 곧대로 말하지 않는다. 금방 죽임을 당하더라도 사자 입에서 냄새가 지독히 난다고 직언하는 곰같은 사람이 필요한 시대이다. /淸河
한국 고대소설의 대표적 작품인 ‘춘향전’은 주인공 이몽룡과 여주인공 춘향의 연애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 특권 계급의 횡포와 이속(吏屬) 및 농민들의 생태와 감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특히 변학도의 관권에 대한 천민의 항거와 자의식의 발로를 높이 평가하며 춘향의 정절을 당시 부도(婦道)의 거울로서 찬양하는 내용인데 작자 및 시대는 미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제인물이라는 고서가 나와 흥미를 더해 준다. 창녕 성씨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는 ‘교와문고’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남원 부사였던 성안의의 아들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제모델이라는 것이다. 성이성의 4대 후손 성섭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교와문고’에 암행어사였던 성이성의 행적을 소개하는 부분중에서 “우리 고조 은교공(성이성)이 일처에 이르렀을 때…걸인의 행색을 하고, 자리에 앉기를 청하니 대취한 관리들이…금중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춘향전’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교와문고’에는 또 암행어사 성이성이 두번째로 남원을 찾아갔을 때 혼자 소년시절의 추억에 잠겨 눈 내리는 광한루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양반 가문에서는 기생과의 스캔들을 큰 창피로 여겨 소년시절 성이성의 ‘불장난’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으며 이에따라 ‘춘향전’의 주인공도 성몽룡이 아닌 이몽룡이 됐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알려진 터에 이몽룡도 실제인물이 사실이라면 ‘춘향전’과 ‘홍길동전’은 대단히 중요한 논픽션으로 재평가 돼야 한다.
동무, 벗, 친구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민중서림 국어대사전은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동무),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하게 사귄 사람’(벗),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벗’(친구)이라고 풀이했다. 그말이 그말같아 구분이 잘 안된다. 지지대子의 일상개념으로는 동무나 벗은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친구(親舊)는 한자 외래어가 아닌가 싶다. 또 동무는 유·소년시절의 친구이며, 벗은 성년이후의 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무따라 강남간다’고도 했고 ‘어깨동무’란 말이 있다. 이 좋은 ‘동무’란 낱말이 마치 금지곡처럼 금기시된 것은 이데올로기시대의 산물이다. 광복직후 좌우익의 격동, 한국전쟁전후 북측 노동당과 남측 남로당 사람들 사이엔 서로의 호칭을 ‘동무’라고 불렀다. ‘김동무…’ ‘박동무…’하는 바람에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동무!’라고 하는 웃지못할 일이 잦았다. 같이 힘써 일한다는 뜻의 조어로 ‘同務’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아무튼 이바람에 유·소년간의 동무소리가 차츰 사라지면서 친구라고 부르게 됐다. 중국에서 이데올로기용어인 ‘퉁즈’(同志)라는 말이 퇴조하고 있다고 한다. 공문서나 공식행사에서는 아직도 ‘퉁즈’가 쓰이긴 하지만 공산당원들까지 일상생활은 ‘셴성’(先生) ‘뉘스’(女史) ‘샤오제’(小姐)등 호칭이 보편화 됐다는 것이다. 동무란 말이 이데올로기 용어로 들리지 않은지는 벌써 오래됐다. 이 좋은 우리말을 활성화시켰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등학교에서 부터 사용돼야 한다. 아이들간의 동무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정서상 걸맞지 않다. ‘동무’란 말보단 아무래도 정감이 덜하다./白山
마녀란 유럽의 전설에 나오는 요녀를 말한다. 악마와 결탁하여 마약(魔藥)을 쓰거나 주법(呪法)을 행하여 인명을 해치는 것으로 믿었다. 마녀재판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세말기 이후 이단자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한 종교재판으로 로마교황의 공인아래 시행됐다. 가장 심했던 1590년∼1680년사이엔 약 10만명이 처형되었다. 이단으로 몰리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마녀로 다루어졌다. 쇠로 만든 반장화를 불에 달구어 신기거나 두 팔을 뒤로 결박한채 발목에는 무거운 추를 단 다음 두 겨드랑이를 로프로 묶어 도르레로 천장높이까지 매달았다가 갑자기 땅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100년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끈 구국의 소녀 잔 다르크가 1455년 영국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이라는 선고를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이단의 누명을 벗고 성녀(聖女)에 오른 것은 465년만인 1920년이다. 