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열대와 한대의 중간지역이어서 세계적으로 드물게 많은 철새들이 머물거나 지나간다.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겨울철새는 오리류, 고니류, 두루미류 등 모두 116여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 겨울 철새들은 중국 동북지방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여름 동안 번식과 새끼 키우기를 마친 뒤, 혹한이 몰아 닥치는 겨울이면 생존을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내려온다. 그러나 봄이 되면 다시 번식지인 북쪽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철새들은 그 먼 거리를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방향을 잡아 날아간다고 한다. 낮에 주로 이동하는 철새들의 경우, 자신들의 생체 시계속에 내장돼 있는 정보로 빛의 방향을 판단하여 자신들이 날아갈 방향을 정한다는 것이다. 밤에 주로 이동하는 철새들은 별자리를 이용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또 철새들은 지구 자기장(磁氣場)을 감지하여 이동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대개 철새들의 장거리 이동은 남북 방향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철새들이 지구 자기(磁氣)를 감지하여 방향을 잡는다고 한다. 실제로 비둘기의 머리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1㎜×2㎜의 자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겨울철새들이 지금 한국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들의 서식지가 파괴·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겨울이면 찾아오던 유명한 낙동강 넓은 하구의 을숙도주변은 하구언댐과 빌딩, 도로 소음, 공해때문에 매년 철새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경남 창원 주남 저수지도 온갖 큰 공장들이 들어서 아주 찾아오지 않거나 과거에 비해 줄어 들었다. 4∼5년 전만 해도 주남 저수지에서만 장관을 이루던 가창오리 무리들도 충남 서산 천수만으로 옮기더니 그 곳에서도 살수 없는지 2∼3년전 부터는 전남 해남 황산면 바다갯벌을 막는 고천암 간척지 호수에 날아온다는 소식이다. 철새가 찾아오지 않는 환경은 인간도 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호수였던 시화호에 다시 청둥오리가 찾아온 일은 신기할 정도이다. 철원 평야에서 펼치는 두루미들의 군무도 장관이다. 그동안 환경·시민단체들이 기울여온 눈물겨운 노력의 대가이다. 4일 입춘이 지나면 철새들은 다시 북쪽으로 서서히 떠날 것이다. 겨울철새들이 다시 한국으로 날아오도록 환경보호와 습지생태계 보전에 주력해야 한다.

중학생의 ‘性’

우리나라 중학생의 성교육에 대한 개선책이 시급해졌다. 중학생의 성지식이 100점 만점 기준 46.6점으로 매우 낮을뿐 아니라 10명중 4명이 이성교제를 하며 성(性)을 ‘남녀간의 성적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 중학생의 경우 83.3%가 “성관계를 하더라도 꼭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응답하는 등 혼전 성관계에도 개방적인 인식을 갖고 있어 걱정스럽다.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경기대 교육대학원 김상원 교수 등에 의뢰, 최근 발표한 ‘중학생의 성의식 조사 및 성교육자료집 개발연구’결과를 보면 한마디로 의식은 개방적, 지식은 낙제점이다. 지난해 7∼12월 전국 중학교 1,2,3학년 학생 2천8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성과 교제중인 학생은 41.3%이며 가장 큰 고민이 이성교제, 성충동, 임신·인공유산, 성행위, 자위행위 순으로 나타난 것이다. 첫 성경험 시기는 중2때(32.9%)가 가장 많고 중1, 중3순이었으며 성관계시 76.8%가 피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학생의 0.8%가 임신 경험이 있고 임신했을 때는 인공유산과 출산 후 입양으로 나뉘었으며 성추행·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22.3%나 된다. 문제는 중학생들의 이성교제는 늘어나고 있으나 성지식은 평균 50점에도 못미친다는 점이다. 또 PC보급과 인터넷 음란물 등의 접촉으로 학년이 낮을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 성향이 높다는 것이다. 중학생이 고교생보다 오히려 부모에 더 저항적이라고 한다. 앞으로 중학생들의 성의식은 더 개방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는 인정하려 하지만 자기 자녀의 문제로는 받아 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도 성문제에 직접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정신적·현실적인 준비를 해야 된다. 성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자녀들의 실수를 막아주고 차선책으로 실수는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자세를 갖는 것이 이 시대 부모들이 할 일이다. 올바른 성가치관 교육을 위해 초·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당연히 성교육을 정규과목으로 삼아야 한다. /淸河

이수현씨의 죽음

우리에게 이수현씨(27)의 죽음은 무엇일까. ‘일본 열도를 울린 의인’이란 말을 듣는다. 고려대 무역학과를 휴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중이던 일본어학교 아카몬카이에서 학교장으로 지난 29일 영결식을 치렀다. 영결식장은 모리 일본총리등 각료를 비롯한 각계인사 1천여명이 조문하고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추모의 글이 2천100여건이나 올라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일본 언론은 이씨가 지난 26일 도쿄시내 전철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살려내고 자신은 숨진날부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던진 한국유학생의 죽음을 헛되이 말자’고 했다. ‘한·일 우호증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씨의 의로운 죽음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새롭게 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희생당한 이씨의 4대에 걸친 사연은 그의 죽음에 애도의 정을 더욱 절실하게 했다. 살신성인의 의로운 죽음은 우리 주변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다. 입장을 바꾸어 일본인 한국유학생이 서울시내 전철역에서 위험에 처한 한국인을 구하고 자신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이수현씨에 앞에 서울에서 먼저 일어났다면 우리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의인, 이씨에 대한 일본열도의 후한 조의는 어디까지나 인간정신의 발현이다. 일본 사회 역시 점차 삭막해지는 결핍된 인간정신을 한 이국인의 의로운 죽음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역땅에서 목숨을 던진 젊은 의인은 우리들에게 한국인의 긍지를 갖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하여 일본의 국익을 한국의 국익으로 양보하는 일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부산에 사는 이씨의 여자친구는 ‘수현아! 넌 지워지지 않아. 항상 널 위해 노래부를게. 천국에서 들으렴…’하고는 흐느꼈다고 전한다. 생떼같은 아들을 놓친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일본으로 달려간 이씨부모는 한줌 재로 변한 유해를 저미는 가슴에 품고 귀국했다. 다시 살아 돌아올수만 있다면 ‘한국인의 긍지’, ‘일본인의 후의’를 다 반납해도 좋다. 그래서 다시 살아날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인생사다. /白山

