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안산 관산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2005년 봄. 제자 성희가 남편될 사람과 주말에 찾아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전화로 주례를 서 달라며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했는데, 이러저러한 핑계로 거절했다. 이번엔 직접 찾아온다니, 제자의 방문에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내가 승낙을 못하는 이유는 이랬다. 뚜렷한 직함 하나 없는 서른아홉의 초등학교 평교사가 주례 서는 걸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또 신랑 나이가 서른셋이니 나와 여섯 살 차이 밖에 나질 않는데, 동년배가 주례를 서는 법도 있나? 신랑 신부 측 어르신들이 아직 인생사를 배워야 할 나이에 주례를 서는 젊은이를 건방지게 생각할 수도. 무엇보다도 난생 처음 많은 하객들 앞에서 주례를 설 용기가 없었다. 제자는 남편 될 사람과 마다하는 나를 주저앉히고 큰절을 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기도 하고, 설득도 하고, 존경받는 지인을 주례사로 소개하겠단 말도, 모두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오히려 애원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지 제자는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을 거에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주례 서주시는 게 그렇게 힘드세요. 저희 선생님이 주례 안 서 주시면 결혼 안 할 거예요. 나이나 직함이 무슨 문제예요. 선생님이면 돼요. 제자의 눈물을 보자, 까짓것 해보지 뭐!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덜컥 허락을 하고 말았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가 식을 올린 예식장을 찾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결혼식에 네 차례나 하객으로 참석해 주례사의 예식 집전도 꼼꼼하게 살폈다. 주례 집전 순서를 머릿속에 넣는 것도 일이었다. 멋진 주례사를 쓰고 싶은 욕심에 인터넷 검색을 하고, 주례사에 관계된 책을 사서 읽은 뒤에야 주례사를 쓸 수 있었다. 수십 번 읽어서 외웠다. 실전연습으로 우리 반 아이들과 결혼식 연극 놀이를 했다. 아이들의 역할을 정했다. 신랑, 신부, 신랑 부모님, 신부 부모님, 사회자, 하객 등. 주례는 당연히 나다. 연극은 회를 거듭할수록 진짜 결혼식처럼 짜임새가 있었다. 하도 많이 했더니 아이들도 자기들 결혼할 때 하나도 어렵지 않겠다고 했다. 2005년 4월 24일 일요일 12시 30분. 제자 결혼식 당일 아침, 나이 들어 보이게 몸치장을 했다. 주례 설 때 입으려고 사둔 양복을 입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장년에나 어울릴 디자인과 색깔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인다. 동네 단골 미용실을 찾았다. 최대한 나이 들어 보이게 머리 손질을 하라고 부탁했다. 앞머리에 약간의 흰색 염색을 하고, 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2대 8 가르마를 탔더니, 아주 쪼끔 더 나이 들어 보인다. 드디어 제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혼인서약을 읽고, 성혼선언을 하고, 좌중을 여유 있게 둘러보며 주례사를 줄줄 외워 나갔다. 젊은 초보 주례사의 당찬 목소리가 식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후 2006년 봄. 제자 부부가 돌쟁이 아기를 안고 셋이 되어 찾아 왔다. 2012년 봄. 제자 부부는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와 함께 다시 나를 찾았다. 김용우 남양주 월문초 교감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많이 다닌 내게 학교라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기억하기엔 퍼즐 수가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내 나름 학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내음 같은 것으로 어릴 적 학교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오래된 마룻바닥 냄새,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냄새, 축구를 하고 왔다며 짝이 내는 땀내, 뛴 걸음에 이는 텁텁한 먼지 내음 같은. 교실의 주인을 두고 학생이다, 교사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얹혀 있는 손님일 뿐이다. 이곳에 남아 우리들의 내음을 켜켜이 쌓아가는 이름 모를 유령이 이곳의 주인이 아닐까. 아이들을 보내고 볕이 길게 들어오는 오후가 되면 반짝거리는 냄새들을 볼 수가 있다. 아직 교사라 행복한 마음이 더 많다. 유중휘 평택 비전초 교사
시큰하게 울리는 코끝을 보니 다시금 꽃 피는 계절에 와있고 내 젊음의 페이지들 사진을 넘겨본다 이제는 이름도 가물거리는 친구들 나는야 커서 꼭 선생님이 될거야라던 그 아이 나는 꼭 좋은 엄마가 될거야라던 그 아이 추억(追憶)속 빛 바랜 사진 한 장 그 시절, 꿈 많던 소년들에서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닌 현재의 내 모습을 투영(投影)해보고 있다 나보다 더 훌쩍 키가 커 버린 지금의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라 너가 지금 힘차게 외치고, 바삐 걷고 있는 청춘가(靑春歌), 청춘초원(靑春椒園)이 언젠가 기쁨과 환희(幻)의 눈물이 가득찬 네 장년(長年)의 안락처가 될 거라고 백정훈 남양주 진접고 교사 *꽃들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계절 5월, 청춘시절의 소중함과 그 의미에 대해 먼저 걸어온 선생님들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 길을 현재 걷고 있는, 걸어올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응원 내용의 시입니다.