마녀재판은 18세기들어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없어지게 됐다. 근래 ‘마녀사냥’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마녀재판을 빗댄 말로 이를테면 언론보도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권력층에서 즐겨쓴다. DJ가 옷사건을 두고 ‘마녀사냥식으로 몰면 안된다’고 말한적이 있다. 무혐의 허위보고내용을 그대로 믿어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만저만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마녀사냥’질책을 보며 옷사건 관련자들이 내심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는가 생각하면 너무나 잔인한 코미디다. 지금 세상에 ‘마녀사냥’이란 당치않다. 언론보도의 여론을 ‘마녀사냥’으로 몰아치는 권력의 속성이 두렵다. 현자(賢者)는 권력에 중독되는 것을 스스로가 부단히 경계한다./白山
수원에 본부를 둔 치매미술치료협회와 영실버아트센터가 마련한 ‘나의 사랑 나의 가족展’이 어제 끝났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부남(扶南)미술관 대전시실에서 열린 ‘나의 사랑 나의 가족전’은 끝날에도 관람객들이 적지 않았다. 부남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은 노재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노재순, 류삼렬·강상중·서해창·선희규·장인희·이태희 화백 등 34명의 한국화단 중견들 작품을 둘러 본 뒤 다른 벽면에 걸린 ‘어린이들의 그림’을 유심히 관람했다. ‘설날’ ‘가을 들판의 허수아비’ ‘가을 운동회’ ‘동지팥죽’ ‘호박넝쿨’ ‘진달래꽃’ ‘팽이치기’ ‘연날리기’ ‘정월대보름’ ‘오월 단오절’ ‘빈대떡’ ‘단풍놀이’ 등 화제(畵題)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사람은 늙으면 어린 아이가 된다’고 하였다. ‘어린이들의 그림’은 실은 치매에 걸린 노인들이 그린 작품들이었다. 70대는 보통이고 80대, 90대의 노인들이 그린 작품은 사람들을 흐믓하게 행복하게 만들었다. 화가들로 구성된 치매미술치료협회 회원들의 지도를 받고 있는 이들 노인들의 그림을 신현옥 회장은 ‘추억의 간이역’이라고 이름 지었다. 추억의 간이역? 과연 그렇다. 치매미술치료협회 회원들은 그림 그리는 치매노인들을 ‘노인 작가’라고 존칭했다. ‘치매미술치료’는 인지기능이 떨어진 노인에게 미술을 통해 현재 또는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영혼의 예술’이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는 데 며칠이 걸린 어르신도 계시지만 도화지와 크레파스만 주면 신통하게도 과거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버드나무 아래서 남녀가 고개 숙이고 있는 그림은 ‘첫사랑’이고, 젊은 시절 군인이었던 어르신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그립니다”라고 했다. ‘봉숭와꼿’ ‘오욀 단워 근녜탄는 광경이요’라고 그림설명을 써 놓는 노인들의 작품도 보였다. ‘나의 사랑 나의 가족전’은 제목 그대로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봉사하는 치매미술치료협회 봉사 활동의 한 과정이다. 한국미술협회·영실버여류작가회·촛불봉사단연합회·평화의 모후원·동서문화교육원·현우도회의 후원도 큰몫을 했지만, 14일간 전시회를 무료사용토록 하고 도록까지 제작해준 부남미술관의 협조가 특히 컸다. 봄날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훈훈한 이야기다./ 임병호 논설위원
김장김치가 발효식품으로 비타민의 보고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상들이 겨울식품으로 과학적인 김치를 생각해낸 것은 생활의 지혜라 할 것이다. 비록 과학이 뭣인지는 몰라도 오랜 체험으로 생활과학을 응용할 줄 아는 슬기를 터득했던 것이다. ‘김장김치는 반 겨울양식’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배추만도 한·두접(접당 백포기)씩 담궜다. 여러가지의 무·배추 김장을 했다. 초겨울 이맘때쯤이면 품앗이로 김장을 담는 동네 아낙들의 노고가 컸다. 요즘은 김치보다 햄버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김장은 여전히 빠뜨릴 수 없는 겨울채비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김장 담을 일부터 먼저 생각하곤 한다. 전같지 않아 먹거리가 많으며 채소 또한 철을 가리지 않고 나오므로 이젠 김장을 적게 담는게 보편화됐다. 보통 열포기 스므포기 정도다. 김장을 이처럼 적게 담다보니 되도록이면 늦게 담는다. 괜히 일찍 담갔다간 따뜻한 날씨로 국물이 부풀어 오르고 김치가 시어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김치공장이 김장김치 주문으로 꽤나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맞벌이 부부나 신세대 주부들의 주문이 많다는 것이다. 편리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치맛을 보면 그 집안의 음식솜씨를 안다고 했다. 가족들을 위한 주부의 정성과 솜씨가 흠뻑 담긴게 김장김치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가족들을 위해 김장김치를 손수 담그는 노력이 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인스턴트식품이 식탁을 잠식하는 시대가 돼가고 있다./白山