브레이즈델 목사

약 5년전인가. 그 무렵에 개봉된 ‘쉰들러’란 영화가 있었다. 제작사, 감독, 주연배우등 이름은 잊었지만 미국영화임은 분명하다. 쉰들러는 독일사람 이름이다. 2차대전이 한창인때 독일군을 상대로 군수품장사를 했다. 돈버는 일이라면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쉰들러가 인간애에 눈을 뜬 것은 유태인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나서였다. 죽음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벌거벗은 유태인들 가운데 남자는 멀리 성기까지 노출됐으나 혐오스럽기보단 처참한 장면이 리얼리티하게 연출된 명화였다. 쉰들러는 이토록 불행한 유태인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빼돌려 살려내기 위해 독일군 장성들에게 번 돈을 다 털어 뇌물로 바친다. 쉰들러는 실존 인물의 실화다. 50년전 한국전쟁판 쉰들러로 불리는 러셀 브레이즈델씨(91) 방한이 무척 감동적이다. 전쟁 당시 미공군중령으로 군목이던 그는 전쟁고아 1천여명을 미군 당국에서도 불가하다는 것을 끝내 설득시켜 제주도로 무사히 피란시킨 전쟁고아의 아버지다. 그제는 반세기만에 양주군 장흥면 한국보육원을 찾아 황온순원장(101세·여)을 비롯 30여명의 전쟁고아들과 뜻깊은 만남을 가진데 이어 어제는 고양시에서 역시 전쟁고아들과 해후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벌써 60대를 바라보는 전쟁고아 20여명과 일일이 손을 맞잡으며 재회의 감격을 나누고 스님이 된 황병진 장안사주지(고양시 일산구 풍동)는 큰 절을 올렸다고 본지기사는 전한다. 그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은 당시의 전국 전쟁고아들을 다 만날수 없겠지만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국에 꽃피운 인간애는 아마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미 아흔을 넘긴 브레이즈델 목사가 방한한 것은 생전에 전쟁고아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직접 보고 싶어서이겠지만 전쟁고아들 역시 다시 보고싶었던 여간 고마운 은인이 아닐수 없다. 아니 우리 모두의 은인이다. 전쟁은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인성을 잃게 해 자신만 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사악해지기 쉬운 것이 전쟁이다. 이런 가운데서 인간애를 살린 박애정신은 쉰들러 이상이다. 우리는 그의 방한으로 전쟁의 참화와 사람이 더불어사는 인간정신에 다시 한번 일깨움을 받는다. 브레이즈델 목사의 남은 여정이 아무쪼록 편안하고 귀국후에도 하느님 뜻을 이루는 여생이 되기를 빈다. /白山

개헌론

‘능서불택지필’(能書不擇紙筆)이라고 했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은 종이나 붓타박을 않는다는 뜻이다. 서양속담에도 ‘서투른 목수가 연장만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의 명필가로 저수량, 우세남, 구양순이 있었다. 어느날 저수량이 우세남을 찾아가 자신과 구양순을 비교해 물었다. 우세남은 “그대와 나는 붓과 종이를 가려서 글씨를 쓰지만 구양순은 붓과 종이를 가리지 않고 글씨를 쓰니 어찌 그와 비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우세남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고 저수량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개헌론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운다. 김중권민주당대표에 이어 한화갑최고위원이 대통령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4년 중임제도 해봤고 정부통령제도 이미 해봤다. 4년 중임은 촉박하게 겹치는 대통령선거가 미국 정치토양과 다름으로써 빚는 지나친 폐단으로 인해 1980년 10월 7차 개헌에 의해 5년 단임제가 됐다. 이승만, 박정희대통령의 3선 개헌 장기집권에 질려 단임제를 채택한 면도 없지 않다. 이 헌법에 의해 전두환정권의 5공이 생겼고 6공은 1987년 10월 직선제를 골자로 한 8차 개헌에 의해 노태우정권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른다. 부통령은 이시영 초대부통령이 ‘하는 일 없이 국록만 축낸다’는 뜻으로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자리’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진 사퇴했다. 이승만대통령시절엔 야당출신의 장면부통령이 고령의 이승만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 두려워 장부통령의 권총암살을 기도, 손바닥을 관통시키는 부상을 입혔다. 이밖에 4·19 의거후 제2공화국시절에는 참의원(상원), 민의원(하원)의 국회 양원제도 해보았다. 현행 5년 단임제, 부통령제 배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정치 제도라고는 물론 말할순 없다. 그러나 어떤 정치제도든 장·단점이란게 다 있다. 요체는 운용의 묘에 있다. 여권의 개헌론배경이 상대적 장기집권(5년 단임보단 8년 중임), 그리고 정부통령후보의 지역안배로 지역감정에 의한 득표공작에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맞다면 동기부터가 순수치 않다. 개선 명분으로 단임제가 조기 레임덕을 말하는 것은 한낱 구실에 불과하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글씨를 잘 쓰는 선비가 붓타박을 않는 것처럼 헌법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민생이 도탄인 지경에 개헌을 입에 담을 때가 아니다. 지필묵을 가리는 저수량처럼 자신을 모르는 위인들이다. /白山