벌써 40여 년 전에 교정에서 보았던 그 나무, 모과나무입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저는 선생님을 기억하며 모과꽃을 담아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철 모르는 사춘기의 여중생이었고 선생님은 가정교과를 가르치시는 교과선생님이셨습니다. 늘 온화한 미소와 한 쪽 다리의 불편함으로 절뚝이며 교정을 오가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분홍빛 모과 꽃잎에 아른거립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소풍을 끝내고 저 세상에 계시지만, 5월이면 떠오르는 선생님, 보고픈 선생님이십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면 못생긴 모과는 꽃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늘 약자의 입장에서 일상의 훈훈함을 정겨운 톤으로 말씀해주시는 그 모습, 교직에 있는 동안에도 기억하겠습니다. 실천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저 하늘에서 빛나는 5월을 누리시기를. 염미영 화성 남양중 교사
한국관광고등학교의 2학년 학생들이 지난 4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전주와 남해로 떠난 비전투어에서 추억을 만들었다. 비전투어는 한국관광고등학교에서 매년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국의 관광지 중 한 곳을 선택해 그 지역의 문화와 관광지에 대해 배우고, 학생들이 다양한 체험을 하며 관광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수학여행이다. 비전투어는 전주와 남해로 각각 한옥마을, 순천만 국가정원, 남해 사천바다케이블카, 원예예술촌, 상상 양떼목장 등을 방문하며 학생들이 추억을 쌓았다. 특히 각각의 관광지를 돌아보며 직접 관광지를 홍보하는 영상물을 제작해 더욱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옥마을에서는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들로 많은 추억을 쌓았고, 상상 양떼목장에서는 직접 양들에게 먹이를 주며 동물들과 교감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관광고등학교는 매년 비전투어 뿐만 아니라, 1학년은 미션투어로 각 과(관광영어통역과, 관광일본어통역과, 관광중국어통역과) 해당 언어에 따라 그 국가로 관광을 떠나고, 3학년 미션 투어로 직접 일정을 짜 국내 관광지를 여행하고 온다. 최서연기자(평택 한국관광고 2)
지난 4월 24일 아침, 상현중학교의 정문에서는 상현중학교 학부모회 어머님들의 활기찬 등교맞이 행사가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상현중학교 학부모회 어머님들은 상현중학교 학생들의 등교를 맞이 해 주시기 위해 여러가지 캐릭터 인형탈을 착용하고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며, 학생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었다. 학부모회 어머니분들께서는 학생 한명 한명과 진심으로 인사하며, 하이파이브와 춤도 춰 주시면서 학생들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색다른 이번 등교맞이 행사를 통해 학생들은 어머니분들께서 아침부터 반갑게 맞아주시니 기분이 상쾌했다, 인형 탈까지 쓰시고 우리를 반겨주셔서 학부모회 어머니분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사탕과 함께 즐거운 등교맞이였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상현중학교에서는 학부모회의 등교맞이뿐 아니라, 동아리별 등교맞이, 학급별 등교맞이, 여러가지 주간별 등교맞이 등 매주 수요일 마다 진행돼 학생들의 아침을 맞이해 주고 있다. 강순영기자(용인 상현중 2)
안양여고 1학년 주제별 체험활동이 지난 4월 9일~10일 화성시에 위치한 하내테마파크에서 진행됐다. 4월 9일 오전 9시까지 학교에 모인 1학년 학생들은 각자 반에서 번호로 조를 나눠 다른 반과 함께 버스를 탔다. 하내테마파크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생활 안내 및 안전 교육을 지도받고 입교식까지 완료하며 마지막으로 숙소를 배정받았다. 숙소를 배정받고 각자의 짐을 풀기 전에 간단한 점심 식사를 가지기도 했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는 숙소에 들어가 짧은 자유시간을 가진 후 각자 신청한 강좌를 들었다. 도자기 만들기, 비누 만들기, 서바이벌 게임 등 다양한 체험을 통해 학기 초의 서먹함을 없애는 시간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가 선택한 체험을 다 마친 후에는 반끼리 모여 협동 게임을 함으로써 단합심을 키워나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는 학생들의 기대가 가장 많았던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다. 최신곡으로 춤을 추고 팝송을 부르는 등 자신들의 끼를 보여 주었다. 학생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특별 노래 시간도 있어서 열띤 환호를 받았다. 전다윤기자(안양 안양여고 1)
고양예술고등학교 미술과는 4월 2일부터 7일까지 전시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서양화, 동양화, 조소,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솜씨를 뽐냈다. 몇 달간 끊임없는 노력을 더해 최종적인 작품을 완성해 낸 학생들은 전시회가 진행되는 중에도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말했다. 학생들의 그림은 단순히 보기에 멋있는 그림이 아닌, 보면 볼수록 숨겨진 의미가 드러나는 하나의 훌륭한 예술이었다.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1년 동안 기다려온 작품 전시회였던 만큼, 전시회는 모자랄 것 없이 훌륭하게 채워져 있었다. 올해 미술 전시회가 조금 더 특별했던 까닭은 다채로운 분야의 작품들을 담았다는 점에 있다. 특히 디자인 아트, 설치 미술 등 새로운 미술의 형태가 눈에 띄었는데, 이는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찬사를 받을 만큼 훌륭한 시도였다. 이처럼 용기를 내어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 고양예고 미술과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혜린기자(고양 고양예고 2)