광복이후 50년대까지 외국여행은 상상조차 못했다. 정부관료들의 제한된 공무외 외국여행은 있을 수 없었다. 60년대 들어 다소 완화된 것은 경제교류에 기인해서였다. 기업인들의 해외여행이 이무렵에 허락됐다. 70년대 들어서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외환사정의 압박으로 금지된 해외여행이 조금씩 풀리면서 일반인의 외국왕래가 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무렵까지는 외국에 다녀온다는 것이 쉽진 않았다. 우선 신원조회가 무척 까다로웠다.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은 80년대 들어서였다. 90년대 들어서는 외국여행쯤은 보편화됐다. 요즘 외국 다녀온 것을 자랑삼아 말하다가는 ‘팔불출’소릴 듣기에 딱 알맞다. 그런데도 유별나게 외국여행을 못가서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 지방의원들이다. 그들이 ‘팔불출’에 드는 외국여행 타령을 아직도 늘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공짜인 탓이다. 지역주민이 부담하는 세금으로 다녀오기 때문이다. 행자부가 내년도 예산지침으로 지방의회의원들이 해마다 다녀오던 해외여행을 임기동안 한번으로 규정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양시의원들이 이에 발끈하며 반발하고 나섰다. 지방자치단체 예산편성에 행자부가 관여하는 것도 부당하고 지방의원의 해외여행을 제한하는 것은 국제화에 역행된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그럴싸 하지만 씨알이 먹혀들지 않는 소리다. 일찍이 지방의원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공감이 가는 출장보고서 한장 내는것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적당히 꾸며내거나 그나마도 내지 않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해외출장명목에 걸맞는 방문은 겨우 한두가지일뿐 그저 구경하며 사진찍는 것이 고작인게 지방의원들의 해외여행이다. 그러니 행자부가 예산편성지침으로 관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白山
한(漢)나라 때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의 평생 꿈은 출세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출세를 목표로 평생을 열심히 노력했다. 그가 젊었을 때 황제는 문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을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실력을 자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황제의 마음이 바뀌어 경험많은 사람을 좋아해 경험없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중년이 되도록 경험을 부지런히 쌓았다. 그러자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는데 새 황제는 무예를 좋아했다. 그는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무예가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 때 뜻밖에 황제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린 황제가 권좌에 올랐다. 어린 황제는 젊은 사람을 중용했다. 그때 그는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황제의 뜻을 맞추기 위해 수시로 그의 뜻을 바꿔가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성과도 이룰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그는 말단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걸으며 그러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서글퍼져 소리내어 울었다. 그때 길을 지나가던 행인 한 사람이 그를 보고는 뜻밖의 변고를 당했구나 생각하고 우는 연유를 물었다. “나는 반드시 높은 관리가 되어 조상을 빛내겠다고 뜻을 세웠었다네. 그런데 내 나이 이미 60세가 되었는데도 말단 관리에 불과하니 내 인생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뜻을 수시로 바꾼 그의 과거지사를 모두 듣고난 행인은 그의 처지는 동정하였지만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권력자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기 위해 자기를 잊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정치판에 더욱 많다./淸河