자살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 다음으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자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도 최근 들어 세계 평균을 웃돌기 시작했으며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인 일본에서는 ‘자살’이라는 검색어로 무려 몇 만개의 웹사이트를 건져 올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촉탁살인에 까지 이르는 자살사이트들이 유행(?)하는 지경이 되었다. 쥐, 다람쥐, 토끼 등 설치류에 속하는 ‘레밍’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 중 유일하게 자살을 한다고 알려졌었다. 주로 북구에 서식하는 이 작은 동물들은 이른 봄 미처 얼음이 채 녹지도 않은 차디찬 강물에 엄청난 숫자가 함께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처럼 보였다.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광경을 먹이와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두가 살겠다고 발버둥치다보면 함께 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레밍들의 일부가 다른 동료들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환상적인 논리를 부여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레밍들은 그저 미끄러운 얼음판을 달리다 미처 멈추지 못해 익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뿐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어버이로부터 받은 자기 몸을 함부로 해 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기독교도 자살이란 살인과 마찬가지이며 영혼에 큰 벌이 내린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자살로 인생의 종말을 장식함으로써 오히려 유명해진 예술가들도 많다. 요즘에는 부정부패 관련 혐의를 받고 결백을 증명한다는 명분으로 자살한 사람들도 있다. 학교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가엾은 여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꾸어 쓴 돈 몇 만원을 값지 못해 괴로워 연탄불을 피워놓고 유서를 남긴 여공들도 있었다. 얼마 전엔 80대 노부부와 장애인이 생활고와 자신의 처지를 비관, 극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사실 자살충동을 한번도 안느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좋아 죽겠다, 슬퍼 죽겠다, 기분나빠 죽겠다는 등 사람들은 자살 가능성을 무심코 시사한다. 그러나 너무 행복해서 죽은 사람은 없다. 자살을 택한 사람은 아파서, 배고파서, 억울해서 죽은 것이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고생스럽고 천하게 살더라도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 ‘개똥 밭에 이슬 내릴 때가 있다’‘개똥 밭에 인물 난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고파서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언제쯤 오려는가. /淸河

불쌍한 아이들

예전에는 부부가 이혼할 때 자식만은 서로 자기가 키우겠다고 싸움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가 자식은 네가 키우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이혼도 하기 전에 ‘재혼이나 취업에 방해가 된다’고 미리 자식부터 보호시설에 맡기려고 하는 철부지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호시설에 맡겨진 지 3개월이 넘도록 부모의 연락이 없으면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보내진다. 이 아이들은 엄연히 친권자가 있기 때문에 입양도 할수 없다.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의 경우 최근 이곳에서 돌보고 있는 80여명도 대부분 부모가 ‘맡긴’ 아이들이다. “혼자 도저히 못기르겠다”“재혼한다”는 등 이유로 자식을 쉽게 포기하려는 부모들의 상담이 한달 평균 60여건씩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가 하면 학대받는 아이들도 많다. 지난해 11월말 생후 15개월된 딸이 “자는 도중 갑자기 숨졌다”는 아버지의 신고가 있었다. 단순변사로 처리하려던 경찰은 아이의 몸을 보고는 기가 막혔다. 앙증맞은 몸뚱아리가 피멍으로 뒤덮여 멀쩡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구타에 의한 간파열’이었다. 1년 전 실직 당하고 아내마저 가출한 뒤 혼자 아이를 키워오던 아버지의 화풀이성 상습폭행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라는 말이 무참해진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부부가 함께 노력해야지 주부는 왜 15개월된 딸을 놔두고 가출했는가. 이 역시 어머니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다섯살배기 아들을 폭행하며 거리로 내몰아 혹한 속에서 구걸행위를 강요해온 비정한 어머니도 있다. 7살배기 어떤 남자아이는 학대를 하도 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려 제 이름도 잊었다. 공포증은 상실되지 않았는 지 어른만 보면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벌벌 떨기만 한다. 신체적 성장도 더뎌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한다.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자란 어린이의 3분의 1은 정신지체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학대 받고 자란 어린이는 나중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학대의 경험을 ‘세습’한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어떻게 천벌을 받으려고 부모들이 어리디 어린 자기 아들 딸을 학대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거리를 걸으며 빨리 따라오지 않는다고, 또는 유원지에서 먹을 것 사달란다고 어린 아이를 때리는 잔인한 엄마들을 가끔 본다. 학대 받는 어린이들이 불쌍하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들이 원망스럽다. /淸河

오늘 오후부터 설맞이 대이동이 본격화한다.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 그제 오후부터 설귀성에 나선 이들도 많다. IMF사태에 버금가는 경기침체로 어느 때보다 썰렁한 설명절을 맞고 있다. 아니 IMF때보다 더 어려운 설을 맞는다는 이들이 적잖다. 하지만 세월이 어떻든 명절은 명절이다. 예년보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고향을 가든 비록 못가든간에 설명절의 감회가 없을수는 없다. 설은 조상들 생활이 우리 핏줄에 면면한 전래 최대 명절이다. 세수의 개념은 양력 정초가 일상화됐다 하나, 정서적 정초는 역시 음력설인 것이 민족의 고유 전통이다. 양력 정초를 지나면 더욱 춥지만 음력 정초를 쇠고나면 겨울이 풀리기 시작한다. 올 겨울은 특히 그러하여 20년만의 대설과 강추위로 한바탕 치도곤을 치르고나서 설을 맞는다. 소한 대한을 지나 입춘을 앞두고 있다. 올 설은 설을 고비로 춘색이 더욱 완연할 것 같다. 벌어먹기 어려운 민초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계절이 겨울이어서 가는 겨울 오는 봄은 반갑다.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크게 실망할 것은 없다. 올 가을 추석도 있고 또 내년 설도 있다. 살다보면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귀성길은 언제나 복잡하다. 어디를 어떻게 가든 어차피 차가 막힌다. 서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귀성길도 그렇고 귀경길도 여유있는 마음가짐으로 가족이 무사히 다녀오는 것이 곧 행복이다. 오랜만에 고향가서 재회하는 친·인척이나 친지들에게도 좋은 만남이 돼야 한다. 설명절에는 윗분, 친구 그리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덕담이 제격이다. 제 자랑이나 일삼고 남을 헐뜯는 쓸데없는 말로 모처럼의 만남에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무슨 일을 두고 의견이나 생각이 달라도 자기 고집만 부리는 것은 어리석다. 남의 말도 들을줄 알아야 한다. 인사를 해야 하는 예의가 있는 것처럼 인사를 받을줄 아는 예의가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할줄 알아야 한다. 좋은 설명절이 되는 것은 물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白山

