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날아봐야 글라이더의 마음 알죠”

“하늘을 나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사업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공부하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마도 성공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해 동경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창공은 인류에게 있어 신비로운 공간이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패러글라이딩 제조업체 ㈜진글라이더는 비행에 대한 인류의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기업이다. “하늘을 나는 것이 그냥 좋았다”는 송진석 대표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비행에 대한 열정이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 냈다. ◇취미가 직업으로= 대학교에 다니던 송 대표는 어느날 신문 한구석에 난 행글라이더 비행 기사를 보고 마음이 이끌렸다. 당시 이름도 모르는 형제가 한강에서 행글라이더를 탔다는 것만 보고 무조건 찾아가 비행법을 배우기를 청했다. 이렇게 송 대표는 비행과 인연을 맺었다. 중간중간 얼굴 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해보고 싶은 마음만은 변하지 않아 10여년 후 결국 송 대표는 잘 다니던 현대그룹을 그만두고 무작정 유럽으로 떠났다. 패러글라이딩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일 세계선수권대회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나니까 사표도 미련없이 낼 수 있었다. 우선은 사업보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국내에 보급해 보자는 취지가 앞섰다. 말그대로 취미로 시작해 전문 기업인이 된 송 대표는 “그때는 어떤 목적의식 보다는 비행하는 것이 단지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국내유일의 기업= 패러글라이딩 시장은 전세계적으로 워낙 군소업체들이 많다보니 전문적인 기업은 드물다. 용인에 본사를 둔 진글라이더 역시 국내에서 유일하다. 송 대표가 어떤 방향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국내 시장 자체의 방향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간 5천여개의 패러글라이딩을 생산해 내며 1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진글라이더는 국내소비시장은 20억원 안팎으로 그리 크지 않지만 동호회 회원이 3만여명에 이를 만큼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기도 하다. 전세계 70개국에서 판매되는 진글라이더는 마케팅 부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마케팅을 전담하고 있는 직원은 프랑스인으로 주시장인 유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고유성만을 고집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여기에 송 대표가 직접 패러글라이딩 선수로 활약하고, 전문 팀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전세계를 다니면서 선수들을 붙잡고 홍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라= 진글라이더 송 대표는 패러글라이딩 분야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장본인이다. 송 대표가 비행을 배울때만 해도 비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때가 1987년도의 일이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정책적으로 팀을 구성해서 대회에도 참가시켰다. 패러글라이딩은 생각보다 접근성이 어려워 관심이 있어도 쉽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지금은 전국의 비행 동호회 활공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아직까지도 직접 비행에 나서며 제품의 안전성과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있다. 협회 행사를 진글라이더에서 지원하며 주기적으로 선수를 길러내고, 교육전문가도 배출한다. 현장에서 선수들이나 회원들과 함께 호흡해야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디자인이 생명이다= 외제차의 디자인이 돋보이는 것처럼 패러글라이딩 분야도 디자인이 생명이다. 디자이너가 누구냐에 따라 이미지가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대회를 돌아다니던 송 대표를 두고 동료 선수들은 이름의 가운데 글자인 ‘진’으로 불렀다. 이것이 진글라이더의 상호이자 디자이너 송 대표의 이름이기도 하다. 회사 설립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해외 바이어들은 송 대표의 이름만 믿고 찾아왔다. 설립 이전부터 투자가 몰려왔다. 송 대표는 “기업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비행하는 사람, 실제로 경기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며 “지금도 스스로가 달리는 광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지의 공간을 향해= 지금이야 세계 패러글라이딩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송 대표에게도 첫번째 동업 실패와 그로인한 생활고도 있었다. 어떤 때는 쌀이 떨어져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남들 다 힘들던 외환위기때 그 역시 참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자존심이 있었다. 다른 업종처럼 예제가 있는 업종이 아니라는 생각이 개척정신이라는 또 하나의 사명감을 던져준 것이다. “무엇보다 제품 자체를 사용자 입장에서 만들었던 것이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한다”는 송 대표는 “처음부터 메이드인 코리아를 벗어나려고 글로벌 마케팅 기법을 활용한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난방비 부담 적은 저온성 품종으로 승부수 ”

“궂은 날이 있으면 갠 날이 있듯이 힘든 때가 있으면 즐거운 때도 있는 것이 인생사가 아니겠습니까. 화훼산업이 여러 대내외적 악재로 침체국면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연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기름 값, 여기에다 소비까지 침체돼 국내 화훼산업이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산비 절감을 위한 품종 선택과 재배기술 개발로 난국을 헤쳐 가고 있는 선진 화훼인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경기도 시클라멘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홍완식씨(52·이천 하일꽃 농장 대표). ◇갈수록 어려운 화훼산업 “하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꽃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경영비를 따져 볼까요. 수년째 꽃 값은 떨어지고 있는데 반해 인건비에다 특히 난방비용이 총 경영비중 점유하는 비율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습니다.” 홍씨는 현재, 이천 신둔과 백사지역에서 총 1만2천㎡ 온실 면적으로 꽃 농사를 짓고 있다. 소형분화가 주종인 온실에는 베고니아와 시클라멘, 카네이션 그리고 초 저온성인 천양금 등 20여종의 화종이 즐비하게 재배되고 있다. 이만하면 수도권내 손꼽을 만한 대농이다. 생산비를 줄일 수 있는 체계적 화종 선택에다 기술개발로 해마다 경영비를 줄이고 있지만 연간 3억원 정도나 되는 경영비가 항상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난방비가 문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총 경영비중 난방비가 20~30% 정도 였지만 올해에는 50%까지 점유할 것이란 자체 판단이다. 기름 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는 탓이다. 올해 같으면 3천300㎡ 기준, 난방비가 1천만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또한 지난해 유지했던 평균 온실 온도(20℃)를 3℃ 정도 떨어뜨렸을 때 계산되는 액수다. 지난해의 경우, 온실 온도를 20℃로 맞췄어도 월 평균 난방비는 부담되는 수준의 평균 600만~700만원 정도였다. 하물며 온도를 3℃나 떨어 뜨렸음에도 불구, 경영비는 오히려 30% 가량 오를 것이란 생각에 올 농사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꽃 값을 살펴보자. 베고니아의 경우 지난해 1분 기준, 3천500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현재, 500원이 떨어진 3천원선에 머물고 있다. 시클라멘 또한 15cm 1분이 지난해 같으면 3천원에 거래됐으나 올초 시세는 2천~2천500원 수준이다. 