고대 중국 촉나라의 유비가 집권하고 있을 때 일이다. 어느 해 가뭄이 너무 심해 흉년이 들자 유비는 식량으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하는 엄금령을 내리고 집에서 술을 빚는 도구가 발견되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했다. 주조 금령이 내려지자 긴장과 소란이 일었다. 대신들도 이 금령중 불합리한 부분을 고치자고 간언하고자 했으나 좋은 방법이 없어 곤란해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익살맞은 풍자를 잘하는 간옹이란 사람이 있었다. 유비와는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한번은 유비와 여행을 하다가 길을 지나가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는데 이때 간옹이 유비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지금 간음을 하려 하는데, 왜 저들을 잡아와 법대로 처벌하지 않습니까?” 유비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간옹이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들은 모두 간음할 때 쓰는 도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유비는 간옹의 말을 듣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주조 금령 중 억지를 띤 부분을 확연히 깨달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유비는 술 빚는 도구로 죄를 다스리는 방법을 즉각 고쳤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유비가 내린 ‘술을 빚는 도구가 발견되면’과 같은 단서가 붙은 단속규정이 많다. 그러나 간옹과 같이 개선을 건의하는 사람이 없다. 설령 간옹과 같이 건의한다고 해도 묵살당한다. 묵살은 나은 편이다. 괘씸죄에 걸려 설 자리마저 쫓겨난다. 시키면 무조건 시키는대로 하라는 식이다. 우매한 권력자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만 교활하도록 지능적인 권력자는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교활하고 지능적인 권력자가 너무나 많은 요즘 세상이다./淸河
전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이가 나이 지긋한 분에게 좌석을 양보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젊은이가 좀 있다 나이든 분에게 다가서면서 “저보고 뭐라 하셨습니까?”했다. 나이든 분이 아무말을 안했다고 하자 젊은이는 “난 또 저보고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 줄 알고…”하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젊은이는 나이든 분이 아무말을 안한 줄 알았으나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는 것이 섭섭해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좌석을 양보하면 당연하다는 듯 인사 한마디 없이 앉는 나이든 분들도 보기가 안좋지만 노인에게 자리를 내줄줄 모르는 젊은 얌체족도 보기가 좋지 않다. 어제 낮 한일타운 건너편에서 탄 시내버스의 좌석이 여학생들로 꽉 찼다. 자리라고는 여학생들이 다 차지해 서 있는 것은 어른들 뿐이었다. 그중엔 나이 지긋한 분들도 있어 차가 이리저리 움직일때마다 손잡이에 매달려 시달리곤 했다. 여학생들은 마냥 웃고 떠드는 바람에 노인의 고역쯤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지 남문까지 가도록 좌석을 내주는 학생은 단 1명도 없었다. 어른들은 그같은 여학생들의 모습에 거슬린 표정을 짓긴 했으나 나무래려 들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같지 않다’는 말은 어느 세대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성마저 달라질 수는 없다. 노인에게 자리양보 안한 것을 두고 인성을 말하는 것은 심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된 것만은 사실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위주의 가치관이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N세대들도 나이들어 성장하면서 생각하는 것도 성숙할 것으로 믿고 싶다. /白山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기자조선의 시조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 의하면 조선에 들어와 전잠, 방직 등을 일깨운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기자의 동래설을 부인, 기자조선 자체를 전설로 보는 견해가 있다. 기자의 묘도 두군데나 있다. 진(晋)의 두예에는 양나라 몽현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평양의 을밀대 아래에도 기자의 묘가 있다. 고려 숙종때 그러니까 800여년전 기자릉을 이장했고 조선시대들어 성종이 중수했다. 기자가 은(殷)나라 주왕 밑에 있을 때 일이다. 120일에 걸친 주지육림의 술잔치가 계속되던중 하루는 주왕이 문득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으나 제날짜를 대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다같이 취해 세월가는 줄 모르고 지냈기 때문이다. 이윽고 기자가 대답할 차례가 되자 그 역시 “모르겠다”고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다 모르는 판에 자기만 알고 있으면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 해서였다. 주왕과는 가까운 친척이었으나 이처럼 몸을 도사렸던 것이다. 마침내 주왕이 망하고나서 그가 망명했다는 것이 동래설이다. 그같은 사람들 틈에 끼어 살자면 함께 그같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처신이었던 것 같다. 권력의 잔치도 잔치다. 권력의 향연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식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자의 생각처럼 위험할 수가 있다. 권력의 향연 역시 취하기엔 매한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신선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白山