방자한 일본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오만방자한 짓을 저질렀다. 2002년 월드컵대회 명칭을 제멋대로 변경,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한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FIFA Word Cup KOREA/JAPAN)’으로 정한 대회명칭을 ‘2002 FIFA 월드컵 일본·한국’으로 표기하겠다는 얄팍한 수단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월드컵 일본조직위의 엔도 사무총장이 한국측에 전화로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니 어이가 없다. 한국측을 무시하는 부도덕하고 몰상식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996년 2002년 월드컵 대회국이 한국·일본으로 확정됐을 때 국제축구연맹을 비롯해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와 일본월드컵조직위원회 등은 결승전을 일본에서 치르는 대신에 개막식은 한국에서 열고 공식명칭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하기로 분명히 합의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이를 어기고 입장권과 각종 홍보물에 자국 이름을 앞세워 ‘2002 FIFA 월드컵 일본·한국’으로 표기하겠다는 것은 FIFA와 양국 월드컵조직위가 함께 정한 규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처사인 동시에 한·일 공동개최의 기본정신도 크게 훼손하는 망상이다. 한국월드컵조직위 정몽준 공동위원장이 “만약 일본이 결승전을 양보하고 개막식과 대회명칭을 바꾸는 것을 제의한다면 이는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한 발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월드컵 대회의 공식명칭을 바꾸기 위해 결승전 개최지를 한국에 양보하겠다는 뜻을 먼저 밝힌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전화통보’한 일본측의 간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결승전보다는 개막식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승전은 기량의 성패를 보이는 경기이지만 개막식은 목적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에서 개막식을 먼저 하고 한국에서 결승전을 치른다 해도 효과는 개막식이 열린 나라가 훨씬 크다. 결승전이 어느 나라에서 열렸다는 데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가 우승, 월드컵을 차지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명칭이 변경돼서는 절대로 안된다. ‘2002 월드컵 한국조직위원회’를 공동위원장체제로 운영하고 있는 것도 재삼 못마땅하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측을 얕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淸河

막가는 장삿속

요즘,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소위 ‘행운의 부적’과 점 보는 카드의 일종인 ‘타롯카드’를 문구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어 걱정거리가 또 한가지 늘었다. 더구나 이러한 상품(?)에는 ‘애인얻는 부적’‘재물 생기는 부적’ 등 어린이들과 전혀 상관없는 문구가 표시돼 있어 오늘날 장삿속은 확실히 눈이 멀었다. 원래 부적(符籍)은 민속신앙과 같은 것으로 악귀를 쫓거나 부귀영광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주술적 도구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글씨로부터 알 수 없는 그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실로 다양하다. 부적의 기원은 인류가 바위나 동굴에 주술적인 그림을 그리던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암각화(岩刻畵)가 그런 주술적인 목적을 지닌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처용(處容)이 그의 아내를 범한 역귀를 노래와 춤으로 감복시킨 뒤 처용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벽에 붙인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을 시켰다는 설화는 당시의 주문(呪文)과 주부(呪符)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동학혁명 때에 궁을부(弓乙符)를 사루어 먹으면 총과 화살을 피할 수 있다고 하여 부적이 쓰였다고 전한다. 현재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부적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한자로 엮어진 것 가운데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고, 불사(佛寺)에서 나온 것 중에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부적을 황색 바탕에 붉은 색깔로 그린다는 것은 색채 상징에 비추어 그럴듯한 일이다. 황색은 광명이며 악귀들이 가장 싫어하는 빛을 뜻한다. 부적에 日·月·光자가 많은 것도 이에 비추어 이해할만 하다. 주색(朱色)은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서 특히 귀신을 내쫓는 힘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적색은 피·불 등과 대응하며 심리적으로 생명과 감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은 정화하는 힘을 지닌 것이고 보면 주색이 악귀를 내쫓는데 적절한 주력(呪力)의 색깔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방에서 주사(朱砂)를 약재의 하나로 쓰이는 까닭의 일부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다. 부적의 효험이 정말 있었다면 동학혁명군들이 죽었겠는가. 가난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겠는가. 동심을 현혹, 멍들게 하는 우표 크기만한 부적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으니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부모들이 정말 정신 차려야겠다. /淸河