떨어지는 꽃 값에 반해 난방비는 겁이 날 정도로 뛰어 오르는 역조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현상을 타개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고민 끝에 홍씨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초 저온성 화종 선택이다. ◇농원의 돋보인 경쟁력 하일꽃 농장은 지난해부터 ‘천양금’이란 초 저온성 분화를 시장에 출하하고 있다. 이 분화는 원래 토종이지만 일본에서 유명세를 탄 화종중 하나로 난방을 하지 않고도 꽃 피움이 가능한 초 저온성 품종이다. 겨울철이면 대개 온실마다 낮게는 17℃에서 20℃까지 온도를 유지해야만 제대로 된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삽목후 1년후 출하가 가능한 천양금은 5℃ 이하에서도 성장이 가능하다. 게다가 분당 판매가 또한 현재 800원으로 경쟁력이 괜찮은 편이다. 작년에는 1천200원까지 받았다. 또 오는 4~5월 가정의 달을 겨냥, 시장에 출하할 목적으로 이태리에서 들여온 초 저온성 카네이션을 다량 재배중에 있다. 기존 품종은 10~15℃ 정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 품종은 7~8℃에도 생육이 가능하다.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생산비를 줄여가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천양금의 경우, 분당 500원까지만 받아도 괜찮다고 판단돼 앞으로 농원 주종으로 재배해 볼 생각”이라고 홍씨는 말한다. 농장의 기술력도 돋보인다. 우선, 지난 84년중 ‘보일러시스템’을 도입한 선도적 화훼농가로 손 꼽힌다. 당시 왕성한 소비시장에 편승해 발화, 즉 꽃 피우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바닥에 엑셀파이프를 설치한 후 실내 온도를 골고루 또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농가들은 연탄으로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둘째는 ‘C형관 이용 심지재배법’ 개발이다. 양쪽 끝을 막은 C형관에 물을 채우고 그 위에 화분을 놓은 뒤 화분 아래쪽에 심지를 꽂아 뿌리가 필요한 만큼 물을 흡수케 하는 방법이다. 식물의 재배조건을 최적화하기 위해서다. 홍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최근에는 경기도농업기술원과 함께 산소공급라인(구멍)이 추가된 ‘기능성 화분’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화분 윗부분에 산소 공급라인을 만들어 줌으로써 산소 공급이 원활해져 작물 생육을 왕성하게 할 수 있었다. “대개 화분을 물에 담가 놓을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물과 용토가 부패돼 뿌리가 상하기 마련으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이같은 화분을 고안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기능성 화분은 조만간 특허 출원을 마친 뒤 경기도 시클라멘연구회원들에 보급, 생산성을 극대화 할 생각이다. 셋째는 ‘식물뿌리 난방기술’ 개발이다. 큰통의 연탄보일러를 통해 데워진 물이 식물재배 베드에 깔려진 8mm의 고무관을 통해 흐르게 함으로써 난방 효율을 극대화 하고 있다. 이경우 온실 전체 난방을 통해 소비되는 에너지를 차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뿌리의 적정 온도를 상시 유지해 재배조건을 최적화 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화려한 인생역전 화훼인으로의 홍완식씨가 걸어온 길은 한편의 드라마다. 논 밭 몇 마지기로 생계를 근근이 연명했던 그는 원래 화순 출신이다. 생활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무작정 상경했다. 그때가 21살의 혈기 왕성한 때였다. 가까운 친척 도움으로 지금의 뚝섬에 있는 시계 공장에 취직, 한달 봉급 8천500원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하지만 식비로 고스란히 지출되는 비용만 해도 4천원 정도나 돼 월급쟁이로 안주할 수 만은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숙식을 해결하고도 손에 쥔 수익이 월급보다 많은 주변의 화훼 농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인생역전이 시작된다. 1978년 하남에서 1만㎡ 규모로 농장을 처음 마련한 그는 서울 하일동까지 재배면적을 넓혀가면서 우여곡절 속에서도 일취월장해 갔다. 그러다 90년부터 이천과 인연을 맺으며 2000년 전후 수십억 가치의 넓은 면적의 유리온실을 확보하면서 지금은 이천, 나아가 경기도와 국내 화훼전문경영인으로 그 명성을 높이고 있다. 현재 그는 경기도 시클라멘 연구회 회장에다 또 화훼자조금 분과위원장으로 농장 일만큼이나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정회원이 스물다섯 농가로 구성된 시클라멘 연구회는 도내 품목별 연구단체중 왕성한 활동에다 탄탄한 동지애가 돋보여 항상 모범을 보이고 있다. “항상 가족처럼 생각되는 시클라멘연구 회원들과 함께 더불어 잘 살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개발하는데 발품을 팔겠다”는 홍완식씨, 자신만만함과 왕성한 혈기가 이천은 물론 경기지역 농업발전에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해 본다./김동수기자 dskim@kgib.co.kr

中企 뭉쳐, 세계시장 활로 찾는다

최근의 경제환경은 급격한 기술변화와 짧아진 제품수명주기로 기업의 신속한 대응력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FTA라는 시대적 조류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글로벌경쟁에서 승리해야 생존할수 있다는 절박감을 더하고 있다. 또 소비자의 욕구는 대량생산체제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전환을 강요하고 있으며 제조업의 성장률과 고용률이 한계에 직면함에 따라 중소기업에게도 고도화된 전문경영기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경제환경에서 중소기업 2~7개가 각각 기업의 핵심역량, 즉 R&D기업은 기술, 제조업체는 시설, 마케팅기업은 판로 등만으로 뭉쳐 대기업과 같은 효과를 내는 협업경영기법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지난 2004년 기업 CEO, 산업연구원 박사, 언론계 인사 등 다양한 전문인력의 참여로 출범한 한국ICMS협회가 시행하고 있는 ICMS사업(Integrated Contract Manufacturing & Service: ‘통합계약 생산 및 서비스’를 의미)은 협업경영의 메카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개별중소기업이 아닌 기업간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방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본 역시 2005년 신사업활동촉진법 제정으로 중소기업간 협업을 지원하고 있다. 협업은 R&D, 제조, 마케팅 등 특화된 전문기업이 핵심분야만 직접 수행하고 나머지는 상호간 협력을 통해 조달하는 방식을 말한다. 협업 참여기업들이 자금과 위험을 분담하면서 신속하고 유연하게 제품생산과 판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업의 의미가 아니며, 협업기업간 동등한 지위를 갖고 다만 판매나 제조 등 해당 기업의 역할만 담당하는 것이다. 핵심기술을 보유한 R&D전문업체가 생산, 마케팅업체와 협업체를 구성하거나 국내·외 주문을 수주한 마케팅 전문업체가 생산업체와 협업체를 구성하는 형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같은 협업 지원법안이 지난 2006년 중소기업특례법 개정을 통해 이미 시행되고 있다. 한국ICMS협회는 협업사업 승인제도를 통해 다수의 기업이 제품개발, 생산, 판매 등에서 각각의 전문적인 역할을 분담, 상호 보완적으로 제품을 개발·생산·판매하는 협업사업계획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정부는 협업기업에게는 협업자금 융자지원과 협업체 운영 컨설팅을 지원하고, 신용보증이나 기술보증, 중소기업청 R&D, 판로 등 우선 지원에 나서게 된다. 위성수신 R&D 및 마케팅 전문 기업인 M사는 위성수신기술에 있어 장영실상을 수상할 만큼 국내뿐 아니라 프랑스등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는 업체다. 그러나 지난 2006년 해외에서 밀려드는 주문량과 바이어의 제품 업그레이드 요구에 따라 빠른 기간 내 금형부품 개발의 절실함을 느꼈다. 제품의 질과 속도라는 2마리 토끼를 잡기위해 M사는 한국ICMS협회(한국협업기업협회)를 통해 금형부품 안테나 제조회사인 S기업과 수신기 제조업체 K정밀과 협업(CF: Consortium Family)을 맺었다. 월등한 기술에 비해 생산시설과 전문인력 등이 부족하기도 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시설을 늘리면 기술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M사는 결국 협업을 통해 조립금속 제품생산은 별도의 전문업체가 담당하게 하고 기술개발에만 집중, 프랑스 방송국에 납품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인해 M사의 기술개발력과 마케팅력이 더욱 고도화 됐음은 물론 S기업과 K정밀은 안정적인 마케팅을 기반으로 제조능력을 한단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이들 기업은 기존 프랑스 바이어는 물론 두바이와 탄자니아 등 신규시장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이밖에도 M크코리아는 제품 포장 및 디자인과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사업 다각화와 제품 다양화를 위해 협업경영을 전개키로 했다. 