광복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정당이 명멸했을까. 한 조사에 의하면 자그마치 490여개나 된다. 이 가운데 역대 국회의원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200여개다. 지지난 14대 총선때만도 12개 정당이 난립했었다. 1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라도 낸 정당은 80여개에 불과하다. 민주공화당이 1963년 5월 10일부터 18년 5개월을 누려 최장수인 반면에 통일민주당은 1981년 3월 6일 등록 22일만에 소멸돼 최단명으로 꼽힌다. 이토록 많은 정당 가운데 정치사에 남을만한 정당은 겨우 열손가락을 넘을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정당사에 나타난 정당은 정강정책에 의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모임으로 보는 교과서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이 보스 인맥에 의한 편의적 정치집단의 붕당 성격이 짙다. 이 때문에 이 당을 만들었다가 저 당을 만드는등 당을 마치 무슨 헛간 짓듯이 부수고 만들기를 일삼는 정치지도자도 있다. 정치선진국은 당이 인물을 배출해낸데 비해 우리같은 정치후진국의 4류정치는 오너의 전유물시 되는 것이 당이다. 전통있는 양대 정당제가 확립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회의는 신당 명칭을 놓고 어지간히들 고민하는 것같다. 심지어 작명가에게까지 가서 물어봤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으로는 ‘참여민주당’ ‘21세기 신당’ ‘21세기 민주당’ ‘새천년 민주당’ ‘민주신당’등이 검토대상에 오르는듯 싶다. 그러나 확 띌만한 이름이 되지 못해 고민이라는 것이다. 신당의 이념과 비전을 담은 당명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념과 비전을 내세우는 신당 창당 명분이 어느땐 없었던가. 당명에 따라 당이 뜨고 말고 하는 것도 아니다./白山
프랑스 루이16세의 악명높은 사형기구로 길로틴이 있다. 이를 만든 사람이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길요땡으로 그 자신이 길로틴에 의해 처형됐다는 설이 있다. 루이16세는 그 역시 1793년 길로틴의 이슬로 사라짐으로써 부르봉왕조의 종말을 고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원주민들이 사용한 무기다. ‘ㄱ’자형으로 구부러진 70∼80㎝의 나무막대기이나 탄력이 강하다. 목표물을 향해 던지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되돌아와 던진 사람이 오히려 위험에 처한다. 이바람에 ‘부메랑효과’란 말이 생겼다. 선진국이 발전도상국에 경제원조나 투자를 한 것이 현지에서의 생산이 수요를 웃돌아 다시 선진국으로 역수출됨으로써 자국의 해당산업과 경합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권력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는 듯 싶다. 권불십년이란 옛말이 있긴 하지만 지금 세상은 10년도 못간다. 요즘의 검찰 돌아가는 형상이 참 이상하다. 최병모 특검수사가 옷로비의혹의 검찰수사를 뒤엎자 정일순씨가 최 특검을 상대로 고소한 사건을 제빠르게 다루는게 범상치 않는 대응같다. 서경원 전의원사건은 DJ의 1만달러수수, 불고지혐의가 관련됐던 10년전 일이다. DJ관련 혐의가 벗겨지면서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등 검찰수뇌부 소환설이 나돌고 있다. 검찰권행사가 당시의 검찰수뇌부에 부메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부당하게 휘둘러대면 권력으로 망하는 것이 길로틴이 보여준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의 권력층도 매한가지다. 권좌에서 물러난뒤에 권력의 부메랑을 되받지 않을 것인지 조신해야 하는 것이 현자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白山
어미가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아주 어린 사슴 한 마리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사슴은 목놓아 울어댔다. 그때 사슴 앞으로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자는 “ 내가 잡아 먹어야지”하고 사슴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사자 앞을 가로 막았다. “이 사슴은 내가 발견했으니 내 것이다!” 사자가 곰에게 타일렀다. “천만에! 내가 먼저 먹어야겠다”하고 곰은 사자가 잡아 먹으려던 사슴을 향해 달려 들었다. 사자와 곰은 서로 물어 뜯고 할퀴고 넘어 뜨리고 뒹굴며 싸움을 벌였다. 사자와 곰은 피투성이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린 사슴은 두려운 듯 벌벌 떨고 있었다. 이때 그들의 앞으로 여우 한마리가 다가와 기진맥진하여 헐떡거리고 있는 사자와 곰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예쁘고 맛있게 생긴 사슴을 두고서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이젠 제가 데려다가 먹어야겠습니다.” 이솝우화 가운데 하나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배가 부른데도 사슴을 잡아 먹으려는 사자같은 부류들이 많다. 또 느닷없이 나타나서 사슴을 가로채려는 곰같은 족속들도 많이 있다. 사자와 곰의 싸움을 숨어서 지켜 보다가 사슴을 유인하는 여우같은 동물들이 도처에서 기생하고 있다. 어린 사슴같은 사람들은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런데 사슴같은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없다. 금력 또한 없다. 있는 것은 양심 뿐이다. 성실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사자인가 곰인가 여우인가. 사슴이 길을 잃은 산속같은 이 세상이 언제쯤 밝아질 것인가. /淸河