이상한 정부

우리나라는 청소년 기준 연령도 제대로 못 정하는 딱한 국가다. 지난 해 2월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청소년보호연령을 ‘만 19세 미만’에서 ‘연 나이 19세 미만’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 (2001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숫자이다. 그러니까 생년월일이 1982년 7월1일인 사람은 2001년에 연 나이로 19세가 됐지만 만 나이로는 7월1일이 지나야만 19세가 되는 것이다. 청소년보호위 개정안대로 법이 바뀌면 1982년생 모두가 태어난 달에 관계없이 ‘19세’를 인정받아 성인이 된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각종 문화관련 법안의 개정을 준비하던 정부규제개혁위원회가 애매한 보도자료를 냈었다. 현행 영화진흥법, 공연법,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등 3개 문화관련법은 청소년보호법과 달리 ‘만 18세 미만’을 청소년으로 규정했다. 규제개혁위는 “문화관련법 연령규정을 청소년 보호법처럼 ‘19세’ 바꾸겠다”고 밝힌 것이다. 규제개혁위는 이 19세가 ‘만 19세’인지 ‘연 19세’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혼란은 올해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서 가중됐다. 규제개혁위가 당초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던 ‘19세’개념을 ‘연 나이 19세’로 바꾸어 제안하긴 했으나 국회 문광위 소위가 지난 5일 “대학 1학년생 중 연 19세가 안되는 사람도 많으므로 잘못하면 이들에게 문화 접촉의 기회를 박탈할 위험이 있다”며 정부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행 ‘만 18세’규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만 19세’를 기준으로 청소년음주를 단속하고, 청소년보호위는 ‘연 19세’로 보호법 개정을 마련했으며, 국회는 ‘영화나 음반에 대해선만은 ‘만 18세’가 청소년 기준’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며 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해 지정된 ‘성년의 날’은 그해에 만 20세가 되는 사람을 위한 행사이다. 국어사전에는 ‘성년’을 “신체나 지능이 완전히 발달되어 완전한 행위능력이 있다고 간주되는 나이·만 20세이상·성인(成人)”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야가 당리당략상 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여당이 규정하는 청소년 기준 연령 하나 통일안되는 판국이니 국론이 어떻게 일치되겠는가. 예산이 필요한 것도 아닌 청소년 연령 규정을 놓고 이렇게 각 부처의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게 한심스럽다. /淸河

야구 심판 얘기를 다시 해야겠다. 주심의 오심을 전제해두고 하는 경기가 야구다. 프로든 아마든 다 같다. 주심이 보는 스트라이크존은 심판마다 각기 다르다. 투수의 투구는 시속 120㎞ 이상이다. 이를 스트라이크나 볼로 보는 순간의 판단도 어렵지만 다이아몬드 표지판을 기준으로 판별하는 공간의 차이 또한 주심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높은 공, 또는 낮은 공을 좋아하는가 하면 안쪽, 바깥쪽을 보는 각도 역시 차이가 있다. 대개 야구공 반만의 차이는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니까 주심의 심판엔 야구공 반만한 오심은 있는 것으로 치고 경기를 치른다. 세상에 이처럼 불공정한 경기가 어디에 있겠나 싶지만 공정한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주심마다의 오심을 모든 선수들에게 차별없이 똑같이 적용하기 때문에 비록 오심이라도 경기는 공정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상대 선수에 따라 누구에겐 이렇게 또 누구에겐 저렇게 적용하거나 상대 팀에 따라 들쭉날쭉하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김동엽씨는 프로야구 청룡팀 감독시절 “야구는 이래서 신용을 담보로 한 가장 신사적인 운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구의 이런 오묘함은 사회의 일상생활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사회생활은 경우란 것이 있다. 경우의 가치기준을 상대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공평하다 할수 없다. 법과 원칙도 사람을 봐가며 적용을 달리해서는 역시 공평치 못하다. 비록 잘못된 법이나 잘못된 적용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공평하다. 그러나 좋은 법, 잘된 적용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서는 공평치 못하다. 법의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간다. 이는 법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법을 적용하는 이들의 잘못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제 좋을대로 법과 원칙을 갖다대는 신뢰의 상실이 법과 원칙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처럼 사회규범에 혼란이 오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 가치관의 혼돈 때문이다. 법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다. 법 운용을 자의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그 또한 자의적 운용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형명(법)의 적용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막힘이 없고 유연해야 한다’고 했다. 한비자의 말이다. /白山

두 故事

한비자 십과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무엇을 작은 충성이라 말하는가. 초나라 공왕과 진나라 여공이 연릉에서 싸웠다. 초군은 패색이 짙고 공왕은 눈을 다쳤다. 한창 싸울 때 초나라 장군 자반이 목이 말라 마실 것을 구했다. 심복 곡양이 술을 올렸다. ‘술은 치워라’하였으나 ‘술이 아닙니다’고 했다. 자반은 원래 술을 즐겼으므로 물이 아니고 술인줄 알게 됐으나 그만 입을 떼지 못하고 다 마셔 취하고 말았다. 전쟁은 초군의 대페로 끝났다. 공왕이 설욕차 다시 싸우려 했으나 속병을 핑게대고 나타나지 않는 자반의 군막을 직접 찾아보니 술냄새가 진동했다. (중략) 자반은 큰 죄로 다스러져 목을 베이었다. (중략) 그러고보니 곡양의 작은 충성이 자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큰 충성을 해치는 작은 충성의 폐악이 이러하다’ 사마천 사기열전 평원군편엔 또 이런 고사가 전한다. 조나라 공자 평원군은 어진 선비를 좋아하여 문객이 많았다. 한번은 그의 애첩이 집 2층에서 내려다보인 사가의 절뚝발이를 보고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다. 이튿날 절뚝발이가 평원군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첩이 나를 보고 웃은 것은 당신의 덕에 흠을 입힌 것입니다. 원컨대 조소한 분의 목을 주십시오.” 평원군은 “알았다”며 돌려 보내놓고 “저 사람이 한번 웃었다해서 애첩을 죽이라고 하니 정신이 있는 놈인가”하고 비웃었다. 얼마후 선비들이 거의 다 떠나버려 평원군은 비로소 애첩을 편애한 소치임을 알고 그녀를 죽이고 절뚝발이집까지 찾아가 정중히 사과했다. 그랬더니 선비들이 다시 모여들어 전보다 더한 총명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장군 자반의 얘기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충성의 자세, 평원군의 이야기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일깨우는 고사라 할 것이다. 또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살든간에 누구에게나 다 귀담아 들어둘만한 경종이 되기도 한다. 어제 열린 한빛은행 부정대출사건의 국회특별조사위원회 텔레비전 중계를 보면서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대출 외압여부의 증인으로 나온 박지원씨에 대한 진실규명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생사람 잡는 억울함인지, 외압의 실체인지 여부는 수년후에야 가려질 것 같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처신에 두 고사가 의미하는 바를 특히 새겨들을만 하다.