마케팅 업체가 중심이 됐지만 소비자의 욕구에 맞는 업그레이드를 위해 마케팅분야를 확대한 것이다. R&D, 마케팅 전문업체 I와이드와 부품공급업체 M테크 등이 협업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현재는 멀티미디어 관련 기재(CD/DVD, 테잎 등)에 대한 양질의 수급으로 핵심 기술인 저장 매체의 질적 향상을 이뤘으며 미디어 기재의 저가 공급으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 이들 협업기업들은 국내 교육 미디어 관련 업체에 납품 공급 계약을 준비중에 있으며, 하반기 일본 등 아시아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인터뷰> “글로벌시대 中企 생존모델” “올해는 한국ICMS협회의 본격적인 성장기로 기대하는 만큼 협업사업 환경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중소기업의 생존 모델인 협업사업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ICMS협회(한국협업기업협회) 권재형 회장은 2008년을 한국ICMS협회 성장기로 규정, 활발한 활동을 다짐했다. 권 회장은 “지난 2006년 12월22일 중소기업간 협업을 지원하는 법률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서 기업간 협업사업이 햇빛을 쬐였지만 짧은 홍보기간으로 인해 기대만큼의 호응은 없었다”며 “선진국에 비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협회가 시행하고 있는 ICMS사업은 통합계약 생산 및 서비스 방식으로 흔히 말하는 동업과는 차이가 있다. “아웃소싱의 한 방법이긴 하지만 1개의 기업이 개발에서 판매까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부분, 즉 그 기업이 가장 잘하는 부분을 각각 맡아 수행함으로써 대기업과 같은 시너지 효과를 낼뿐 아니라 참여기업의 평등한 관계로 인해 갑작스런 가격인하 등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권 회장은 말한다. 지난 2004년 설립된 협회는 그동안 지원법안이 없는 상태에서 성공사례를 만들어냈고 협업사업에 대한 홍보에 주력해 왔다. 협회가 이 기간동안 수행한 협업사업을 중심으로 내놓은 ‘협업사업의 성공및 실패사례’는 정부기관은 물론 중소기업을 연구하는 각종 기관과 연구기관등에서 뜨거운 인기를 끌 정도로 협업분야사업의 기초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원법안 통과 후 예산사업 첫해인 올해, 협회는 산업자원부, 중소기업청 등 중앙정부는 물론 경기도 등 지자체와 함께 글로벌시대 중소기업의 생존모델인 협업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최대 밀집지역인 경기도와 파트너십을 맺고 각종 세미나와 간담회, 설명회 등을 추진하면서 홍보 및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만 하다. 권 회장은 “최근들어 협업의 필요성은 중소기업들뿐 아니라 대기업에서 공감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이 FTA체제로 대변되는 글로벌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협업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와 같이 무한경쟁체제 속에서는 중소기업은 특히 단 한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수 있지만 협업을 하게 되면 사업에 참여한 2~6개 기업이 리스크를 분담,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도 낼 수 있다. 그는 “중소기업이라도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핵심역량들로 뭉친다면 사업성공률은 대단히 높아질 것”이라며 “협업을 통한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협회는 회원사뿐 아니라 모든 중소기업에 문을 개방하고 노하우를 나누겠다”고 말했다. 권회장은 특히 “기업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스스로 움직이고 변화하지 않으면 힘들어 진다”며 “협업에 대해 생소해 하지 말고 이를 기업발전의 기회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암진단 센서 개발, 뜁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에 위치한 ㈜인포피아(대표 배병우·46)는 1996년 설립된 혈액진단 바이오센서를 개발해 온 진단 바이오분야 최고의 기업이다. 지난 2006년에는 코스닥에 상장되는 10년만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성장이 있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이를 두고 인포피아 배병우 대표는 “회사가 문닫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확신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 한 언젠가는 성공하게 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 배 대표는 여느 기업들의 대표들처럼 판공비가 없다. 그 흔한 회사차도 없다. 핸드폰 요금에서 차량유지비까지 개인 돈으로 사용한다. 물론 회사에서 받은 월급이다. 배 대표는 “회사의 대표 역시 사원들 중 한명이라고 생각한다”며 “회사에서 받는 월급이 있는데 별도의 판공비가 뭐가 필요하겠냐”고 말했다. 이러한 원칙은 배 대표가 지난 10년을 지켜온 규칙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배 대표는 주위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원칙주의자’다. 그래서 때로는 “원칙 아닌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가 힘들다”고 토로 하기도 한다. 사업을 시작한 계기도 그랬다. 젊은 시절 대기업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회사 총수가 선거에 출마하는 일이 있었다. 당연히 회사직원들이 선거운동의 맨 앞에 섰다. 그때는 그런 일들이 당연한 것 같은 시기였다. 하지만 배 대표는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일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1996년 지금 인포피아를 설립했다. ▲힘든 시작 인포피아는 설립초기 인터넷 정보를 판매하는 업체로 시작해 곧이어 전자동 생화학분석기를 개발, 판매 했었다. 선진국과 버금갈 정도의 고기술이었고, 충분한 판매 시장도 있었지만 신생 벤처기업이 하기에는 힘든 사업이었다. 지나치게 기술 중심으로 접근했던 것이 오히려 실패의 원이이 됐다. 그렇게 인포피아는 첫번째 실패를 맞봤다. 이듬해인 1996년 배 대표는 사업전환을 시도했다. 당뇨나 고지혈증 등의 분야에서 세계최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술이 없는 상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국적 기업이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배 대표는 관련 분야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박사를 만나 새로운 기술 개발에 돌입했다. 무려 2억7천만원이라는 거대 자금을 투자했다. 배 대표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20여억원만큼 가치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기업이 선점할 수 있는 포지션을 잘못 선택했던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몇년간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시간이 결코 낭비였거나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이후 인포피아는 혈액진단 센서 개발에만 10년을 투자했다. ▲누구나 힘들었다 사업전환을 했지만 그로인해 어려움이 해결된 것은 아니였다. 이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인포피아를 비롯한 모든 기업들이 어렵고 힘든 시기가 이어졌다. “그때는 누구나 힘들었다”고 말하는 배 대표는 “무엇보다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했다. 배 대표는 또 “그때는 보유하고 있는 자금이 없어서 어음발생을 해야 했는데, 발행하면 부도가 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로는 현금거래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인포피아의 생존전략이 됐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나니 2000년 벤처파동이 닥쳤다. 직원들 급여도 30%나 줄이고 구조조정도 했다. 6개월에서 1년까지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못했다.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직원들이 남았고, 그들이 있어 인포피아는 현재까지 이어오게 됐다. 배 대표는 “지금은 회사가 성장해 남아있는 직원들이 많은 혜택을 봤다”며 “아마도 어려울 때 참고 견뎌준데 대한 보답이 아닌가 한다”고 말을 이었다. ▲홈케어시대 인포피아는 의료진단 기기의 가전화를 꿈꾸며 일반 가정에서도 당뇨병이나 고혈압, 심장병, 고지혈증, 간질환 등 각종 질병을 판단할 수 있는 바이오센서 의료기기를 생산하고 있다. 바이오센서란 특정한 물질에 대한 인식기능을 갖는 생물학적 수용체가 전기 또는 광학적 변환기와 결합되어 생물학적 상호작용 및 인식반응을 전기적 또는 광학적 신호로 변환함으로써 분석하고자 하는 물질을 선택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소자를 의미한다. 