6년 전 출산 및 육아휴직으로 인해 학교를 떠나 있던 적이 있다. 어느덧 주변에서 나를 향한 호칭은 선생님이 아닌 애기엄마가 되어 있었다. 생애 처음 듣는 이름이 조금은 어색하였고, 조금은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듣지 못하는 게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관리비 청구서 정도만 꽂혀 있곤 하던 우편함에 우표도 없는 편지와 초콜릿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으로 진로를 선택했던 남자 아이가 꾹꾹 눌러쓴 글은, 처음이었어요. 교과서에 낙서를 할 때면 늘 혼나기만 했었는데, 낙서라해서 미안하다고 말한 선생님이....라고 시작하고 있었다. 함께 한 고등학교 2학년, 1년간의 고마움과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천천히 읽으며,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다들 문제집 풀던 아침자습 시간에 선생님 눈치 보며 연습장에 그림 그리던 그 녀석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어서 그냥 허락을 했던 것뿐인데, 그걸 고마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발령받은 지 겨우 2년차에 의욕만 넘쳤지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는, 아니 헤아려야 하는 지도 몰랐던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런 새내기 교사가 우연히 잘한 걸 칭찬해주는 학생이라니. 올해 초, 청년이 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복직하고 내내 나에게 어떤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침이 되는 그 편지를 남겨놓고서는 그런 자기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을 꺼내고 있다. 이번에는 그 친구의 편지가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나누는 대화를 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질문에 답을 제대로 못해 즉흥적으로 지어냈는데 창의적인 답변이라고 존중해주셨던 국어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못한 게 떠오른다. 그 선생님 덕택에 지금 나 역시 이렇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용기 내어 한번 감사드려야겠다. 김혜빈 시흥 장곡중 교사
어린시절 모범생이었던 사람은 절대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엉뚱하고 잘못된 행동을 선생님으로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어렸던 시절, 나의 어머니께서는 장난기가 너무 심한 딸을 두고, 너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그때를 떠올릴 때면 내가 절대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질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나는 교실에서 굉장히 많이 떠드는 학생이었다. 하루를 마칠 때면 어김없이 칠판에는 떠든 학생으로 이름이 적혀 있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유치한 행동을 많이 했던 말썽꾸러기였지만, 결코 나쁜 학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누군가 내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바라는,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약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교사로서, 학생들이 큰 소리로 떠들고 돌발행동을 할 때면, 아이들의 약한 마음을 감싸주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어린시절 친구들과 주먹다짐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쟁이였다. 친구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면 종종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싸우곤 했다. 당시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친구를 울게 하면 나의 의견이 옳은 것이 되고,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후회가 남지만,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나와 같은 학생들을 볼 때면 나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격려해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말썽쟁이였던 데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나는 숙제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나의 숙제습관을 고쳐주시려고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내가 숙제를 가지고 집에 올 때마다 5분만 더 있다가요라고 미루기 일쑤였고, 아주 간단한 숙제라도 이를 완성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또한 글씨 또한 엉망이라 알아보기 힘들었다. 왜 나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그 당시 매일 너무나 많은 숙제가 있었으며, 대부분 굉장히 지루한 숙제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숙제보다 재미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다. 이제 나는 교사로서 그때를 떠올리며 불필요한 숙제는 내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일 숙제를 내어주어야 할 때는 최대한 그 양이 적게 그리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내주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어린시절 선생님이 너 때문에 학교 오기가 싫어!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말썽쟁이였다.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수많은 과거의 조각들로 이뤄진다는 말처럼 비록 나의 선생님에게는 말썽쟁이였지만, 그때 내가 말썽쟁이였기에 교사로서 더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다독거려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오늘도 그 말썽쟁이는 선생님으로 산다. 멋진 선생님이 되기를 꿈꾸며! 김효진 화성 화산초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