쓰레기 봉투값

일부 자치단체의 쓰레기 봉투값 인상이 시민단체와 마찰을 빚고 있다. 다툼의 쟁점은 쓰레기 봉투값으로 부담하는 쓰레기 수거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있는 것 같다. 쓰레기처리의 종량제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으로 보아 봉투값 현실화는 타당성이 있다. 종래 봉투값이 수거비의 30%밖에 안될땐 나머지 70%는 일반회계에서 충당했다. 이 경우, 일반회계는 시민의 세부담이므로 종량제는 사실상 30%밖에 실시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현실화 기준이 수거 인력 및 장비의 운영비를 넘어 처리비용등 모든 경비를 포함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이같은 광의의 쓰레기 봉투값 적용에 대해 환경부지침이 그렇게 돼 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정말 그런 지침이 있는지, 아니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만약에 그런 지침이 있었다해도 지역주민을 위해 적용을 배제해야 할 자치단체가 ‘얼씨구나’하는 생각으로 앞장서는 것은 유감이다. 쓰레기 매립이나 소각시설등은 도시기반 시설의 일종이다. 도시기반 시설은 자치단체의 의무에 속한다. 이런 도시기반 시설을 하라고 주민들이 세금을 내는터에 처리비용에 포함시켜 이중으로 받는 것은 부당하다. 예를들면 주민등록등·초본 발급수수료같은 것도 수익자부담이다. 이의 수수료 산정에 단순 산출기초를 넘어 행정장비로 당연히 갖춰야 하는 전산시스템 비용까지 분담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방재정확충방안의 하나로 수익자부담을 현실화하는 추세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화는 어디까지나 협의의 개념을 기준삼아야 하는 것이 또한 자치단체가 부하받고 있는 조장행정이다. 자치단체마다 쓰레기 봉투값이 들쭉날쭉하여 말이 많곤 하지만 차이가 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자치단체의 방침과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차이점이 있는 것이 관치단체의 천편일률적 행정과 다른 자치행정의 특징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자치단체는 이제 쓰레기 봉투값의 자체산정기준이 무엇인지를 주민들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게 됐다. 생활행정인 자치행정은 투명행정이다. 지역주민들이 잘 납득할 수 없는 쓰레기 봉투값 인상에 수거마저 불편이 많은 청소행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白山

눈(雪)

속담에 “함박눈이 내리면 따뜻하고 가루눈이 내리면 추워질 징조”라는 말이 있다. 이는 눈의 상태를 보고 날씨를 예상하는 것으로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함박눈은 온도가 비교적 높은 온대지방에서나 상층의 온도가 그다지 낮지 않은 곳에서 내리는 습기가 많은 반면에, 가루눈은 기온이 낮은 한대지방이나 상층으로부터 지표면 부근까지의 기온이 매우 낮은 곳에서 눈의 결정이 서로 부딪쳐도 달라붙지 않고 그대로 내리기 때문에 형성되는 건성(乾性)의 눈이다. 이처럼 눈은 상층대기의 온도분포에 따라 그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도가 낮을 때는 가루눈이 내리고 온도가 높을 때는 함박눈이 내리게 된다. 따라서 떡가루와 같이 고운 싸락눈이 내리면 상층으로부터 한기가 가라앉기 때문에 추워질 징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은 녹아서 수분을 공급하는 이로운 점도 있으나 여러가지 피해를 주기도 한다. “납설(臘雪)은 보리를 잘 익게 하고 춘설(春雪)은 보리를 죽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납설, 즉 음력 12월의 눈은 한겨울에 내리는 눈이므로 추위로부터 보리를 보호하여 주는데 반하여, 춘설은 기온이 높아지는 봄에 내리는 눈이기 때문에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에 동해(凍害)를 주어 죽게 한다는 뜻이다. 요 며칠 사이에 전국적으로 납설이 내려 교통대란은 있었지만, 그건 정부의 무능한 교통대책 탓이고 산천에 쌓인 백설은 고맙기까지 하다. 납설이 내리면 더러워진 수분이 맑아지고 풍년까지 든다고하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가.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췬 양 흰눈이 나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追悔)이리 기쁘게 설레이느뇨.//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산천초목에, 메마른 도시에도 쌓인 백설을 보면 잠시나마 세상사 시름을 잊게 하는 김광균(金光均)의 詩 ‘설야(雪夜)’가 생각난다. /淸河