인포피아는 이러한 원리를 이용해 혈당측정 바이오센서를 주력 상품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향후 암진단 바이오센서까지 개발할 계획이다. 일반가정에서도 각종 질병을 판단할 수 있는 홈케어 시대는 이미 외국에서 상당한 관심이 있는 분야다. 바이오센서의 세계시장은 2002년 65.7억 달러 규모에서 2004년에는 약 82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였으며, 향후 연평균 10.4%씩 성장하여 2010년에는 145.5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04년 기준으로 의료용 바이오센서가 전체 시장의 84.2%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 중 혈당측정 바이오센서가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가정에서 가족의 질병을 미리미리 예방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장기적인 계획이다.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라 “때론 물건이 안 좋아도 잘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기업들은 자기 상품을 팔지 못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 대표는 기업의 모든 문제를 판매로 귀결시킨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업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영업조직도 많다, 전체 직원 100명가운데 20명이 영업조직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영업조직인 해외팀도 5개 팀이나 된다.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소만큼이나 영업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배 대표 자신도 직접 해외영업 본부장을 맡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기업의 목표는 꿈을 보고, 기술을 봐야 합니다” 시장에 맞는 제품,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야 하고, 그때부터가 기업의 이익이 발생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꿈을 위해 전진하는 인포피아와 배병우 대표는 그렇게 오늘도 홈케어 시스템을 팔기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조합문턱 낮추고 고객만족 높이고 ‘뚝심경영’

대개 성공 CEO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향기가 있다. 넘치는 카리스마에다 또 조직을 아우르는 포용력과 융화력이, 때론 밀어 붙이는 업무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 한편으로 믿음과 관용의 미덕도 철철 넘쳐난다. 이런 향기는 곧바로 조직 발전과 비전을 제시하는 근간이 된다. ◇7년의 노력 ‘결실’= 용인축협 조성환 조합장(57)에게는 남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CEO의 향기가 배어 있다. 온화한 미소 뒤에는 항상 일에 대한 옹고집이 누구보다 강하고 공사처리가 분명한 사람이다. 조합장 취임 이후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물에서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조 조합장은 2대째 용인축협 수장직을 역임해 오고 있다. 취임 당시인 지난 7년전, 조합 예수금은 1천200억원 그리고 경영상태는 간신히 적자를 면할 정도였다. 무척이나 어려웠던 당시 상황이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현재, 예수금 규모는 3천450억원으로 300% 이상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올해에는 지난해 예수금보다 무려 300억원 순증했다. 대출금 규모 또한 지난해보다 600억원 순증한 3천100억 정도로 성장했다. 이런 신장세에 편승, 올 사업 물량은 무려 7천억원에 달한다. 이 또한 지난해 5천억원보다 무려 2천억원이나 늘어난 규모다. 이 모두 7년전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로 보기에 충분하다. 조 조합장의 원대한 목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당초 2012년까지 계획했던 사업물량 1조원 시대를 2010년으로 2년 앞당긴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내년 계획 사업물량이 올해보다 1천억원 증가한 8천억원대다. “FTA 등으로 지금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1차 산업은 분명 끈기와 저력이 있기에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이 조 조합장의 평소 소신이다. 이런 뚝심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조 조합장은 원래 기업 CEO 출신이다. 서울에서 삼성전자 협력회사로 조그만 전자부품 회사를 경영한 기업인이다. 사세가 확장되면서 공장 부지가 필요했던 그는 지난 79년 처음으로 용인을 찾아 인연을 맺어 간다. 용인에 정착한 그는 처음에는 회사를 계속 유지해 갔다. 그러다 지역민으로 축산에 매료돼 지난 85년 젖소 20두를 구입해, 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후 2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잘 될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지역내 성공 축산인으로 이름을 올려 놓게 된 것이다. 현재 용인에서 40만㎡ 규모의 목장 부지와 함께 일일 착유량 3t 규모인 젖소 250두를 기르고 있는 용인지역내 최대 대농중 한 사람이다. 원 고향이 용인이 아니지만 원주민보다 지역은 물론 축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넘쳐 났기에 축협 조합장 또한 백암지역 조합원들의 만장일치 추대로 쉬이 입성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용인축협 박용순 경영혁신실장(사진작가)은 “지난 7년간 조합이 이렇게 발전한데는 조합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 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CEO로서 자질과 능력이 출중한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오는 2010년 사업물량 1조원 달성에 없어서는 안될 분”이라고 말했다. ◇고객 만족 경영= 용인축협 조합원은 1천800여명이다. 현재 본점을 비롯 12개 사무소에 근무중인 직원은 160여명 정도다. 무엇보다 조합이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조 조합장은 올 점포 운영의 1차 목표를 ‘고객 가치혁신의 해’로 삼고 자신은 물론 전 직원을 채근했다. 그 결과, 농협중앙회가 실시하는 총 8회의 CS(Customer Service) 평가에서 발군의 점수를 받았다. 모두 8회에 걸쳐 이뤄진 평가에서 전 사무소가 90점 이상의 고득점을 획득, 전년대비 11점이 오른 평균 90점이란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최근에 이뤄진 8차 평가에서는 중앙회와 지역 농협의 평점이 각각 89.2점과 88.0점에 머물고 있는데 반해 97.8점이란 월등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날이 갈수록 고객 만족 경영이 현실화 되고 있는 모습이다. “고객들이 만족하는 조합을 만드는 것 만이 현재의 힘든 상황을 타개해 나갈 지름길로 확신한다”는 조 조합장은 항상 고객 모시기에 조합 문턱을 낮추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런 노력은 곧바로 조합 신장과 연결됐다. 모두가 긴축경영에 돌입한 올 한해 용인축협은 상호금융 사업확대를 위한 공격적 마케팅 일환으로 기흥보라지점과 수지동천지점 등 2개 사무소를 개점했다. 이 때문에 상호금융대출금이 전년대비 24% 정도 신장, 11월말 잔액 기준 3천79억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 들어 고객 감사 일환으로 정기예금 특판 행사도 벌이고 있다. 1년 기준 금리가 단리식의 경우 6.5%, 복리식은 6.69%대다. ◇사회공헌 활동= 용인축협은 농협중앙회와 경기일보가 추진중에 있는 농촌사랑 1사1촌 자매결연 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쉴새없이 바쁜 일과에도 불구, 관내 조합원과 농민을 위해 일손이 필요로 하는 현지 농가를 수시로 찾았다. 벼 세우는 작업에서부터 방역 활동, 모판준비, 고추따기 등 농가들이 필요로 하는 일손을 제때 지원해 줘 주변 칭찬도 자자하다. 이는 지역농민과 더불어 사는 조합 설립 취지에도 부합하기에 조 조합장을 비롯 직원 모두는 항상 일손지원에 나설때마다 내일처럼 기뻐하며 농토에서 땀 흘리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또 협동조합간 상호 발전은 물론 상생 방안 일환의 조합간 자매결연 운동에도 동참했다. 강원지역 고성축협과 자매결연을 맺고 도농 상생자금 5억원을 지급해 줬다. 사회 공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협이 내놓은 사회공헌 상품인 ‘지역사랑예금’(용인참사랑예금)을 통해 조성된 기금으로 관내 초·중·고 학생 지원 활동도 활발하게 펼쳐오고 있다. 주로 결식아동 후원을 비롯 도서기자재 지원, 장학금 지원, 각종 학습용품 지원 등에 사용중이다. 조 조합장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의 기금 확대를 통해 지역사회 환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조합과 조합원 그리고 관내 주민들이 함께 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들기에 앞장 설 계획”이라고 밝혔다./김동수기자 dskim@kgib.co.kr