영업용 택시를 타고 행사장에 가는 길이었다. 앞에서 자가용을 몰고 가던 사람이 차창 밖으로 담배를 훽 던져 버렸다.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가 차도에 떨어졌다. “저런, 죽일×” 택시운전사가 신음처럼 되뇌였다. 다른 길로 접어 들었을 때였다. 인도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청년이 담배꽁초를 거리에 버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청년이 서 있던 자리 옆에 휴지통이 설치돼 있었다. 휴지통 밑에는 다른 사람들이 버린 담배꽁초들이 휴지와 함께 흐트러져 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은 벌금을 한 10만원쯤 물렸으면 좋겠습니다.” 지지대子가 한마디 했다. “저런×들은 벌금 내라면 되레 죽이려고 대들 겁니다. 벌금이 아니라 담배 피우던 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휴지통이 앞에 있는데 왜 거리에 버립니까.” 아까 ‘죽일 ×’이라고 욕을 한 택시운전사는 ‘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고까지 과격하게 말했다. ‘대한민국은 법이 너무 물러 터졌다’는 탄식도 했다. 환경부가 내년 1월1일부터 쓰레기 무단투기자를 신고하면 과태료 부과금액의 80% 이내에서 포상금을 지급한다고 17일 밝혔다. 담배꽁초나 휴지를 버리는 사람을 신고할 경우는 4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최고 80만원까지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환경부의 쓰레기 무단투기 방지대책은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과태료 부과금액이 너무 적은 것이다. 담배꽁초 투기의 경우 적어도 1백만원쯤으로 정했다면 어떠했을까. 실직자가 많은 오늘날이다. 실직자들이 쓰레기 무단투기자 전문신고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쓰레기 줄어 들어 환경 좋아지고 실직자들에게 수입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淸河
전에도 맞벌이 부부가 많긴 많았다. 그러나 의미가 지금과는 달랐다. 전의 기준을 분명하게 언제라고 잡기는 좀 어려우나 대체로 IMF이전으로 보면 될것같다. 그리하여 전에는 맞벌이 부부의 한쪽 수입은 저축을 많이 했다. 남편 수입으로 생활을 하면 아내의 수입으로는 적금을 붓곤 했다. 지금은 그럴 형편이 못된다. 웬만한 수입의 부부 맞벌이로는 다 합쳐도 생계를 꾸려가기가 바빠 여간해서는 저축하기가 어렵다. 노동임금이 회복안된 탓도 있지만 그만큼 물가가 올라 지출요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고급노동 인력의 맞벌이 부부는 형편이 다를지 몰라도 단순노동의 서민층 맞벌이 부부 형편은 대개가 이러하다. 맞벌이 부부 뿐만이 아니고 자녀까지 돈을 번다고 벌어도 생계를 어렵사리 꾸려가는 가구가 적지 않다. 가령 공공요금 따위가 몇배 올라도 생계비지출의 비율이 코끼리 비스켓 까먹기처럼 아무 영향이 없는 권력자나 고소득자는 몰라도 단돈 천원 한장이 아쉬운 영세·서민들은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서민생계의 심각성을 높은 자리에 있는 권력층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느냐 하는데에 있다. 물론 말로는 안다하겠지만 실제로 체험하지 않는 민생고를 어찌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여연대’와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우리의 최저 생계선 이하 빈민이 1천만명이 넘는다는 수치를 놓고 정부가 여러가지로 반론에 나섰다. 정부측 반박은 ‘과대추산’이라는 것이 그 요지다. 들쭉날쭉하는 수치놀음이 본질적 핵심이 될 수는 없다. 복지국가에서 빈민의 기준은 무엇일까. 영세·서민층의 뼈저린 고통을 권력자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白山
인천시 중구 인현동 호프집 화재참사 희생에 포함된 학교가 과시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학생지도가 잘못된 점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화재로 희생된 15개 고등학교의 학생 대표들이 무슨 성명서 발표를 서두르는 것을 학교측이 만류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교내에서 자유로운 의견 토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연대해서 사회에 성명서를 내는 행위는 합당치 않다. 