무다언(毋多言)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은 정치가들만이 아니다. 공직자들도 거짓말을 곧잘 한다. 고위층일수록 더욱 심하다. 거짓말을 한번도 안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거짓말과 공약을 밥먹 듯 한다. 그래도 이제 만성이 되었는지 그저 또 속았구나하면 어느정도 분통이 가라 앉는다. 그런데 공직자의 경우는 좀 다르다. 공직자의 거짓말이나 헛소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정책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금융권 구조조정을 하면서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에 대한 감자(減資)조치가 결정되자, 지난 1998년 “감자는 없을 것”이라던 재정경제부장관의 약속을 믿고 투자했던 국민은 그야말로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이근영(李瑾榮) 금감위 위원장은 지난 9월 현대건설 사태 때 “4대 그룹 계열사도 출자전환 대상에 포함된다”고 밝혔으나 이튿날 진념(陣稔) 재경부장관이 “4대 그룹 계열사에 대한 은행의 출자전환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정반대로 발언했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제대로 한다고 했다. 거짓말도 앞뒤가 맞아야 속아 넘어가는데 도대체 철없는 아이들의 말씨름 같아 한심하다. 국민의 정부 집권이후 수많은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없자 예전에는 별생각없이 정부정책을 따르던 국민이 이제는 정부를 믿지 못하는 딱한 형편이 되었다. 농민들이 “정부에서 권장한 농작물과 반대되는 것을 심어야 이익이 된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공직자의 몸가짐 가운데 말조심에 대한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공직자가 한마디 말 때문에 ‘설화’사건에 연루돼 불명예 사퇴하거나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야기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찍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 공직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과 품행을 ‘무다언(毋多言)’이라고 적었다. 공직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목민심서 제5편에 “어중지도(馭衆之道)는 위신이이(威信而已)”라는 구절이 있다. 대중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믿음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공무원들은 그러하지가 못해 아닌게 아니라 큰일이다. /淸河

大雪

20년만에 대설이 내려 겨울 가뭄이 해갈됐다. 눈(雪)은 우리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강설량 측정은 길이의 단위인 자(尺)를 사용했으며 눈(雪)·대설(大雪)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특히 눈이 없었던 겨울의 무설(無雪)의 기록이 13회나 되며, 철에 맞지 않는 눈·대설의 기록도 있다. 철이 이른 가을철의 눈과 대설에 대한 기록은 3회, 철이 늦은 봄철의 눈·대설은 7회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초여름의 눈이나 여름철의 눈은 이변(異變)으로 볼수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라 벌휴이사금 9년(192년) 음력 4월 초여름 경도(京都)에 석자의 눈이 내렸고, 신문왕 3년(683년) 음력 4월 여름에 한자의 눈이 내렸으며, 신라 헌덕왕 7년(815년) 음력 5월 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대설, 폭설에 관한 기록 중에는 ▲조선조 태종 9년(1409년) 4월21일 “영흥부(永興府)에 석자나 되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가 눌려 꺾어졌다.” ▲세종 3년(1422년) 2월6일 “제주에는 기르는 말이 1만마리가 넘는다. 이전까지 이 섬은 따뜻한 곳이어서 겨울에 적설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은 추위가 매우 심하고 눈이 5∼6자나 쌓여 많은 말이 얼어 죽었다.” ▲단종 1년(1453년) 1월29일 “큰눈이 내려서 3∼4자나 쌓이는 까닭에 새나 짐승들이 굶주려서 집 안으로 들어 왔다.” ▲중종 20년(1526년) 1월24일 “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 등지에 12월3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큰 눈이 내려 평지의 눈 깊이는 4∼5자에 달하였고 밤중에는 광풍이 불어 해수가 밀려와 바닷가의 인가가 물에 잠겨 집을 비우고 도망가거나 눈속에 빠져 동사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1924년 만석꾼의 사재를 투자하여 ‘조선문단’이라는 순문예지를 창간, 이광수(李光洙)로 하여금 주재케하여 한국신문학 발전과 민족주의 옹호에 힘쓰며 ‘인생극장’‘마도의 향불’ 등 많은 명작을 발표했으면서도 말년에 대중작가라고 하여 문단에서 외면당한 방인근(方仁根·1899∼1975) 선생이 생전에 서울 근처 송추의 회음자리에서 “지금 계룡산에 대설이 내리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가야겠다”고 한 옛일이 생각난다. 동석했던 지지대子는 그때 취중언행으로 생각했었는데 여름에도 눈이 내린 것은 문인의 마음속에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옛날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대설이 내렸다니 자연의 조화는 경외스럽다. /淸河