우리기술로 만든 ‘맑은 공기’해외 바이어들도 “원더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돌파구는 있습니다. 사업도 상호 신뢰 관계입니다. 우리기업, 우리 상품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면 상대방 역시 신뢰를 지키게 돼 있습니다. 소비자들과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이른바 ‘잘먹고 잘살자’라는 웰빙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당시만 해도 건강을 생각하는 생산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생소한 단어에 열광했던 소비자들 역시 쏟아져 나오는 생산물들을 무분별하게 습득할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는 판단하지 못했다. 우리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기술의 필요성에 공감했던 ㈜맑은공기 도상혁 대표는 국내 최초로 몸에 해로운 오존은 발생하지 않고, 반대로 몸에 이로운 음이온 발생은 최대인 음이온 모듈 국산화를 실현한 장본인이다. ◇우연한 만남이 기회로= 언론사에 십수년간 몸담았던 도 대표는 지난 2001년 취재차 일본을 방문했다 기이한 한 사람을 만났다. 음이온만 가지고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웰빙산업과 실버산업이 10년은 앞서 발달돼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음이온에 관심을 갖게 된 도 대표는 국내에 들어와서야 우리나라에 자체기술이 없다는 것을 알게됐다.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할 지를 고민해 왔던 도 대표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단순히 일본의 산업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친환경적이고 웰빙적인 의미에서는 음이온 관련 사업이 오래도록 관심받을 것이란 비전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웰빙문화가 이슈가 되는 시점이 오고 있고, 시장이 확산될 것을 확신했다는 도 대표는 기존에 있던 업체들이 이에따른 기술적 노하우가 없다는데 착안, 국산화 기술을 먼저 발굴하는데 주력했다. ◇우리기술만이 살길이다= 생산 초기 “우리만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데 집중했던 도 대표는 제품을 판매하기 이전 R&D 인력부터 충원했다. 웅진이나 삼성, LG, 샤프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대기업이 웰빙바람을 타고 많은 생산품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 기업들도 자체적인 기술 없이 대부분 일본에서 직수입 한 기술을 사용하거나 대만 등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판매 과정도 다단계 위주로 변해 갔다. 공기청정기 한대가 100만원이 넘었다. 공기청정기 하면 옥매트나 정수기처럼 다단계 판매로 이뤄진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우리기술 개발에 집착했던 도 대표는 판매도 하기전이라 자금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도 대표는 친분이 있는 연구원들을 찾아다니게 됐다. 전담 연구원을 두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임시로 단편적인 프로젝트만이라도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맑은공기는 어렵게 국산 음이온 모듈 개발에 성공하게 됐고, 최초로 오존이 방출되지 않는 무오존 인증을 받아냈다. ◇시련은 깊어지고= 어렵사리 우리기술 개발에 성공했지만 도 대표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기술 개발에 쏟아붓다 보나 보니 회사가 더 힘들어졌다. 일만 열심히 할줄 알았던 도 대표는 날마다 회사를 위해 돈을 빌리러 다니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했다고 한다. 또 막상 제품을 생산해 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기술에 목말라했던 국내시장에 막상 우리기술을 내 놓아도 선뜻 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제품이 정직하다고 외쳐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대기업이라는 이름만 믿고 상품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고심하던 도 대표는 상품을 차별화 하기위해 가격도 낮추고, 기술력은 높이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다. ◇보따리 장사에 나서다= 자사 제품에 자신이 있었던 도 대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한국무역협회로부터 해외 바이어들의 정보를 받아 직접 안내 메일을 보냈다. 누가 언제 어디서든 만나자고 하면 서슴없이 제품을 들고 찾아갔다. 그런 끝에 한두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독일까지 날아가 직접 상품을 보여주고 계약을 맺었다. 당시 독일 바이어는 공기청정기의 경우 오존 발생이 항상 문제였는데 맑은공기의 제품은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이 반 덤핑 하는 경우가 많아 맑은공기의 제품까지 가볍게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맑은공기 제품과 대놓고 비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최초로 무오존 인증을 받은 맑은공기의 제품을 따라오기란 처음부터 힘든 일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보는 순간 이었다. ◇환율피해도 없다= 이렇게 인정받기 시작한 맑은공기의 제품은 환율변동 같은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게 됐다. 초창기 원달러 환율이 1천100원정도 했을때 계약을 시작한 도 대표는 이후 환율하락으로 많은 피해를 겪기도 했다. 다시 도 대표는 보따리를 싸서 바이어들에게 찾아갔고, 환율정책 관계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1달러를 우리돈 1천원으로 거래하는 1:1 계약을 체결했다. 맑은공기의 기술력을 믿은 해외 바이어들이 앞장서 나서 준 것이다. 해외바이어들도 분명 원화 거래를 선택한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직한 제품으로 맺어진 바이어와 업체의 상호신뢰 관계는 이같은 결과로 나타나게 됐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돌파구는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도 대표는 “제품은 고객과 믿음의 결과”라고 믿으며 지금도 세계시장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한국의 溫氣’ 세계에 전파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알려지고 사람은 일에 의해 평가 받듯이 기업은 품질로서 인정받겠습니다. 쉽게 제조된 제품은 고객에게 커다란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의 특징적 가옥문화인 ‘온돌’이 국제적인 명품으로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다. 처음 한국에 와서 온돌 문화를 경험했던 몇몇의 외국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우리의 온돌은 이제 해외 건축 양식에서도 빠질 수 없는 공법이 된 것이다. 이러한 온돌 공법을 해외에 알리데 한 몫을 담당한 도내 중소기업 렉스바(www.rexva.co.kr) 역시 온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됐다. ◇한류 여기도 있다= 유명 연예인들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온돌 문화도 이제 한류열풍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유한 온돌이 바닥에서만 열을 발산해 온 집안을 따뜻하게 했던 방식이었다면 렉스바의 난방필름이나 면상발열체는 바닥의 열을 천장과 벽으로 옮겨왔다. 바닥과 벽, 천장 등에 얇은 난방필름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로써 해외 난방 방식인 히터 방식과 우리의 온돌이 만난 특별한 난방 방식을 만들어 냈다. 난방필름을 이용한 필름히터는 전기열 보다 30%, 기름보일러 보다 60% 저렴한 장점이 있다. 