기성세대의 무책임을 지탄하려던 것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기 때문에 경찰에 이어 검찰의 다각적인 재수사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호프집 출입을 탓하기 전에 갈만한 공간마련을 못해준 것이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청소년을 위한 공간부족은 상대적 인식의 차이다. 갈곳이 마땅한 데가 없어 하필이면 술집에 갔다는 투의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미성년이라 해도 고등학생쯤 되면 그만한 판별능력의 지성은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그보다는 일시의 호기심에서 호프집에 들른 것이 어른들 잘못으로 집단 참사의 결과를 낸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술집에간 사실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같은 주점출입이 없을 것을 다짐하면서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할 줄 아는 용기다. 그러나 이도 성명서 형식으로는 걸맞지 않다. 기성세대의 그같은 사고에 대한 사회방어가 미흡했던게 큰 잘못인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로인해 고등학생들의 술집출입이 큰 목소리로 변하는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 사회가 이에대해 해야할 말을 못하는 것은 어른다운 자세가 아니다. 꾸짖을 일은 마땅히 꾸짖을 줄 알아야 한다. 지극히 불행한 사고이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가치관이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白山
‘인의구휼(仁義救恤)은 치자의 덕목이나 무위선심(無爲善心)은 치자의 허물’이라고 했다. 공(功)이 없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경계하는 고사로 한비자(韓非子) 난이편(難二篇)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얘기가 전한다. 환공이 술에 취하여 관을 잃은 적이 있다. 이를 심히 부끄럽게 여겨 나라의 창고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옥을 열어 죄인들을 방면하였다. 사흘이지나자 백성들 사이에서 “임금님이여, 어찌하여 다시 관을 잃어버리지 않나이까!”하는 노래가 떠돌았다. 후세에 한비자는 ‘공이 없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요행을 바라게 했으니 어찌 치욕이 아닐 수 있겠는가’라고 갈파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농업인의 날’에 “6조8천억원의 농가부채를 내년에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해결방안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예컨대 원금은 장기 분할상환하고 이자는 감면하는 것은 몰라도 부채자체를 탕감하는 것은 국민세부담을 안겨 형평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농가부채는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무위선심’이 돼서는 “어찌하여 다시 관을 잃어버리지 않나이까!”하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여 빚을 갚은 농업인도 있고 반대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개인적 사유도 여러가지인점이 고려돼야 한다. ‘무위선심’은 선심을 받는 사람들은 좋아할지 몰라도 그로인해 더 많은 민심을 잃는 수가 있다. 농업문제는 생산 및 유통구조의 혁신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백삼
일본의 친북지식인층에서 북한의 인권문제가 제기된 것은 무척 주목된다. 나카다이라(中平健吉)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난민구원기금’의 시민단체 각계 지식인 50여명은 ‘북한민중을 위한 인권선언’을 들고 나섰다. ‘북한민중이 직면한 기아와 인권유린의 참상은 더 좌시할 수 없는 단계’라며 ‘전체주의 의 폐해에 의한 이같은 참상의 개선을 위해 민주화와 인권존중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 ‘이를 방치하는 것은 양심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고 선언했다. 여기엔 전 각료, 기업인, 종교인, 교수등 많은 저명인사가 서명했다. 지난 10일 있었던 일로 국내 일부 언론에도 보도됐다. 북한의 ‘조선로동당규약’ 전문 가운데는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는 대목이 있다. ‘북한민중을 위한 인권선언’이 밝힌 전체주의 폐해란 헌법보다 상위개념에 올라있는 로동당규약의 ‘김일성사상’을 말한다. 일본지식인들의 이같은 선언을 보면서 국내 지식인들의 무력증후군을 통감한다. 북한 정권의 비위를 건드릴까봐 햇볕정책은 북한 인권문제엔 아예 입을 다물고 있다. 한심한 것은 어쩌다가 뜻있는 이들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낡은 메커니즘수법’이라며 역으로 매도하고 나서는 이른바 진보 지식인층의 오류다. 광복직후의 무법천지를 이룬 이데올로기 격동, 민족적 참화의 6·25한국전이 끝난지 아무리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해도 사실까지 왜곡하려드는 전후 일부 지식인들의 편견은 심히 위험하다. 북한의 인권문제에는 관대한 자칭 진보 지식인들일수록이 국가보안법을 두고 말하는 인권문제에는 논리의 비약을 일삼는다. /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