강창희

▲강창희(姜昌熙) ▲1946년 대전출생 ▲대전고졸업 ▲육사25기 ▲육군대학 교수 ▲중령예편 ▲민정당 발기인 ▲총리 비서실장 ▲11·12·14·15·16대 국회의원 ▲자민련 부총재 ▲저서 ‘한반도의 국제환경’ 등.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환상의 섬 소인국에 가면 정상인이 비정상인이 된다. 그리스의 신화 가운데 이런게 있다. 눈이 하나만 있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간 두 눈의 사람은 비정상인 취급을 당한다. 강창희의원이 마침내 자민련에서 왕따를 당했다. 엊그제 당기위원회에서 제명이 의결됐다. 의정사상 초유의 의원빌려주기로 민주당에서 배기선(부천 원미을) 송석찬(대전 유성) 송영진의원(충남 당진) 등 세 의원의 자민련 입양에도 불구하고 강의원의 반대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못한 앙갚음이다. 강의원은 “방법이 틀렸다. 내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나서라도 국회법개정의 정도를 찾겠다”고 말했으나 틈을 주지 않고 제명했다. 자민련은 “당을 괴뢰정당이라며 교섭단체 등록에 서명을 거부한 것은 해당행위”라고 제명 이유를 밝혔다.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의원빌려주기가 떳떳한 방법이 아님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입양의원은 자민련의 당원이기보단 수가 틀리면 어느때든 친정으로 되돌아가 교섭단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민주당의 감시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취약점을 안고 있는 김종필 명예총재가 DJP공조 복원에도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의원을 빌리지 않은 것보다 못한 허세에 불과하다. 의원임대에 감격하는 것이 당을 위한 것이고 정공법 주장은 과연 해당 행위가 되는 것인지 남의 일이지만 정말 헷갈린다. 교섭단체 등록 문턱에서 막상 1명이 모자라 애간장을 태우는 자민련은 그렇다해서 더 빌릴수도 없고 외부영입도 여의치 않아 김 명예총재의 엄명으로 마지막 압박용 카드를 선택한 것이 제명이다. 당기위원회의 제명결의는 이한동총재의 결재가 나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강의원은 아직까진 당원이다. 총재결재는 강의원과 김 명예총재의 면담결과에 따라 향배가 정해질 것이다. 마지막 면담에서도 소신을 끝내 굽히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굴복할 것인지가 매우 주목된다. 고군분투에 대한 평가는 그때까지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강창희, 그는 누구일는지? 소인국이나 애꾸눈이 판도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궁금하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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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의 분녀(태현실)가 양반집 저능아 도령 영구(장욱제)와 혼인한다. 영구는 “아부지(아버지)야, 제기차자…” 할만큼 지능이 낮다. 분녀는 짖궂은 시어머니(박주아), 시누이(권미혜) 등쌀에 고된 시집살이를 한다. 분녀를 사모하는 동네건달 달중(김무영)의 추근댐, 흉계는 그녀를 가끔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신랑을 감싸며 항상 최선을 다하는 인내와 슬기를 잃지 않은 가운데 8·15 해방과 6·25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몰락한 시댁을 분녀 혼자의 힘으로 꾸려간다. 마침내 재산을 모아 병든 시부모에겐 효부로서, “색시야, 색시야!”하는 남편에게는 내·외조를 다한 아내로서의 부덕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1972년 4월 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KTV가 방영한 드라마 ‘여로’의 줄거리가 이렇다. 이미 작고한 이남섭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무렵, ‘여로’가 방영되던 오후 7시부터 7시 40분까지는 택시탈 손님이 없다시피 거리가 한산했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청률이 90%를 돌파했었다. 주연을 맡은 영구역의 장욱제씨는 바보역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 연기생활을 더 못하고 제주도 허니문하우스의 사장으로 전업했다. 벌써 29년이 지났다. 드라마 ‘여로’가 극단 세령에 의해 악극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수원공연은 2월 중순쯤인 것 같다. 그때 그 연기진들이 대부분 다시 무대에 서지만 고인이 된 달중역의 김무영씨는 손호균이 맡는다. 분녀역에 원래의 태현실과 함께 귀순배우 김혜영이 더블캐스팅된 것은 태현실의 나이때문인 듯 싶다. 시어머니역의 독신녀 박주아는 당초 20대 후반에 역할을 맡았으므로 그간의 경력에 겹친 지금의 나이가 아주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장욱제가 신랑역을 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고 연극이기 때문에 하긴 하지만 아무리 분장해도 조명에 세심한 신경이 쓰일 것이다. ‘여로’는 작품 자체가 신파조여서 신파극의 모태인 악극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신파조이긴 하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쉬는 현대극이나 다름이 없다. 궁금한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분녀를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로’의 악극공연은 이 점에서 관객의 반응이 무척 주목된다. /白山

여로

가난한 집안의 분녀(태현실)가 양반집 저능아 도령 영구(장욱제)와 혼인한다. 영구는 “아부지(아버지)야, 제기차자…” 할만큼 지능이 낮다. 분녀는 짖궂은 시어머니(박주아), 시누이(권미혜) 등쌀에 고된 시집살이를 한다. 분녀를 사모하는 동네건달 달중(김무영)의 추근댐, 흉계는 그녀를 가끔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게 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신랑을 감싸며 항상 최선을 다하는 인내와 슬기를 잃지 않은 가운데 8·15 해방과 6·25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몰락한 시댁을 분녀 혼자의 힘으로 꾸려간다. 마침내 재산을 모아 병든 시부모에겐 효부로서, “색시야, 색시야!”하는 남편에게는 내·외조를 다한 아내로서의 부덕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1972년 4월 3일부터 그해 12월 29일까지 KTV가 방영한 드라마 ‘여로’의 줄거리가 이렇다. 이미 작고한 이남섭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그 무렵, ‘여로’가 방영되던 오후 7시부터 7시 40분까지는 택시탈 손님이 없다시피 거리가 한산했을 만큼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청률이 90%를 돌파했었다. 주연을 맡은 영구역의 장욱제씨는 바보역 인상이 너무 깊게 남아 연기생활을 더 못하고 제주도 허니문하우스의 사장으로 전업했다. 벌써 29년이 지났다. 드라마 ‘여로’가 극단 세령에 의해 악극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수원공연은 2월 중순쯤인 것 같다. 그때 그 연기진들이 대부분 다시 무대에 서지만 고인이 된 달중역의 김무영씨는 손호균이 맡는다. 분녀역에 원래의 태현실과 함께 귀순배우 김혜영이 더블캐스팅된 것은 태현실의 나이때문인 듯 싶다. 시어머니역의 독신녀 박주아는 당초 20대 후반에 역할을 맡았으므로 그간의 경력에 겹친 지금의 나이가 아주 제격일 것이다. 그러나 50대 후반의 장욱제가 신랑역을 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고 연극이기 때문에 하긴 하지만 아무리 분장해도 조명에 세심한 신경이 쓰일 것이다. ‘여로’는 작품 자체가 신파조여서 신파극의 모태인 악극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주 안성맞춤이다. 올드팬들에게는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신파조이긴 하나 휴머니티가 살아 숨쉬는 현대극이나 다름이 없다. 궁금한 것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분녀를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로’의 악극공연은 이 점에서 관객의 반응이 무척 주목된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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