최근 외국의 경우 우리의 온돌 방식을 고급 아파트나 리모델링에 사용하는 등 일부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이랬던 것이 지금은 렉스바의 노력으로 더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온돌의 우수성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 인정받다= 렉스바의 제품들은 조악하지 않고 안정적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지난 10월 경기도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주최한 CIS지역 통상촉진단에 참여한 렉스바 김호섭 대표(43)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우크라이나 S사를 벨로루시 민스크에서 직접 만나 수십만불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업계 최고라는 독일 Enhofilm보다 더 좋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계약을 이뤄내기 위한 김 대표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이끌어낸 결과이다. 렉스바의 제품은 가격이 조금 비싼 대신에 안전성이 높다. 안전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 과정이 견고하다는 것이다. 이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포함된 김 대표와 직원들의 노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공장을 설립하고 단 한번의 실수도 발생하지 않았다. 처음 생산한 제품을 납품할 때는 “꼭 딸 자식 시집 보내는 것 같더라”고 말할 정도로 김 대표가 제품에 쏟아붓는 열정은 크다. 이러한 열정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영국, 인도, 미국, 캐나다,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까지 판로를 확보해 렉스바의 기술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바닥까지 떨어져 봐라= 렉스바 김 대표가 이렇게 성공하기 까지는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5년이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들어간 벤처기업이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김 대표는 1년간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다. “처음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평생 처음 월급을 못 받아봤습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하던 김 대표는 그냥 바닥까지 떨어져 보기로 결정했다. 우습게도 그러고 나니 새로운 희망이 생기더란 것이다. “더이상 떨어질 바닥도 없다고 생각하니 다음달 월급 걱정이나 그동안 받지 못한 월급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수 있는 용기를 낸 그는 다른 할 일이 없어 창업을 준비했다. 처음 노동부에서 지원받은 종자돈 1천만원이 수중의 전부였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동안 지킨 의리 덕분에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힘든 누군가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끝까지 한번 떨어져 봐라. 그러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라고 말이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온돌 방식을 채택해 웰빙난방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난방필름 생산업체 렉스바(www.rexva.co.kr)가 국제적인 이름을 얻고 짧은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호섭 대표 자신에게 있다. 아직도 새벽 2, 3시면 잠에서 깨 회사 생각만 한다는 김 대표는 분명 두 아들과 아내에게는 아빠와 남편으로의 점수는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객에게 평가 받는 점수는 그렇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 렉스바 홈페이지를 접속하면 실시간 대화의 창이 열린다. 언제고 궁금한 사항이 있는 고객들은 친구와 채팅하듯 렉스바의 직원과 연결할 수 있다. 그 실시간 상담을 맡고 있는 직원이 다름 아닌 김 대표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장이 직접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시간이 날때마다 고객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든 고객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해 낸 것이 실시간 대화 창이다. “좋은 제품을 쓰기 위해 고객들이 갖는 궁금함은 당연하다”며 “고객의 궁금함을 해결해 주는 것도 생산자의 당연한 업무”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는 또 “자기품질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가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이를 위해서는 제품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상품으로써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는 장비가 우선이고, 제품이 우선이고 사람이 나중이다. 사람이 가장 나중인 것은 제품이 좋으면 김 대표를 믿어줄 것이고, 렉스바 자체를 믿어줄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 골프방 대중화 이룰것”

㈜월드스크린골프는 고양시 덕양구 지식정보진흥원에 본소를 두고 지속적인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다. 현재 직원은 총 25명으로 이중 개발팀은 기술력 유지에 근간이 되는 보안을 위해 별도 분리돼 운영중이다. 스크린골프는 일반적으로 정면 스크린에 3D시뮬레이션과 센서모드 등이 작동, 여러기능을 포함한 ‘도심 속의 골프장’으로 필드에서 직면할 수 있는 유사상황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굳이 필드를 나가지 않더라도 필드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의 골프능력 향상을 위한 과학적인 진단 또한 받을 수 있다. 장호정 대표가 구상하는 ‘골프방’은 노래방과 흡사한 시스템을 지닌다. 스크린골프장에는 쇼파와 같은 휴게공간도 마련돼 있으며 1인당 2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18홀을 돌게 된다. 게다가 스크린골프에 내장돼 있는 수십, 수백여 개의 필드 소프트웨어는 국내는 물론 해외 유명 골프장까지 안내한다. 아직도 일부 특정계층 위주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국내 골프 문화가 골프방을 통해 대중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지, 자뭇 기대되고 있다. 지난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골프 엑스포(Expo)에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한 기업체가 참가했다. 세계 몇몇 나라에서 이미 개발됐던 ‘스크린골프’를 내놓은 ㈜월드스크린골프는 비록 후발주자에 속했지만 기존 기술력을 뛰어넘는 차별성과 순수 개발한 기술로 관람객은 물론 각국 바이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업체는 패기 하나로 뛰어든 외국 박람회에서 미국 등 여러나라는 물론 10년 가까이 스크린골프 업종을 이어오던 타업체들을 제치고 당당히 히트상품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월드스크린골프의 장호정(37) 대표가 스크린골프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시기는 2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골퍼인 부인과 장인의 권유로 2005년 스크린골프를 접하게 된 그는 젊은 나이에 겪었던 사업실패라는 쓴맛의 기억에 망설임 끝에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뭐랄까…. 저도 처음 경험한 건데, ‘이거다’싶은 느낌이 전해왔습니다. 머리 속을 뚫고 가는 한 단어가 있었어요.” 총알이 머릿속을 관통하듯 ‘골프방’이 스쳐 지났다. 계획을 잡아 놓은 것이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노래방의 성공신화가 골프방으로까지 이어지리라 믿음이 왔다. 이때부터 그는 혈혈단신 무던히도 발품을 팔았다. 처음 아무런 정보없이 내딘 발걸음인지라 막막했지만 게임업체 등을 중심으로 프로그램 개발자들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두 명, 세 명, 네 명…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스크린골프는 사실 이미 이전부터 국내에 들어와 일부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성업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외국 기술력에 의존해 있었고 틈새시장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대중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같은 시장분석 아래 도전한 장 대표의 여정은 국내외를 넘나들게 됐고 그곳 스크린골프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한 장 대표는 비로소 동반자들과 초기작업을 완성했다. “1년 만에 첫 기계가 완성됐습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처럼 모자란 것도 많았죠. 그렇다고 보완작업을 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장 대표는 우선 앞서 나왔던 스크린골프를 넘기 위해 골프장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투자했다. 당시만 해도 스크린골프 기계 한 대당 20개에서 많아야 40개 정도의 필드만을 보유한 골프장 소프트웨어를 장 대표는 70여 개로 대폭 늘려 골퍼들의 다양성을 충족케 했다. 또 60%에 육박하는 실골프장과의 유사성에 순수 국내기술로 일궈낸 편의성 등도 더했다. 한 마디로 틈새시장을 대중시장으로 확장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현재 보유중인 골프장 소프트웨어만도 140여 개에 이르는데, 내후년까지는 400여 개를 만들어낼 계획이에요. 사람들이 골프방을 찾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가장 단순히는 시·공간의 제약에 따른 연습 개념이겠지만 이는 일부 골퍼들의 이야기이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어울리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번 와봤더니 ‘그게 그거네’라고 하면… 재미없겠죠?” 그의 노력은 올해부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베이징골프엑스포는 물론 지난 9월 고양 킨텍스에서 경기도가 주최한 G-Fair(경기도 우수상품박람회)를 통해서도 명성을 떨쳤다. 중국에는 이미 현지 법인이 세워졌고 국내에만도 40여 개의 지점이 운영중이다. 또 중동 두바이와 100여 대의 기계수출을 화두로 협의중에 있으며 이 밖에 베트남과 싱가폴 등에서의 러브콜도 꾸준하다. 불과 3년이 채 안된 세월만에 일궈낸 세계시장 진출이다. 이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게임산업이 성장할 무렵 투자자로 나섰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했고 20대 중·후반에는 야심찬 포부로 유스호스텔 사업을 추진하다가 IMF를 겪으며 젊은 나이에 도망자 생활도 감수해야 했다. “아직 성공이라 하기엔 좀 그렇죠. 투자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 집도 잡히고, 빚도 있고…. 그래도 투자는 계속할 것입니다. 골프방 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쉼없이 달리는 것, 그것이 제 업(業)인 것 같아요.”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거대 기기들 ‘제어’ 핵심부품 “정직한 기술력으로 승부”

근대사회의 산업발전을 이룩해 놓은 인간의 한계는 아직까지도 미지수다. 과거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비행은 어느덧 항공운수업을 이루었고 우주로의 여행까지 기대하게 되는 등 머릿속 상상력이 현실화 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땀과 노력, 그리고 이를 가능케한 여러 기기들을 이루는 구성품들에 대해 아는 이는, 전문가가 아니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거대 기기설비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부품들의 역량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 보다 더욱 값진 의미를 지닌다. ‘액추에이터(Actuator)’는 그들 중 하나에 해당된다. 다소 생소한 액추에이터란 사전적 의미로 ‘가동시키는 것’을 뜻하는데, 흔히 가동에너지(전기에너지)를 기계적인 변위 또는 응력으로 변환하는 트랜듀서이며 공기압식, 유압식, 전기식 등이 있다. 즉, 에너지를 기계적인 일로 변환시켜 직선운동이나 회전운동 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액추에이터는 실상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자동차에서부터 선박이나 댐, 정유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이 다양하다. 1958년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150㎞가량 떨어진 바쓰(Bath)라는 도시에서 설립된 업체 로토크(Rotork)는 이 액추에이터에 있어 전세계를 상대로 한다. 현재 80여 개국에 걸쳐 지사 및 에이전트가 운용중이며 반세기에 이른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는 산업 자동화와 계측기기 분야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한국법인인 ‘로토크 콘트롤즈 코리아 주식회사’(이하 로토크 코리아)는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유럽, 미주에 이르기까지 가스와 오일, 원자력, 발전사업, 화학 플랜트, 상하수도, 선박 등의 액추에이터에 있어 명실공히 으뜸을 달리고 있다.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로토크 코리아만의 고객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액추에이터는 본래 밸브(Valve)업체를 주고객으로 하지만 결국 밸브 액추에이션(Valve Actuation)을 필요로 하는 곳이 최종 고객이 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외국의 공사를 수주할 때 일종의 플랜을 제공한다. 직접 액추에이터를 공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마다 기준이 달라 후보군이 되는 해당 액추에이터 및 업체에 대한 수준과 기술력 등을 조언, 국내 기업의 액추에이터 및 업체 선정을 도와주고 있다. 국내에는 이미 전국 곳곳에 로토크 코리아에서 수급한 액추에이터가 가동중이다. 한국도시가스를 비롯해 과천정수장, 영광원자력, 태안화력, 충주댐, 인천 LNG, 현대중공업 등 프로젝트로만 계산해도 수백여 개에 이른다. 이러한 로토크 코리아에도 한 번쯤 시련은 찾아 왔다. 1988년 ‘지사’의 개념으로 출발한 로토크 코리아는 1995년 오늘날의 한국법인에 이르렀지만 2년 뒤 IMF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당시 50% 가깝게 보이던 시장점유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 했던 것 처럼 본사의 기술력과 한국법인의 마케팅이 조화를 이뤄 이제는 30% 가량을 웃돌고 있다. 기술력에 있어서는 영국 및 말레이시아 등에서 생산된 MOV(Motor Operated Valve)를 통해 수동화를 벗어나 신속성, 안전성, 효율성을 꾀했고 마케팅에 있어서는 ‘Install & Forget’이란 회사이념 아래 공급은 물론 서비스까지, 고객만족을 실천해 왔다. 외국계 기업이라는 텃새 속에서도 한국법인으로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다는 로토크 코리아는 가까운 미래에 사회환원 활동은 물론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는 등 이제 제2의 도약을 준비중이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인터뷰> 전승우 로토크 코리아 대표이사 {img5,L,300} “외국계 기업에… 한국인 자긍심 심었죠” “산업기기에 생산성을 높여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임입니다.” 전승우(49) 로토크 코리아 대표이사는 ‘액추에이터’에 대한 자긍심으로 꽉 차 있다. 그의 설명대로 ‘산업에 사용되면서 사람이 하지 못하는 리퀴드(Liquid)나 가스(Gas) 등의 제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액추에이터’라고 볼 때 효율성과 생산성을 끌어 올리는 발전력의 핵심부품이 되기 때문이다. 전 대표가 산업분야와 인연을 맺어 온 것은 오래됐지만 실상 한 기업의 대표로서 지나온 길은 그리 길지 않다. 경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삼미특수강㈜ 중앙연구소 기술개발부를 시작으로 4년 가량 연구·관리직을 담당했던 그는 1991년 인스트론 코리아㈜ 영업부로 뛰어든 이후 마켓의 영역을 쌓아왔다. 특히 1993년부터는 엑추에이터와 같은 기계장치를 생산하는 업체에 몸담아 왔다. “처음 영업시장으로 나왔을 땐 그야말로 실수투성이었죠. 그러다 차츰 영업은 ‘정직’이란 정공법이 최고란 걸 깨달으며 매력에 빠졌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요? 산업분야에서는 꽤 알아준다는 업체에 있었죠. 그런데 어느날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했습니다.” 2년여 전 전문 헤드헌터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그는 소위 ‘스카우트’ 형태로 자리를 옮겨왔다. 후보군 중 가장 막차를 탔던 그는 당시 내로라 하는 5~6명의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영업에서 익히 정공법이 도움이 됐다고. 본사 회장의 최종 면접시 정직하게 이력과 소신을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이 같은 본사의 선택은 곧 실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현실적 여건상 IMF 이전 만큼은 아니지만 연평균 100억원 규모의 매출과 날로 신장하는 판로 등에는 전 대표가 담당한 일익이 결코 작지 않았다. “외국계 기업에서 성공한 케이스 아니냐 하는데,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외국계 기업의 내적 분위기, 문화는 정말 다르거든요. 철저하게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요? 실력이라 표현하긴 뭐하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취업난 속에 외국계 기업을 동경하는 구직자들에 대한 그의 조언은 간단명료했지만 말투와 표정 속에 피나는 땀방울이 묻어 나왔고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이 배어 있었다.

30초 영상 미학… ‘틈새시장’ 사로잡은 마술사

‘30초, 그 이상의 가치를 위해’ 6년전 열정 하나로 버스광고 시장에 뛰어든 황기순 SNP 대표(www.sptec.net). SNP는 LCD 모니터를 이용,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기업이나 상품광고, 지역홍보, 생활정보를 TV광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시간 제공하는 LCD 버스광고 전문 기업이다. 이 회사는 그동안 얻은 광고 컨설팅의 노하우와 철저한 관리시스템으로 변화무쌍한 패러다임에 빠르게 적응, 업계에서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다. #엔지니어에서 사업가로 원래 그는 엔지니어였다. 어릴적부터 엔지니어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사업을 시작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사업가가 되기전만해도 황 대표는 LCD 모니터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에 다니며, 훗날 남들에게 인정받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다. 엔지니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황 대표가 영업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회사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금난과 판매부진을 겪으면서부터다. 회사를 살리자는 생각에 전 직원이 영업에 나섰고, 그도 자연스럽게 영업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영업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엔지니어가 무슨 영업이냐며 탐탁치가 않았다고 한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팔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자기 자신도 의아스러웠지만 용기를 냈다. 이런 용기는 곧 자신감을 가졌왔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재치까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그의 영업 전략은 곧 결실로 이어졌다. 불과 수개월만에 300여업체와 납품 계약을 맺으면서 자신도 놀랐다. 황 대표 스스로도 그때 ‘또다른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가 그를 창업에 이르게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01년 시스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전국 LCD 모니터 총판과 차량용 LCD TV를 판매했다. 그러나 벤처기업이었던 생산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1년반만에 회사를 정리했다. #고정관념을 깨라 시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2003년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그동안의 기술력을 집약한 전자액자인 매직프레임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 제품은 TV를 끄면 사진 액자로 자동으로 전환되는데다 DVD, MP3, 오디오,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갖춘 다기능 디지털 액자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황 대표는 이 제품을 들고 웨딩샵 등 관련 분야의 업체에 직접 발로 뛰며 영업했다. 아이디어도 괜찮고, 기능도 좋아 판매에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 하나만으로는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이디어나 제품 자체가 생소하다보니까 판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들 제품의 아이디어나 기술력은 인정하면서도 상업성에서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연이 기회로 우연한 기회에 성남 지역 시내 버스 100여대에 매직프레임을 달았다. 제품 생산과 관련된 OEM도 체결하고 대리점도 계약했다. 프로그램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상호도 SNP TEC로 변경했다. 그러나 잠시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이마저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버스는 진동이 심하고 불규칙한 전압 때문에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기존 업체들도 이러한 기술적 문제 때문에 버스내 동영상 광고 시장을 포기했다. 그도 제품의 성능만큼은 자신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품의 디자인에 신경쓰다보니 버스마다 구조가 달라 설치에 문제가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기존 버스 광고 업체들의 견제도 만만찮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연구에만 몰두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첫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로 황 대표는 겸손과 신중을 배웠다. 근본적인 하자 해결을 위해 꼬박 1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2004년, 무선 콘텐츠 자동 갱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버스의 모니터와 음성 안내방송은 물론, 동영상 광고, 문자서비스 등이 동시에 가능한 제품이었다. 특히 광고 내용도 30초 분량의 동영상 화면으로 구성, 일반동영상, 디지털 편집, 플레쉬 제작 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살아 숨쉬는 광고’를 만들어냈다. 본사가 있는 평택 지역 시내버스 100대에 동영상 광고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처음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버스 회사는 물론이고 광고주, 고객들까지 시내버스에서 LCD모니터로 다양한 광고나 정보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시장을 꿰뚫어보라 황 대표는 광고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같은 변화를 따라잡고 새로운 광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수시로 지역별 특성분석과 유동인구 등을 분석, 최저 비용으로 초대의 광고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 특히 가격에서의 경쟁력은 절대적이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버스 한대에 한달 평균 4만원이 채 안되는 가격을 받고 있다. 하루 평균 버스 한대에 1천명 정도가 이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어머어마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시내버스의 경우 고객 순환이 빠른데다 노출이 잘돼 반복홍보 효과와 집중 효과가 크다. 버스 이용객이 광고 효과가 높은 학생이나 주부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희망을 쏜다 황 대표는 요즘 전국을 돌며 영업을 직접 챙긴다. 이렇게 자동차로 이동하는 거리가 1년에 6만~7만㎞는 족히 된다. 주요 타깃은 지역의 대학이나 관공서. 현재 수원을 비롯해 안성, 서울, 아산, 청주, 춘천, 원주, 대구, 포항 등 현재 11개 시군에 2천200여대의 LCD동영상 광고 기계가 설치됐다. 올해안에 광주와 울산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얼마전에는 인천공항에 호텔 홍보를 위한 대형 LCD 모니터를 설치했다. 이를 계기로 호텔업계를 적극 공략한다는 전략도 가지고 있다. 조만간 전국 지사나 총판 모집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도 있다. 그는 회사 이익에만 여념하지는 않는다. 얼마전 경기지방통계청과 제휴하고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꼭 광고가 아니더라도 각 지역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나 관공서의 유익한 정보, 생활정보 등을 지역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다. 황 대표는 훗날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시간나는데로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잊지 않는다. 그는 버스광고 시장에 새로운 장을 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오늘도 바쁘게 직접 현장을 달린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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