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화산고

학원 무협물. 국내 관객들에게는 낯선 장르다. 손가락 하나 대지않고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학생과 교사들이 공중에 떠 무술을 겨룬다니. 분필이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고, 물기둥이 솟는 것은 또 어떤가. 화제의 영화 ‘화산고’가 오랜 산고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황당한 만화적 상상력이 스크린에서 어떤 모습으로 옮겨질지 진작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아왔던 터. 순제작비 48억원, 제작 기간만 1년 5개월이 걸렸다. 때는 화산 108년. 무공의 고수들만 다니는 ‘화산고(高)’가 무대. 화산고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김경수(장혁)가 전학 오면서부터. 그는 ‘기물파손’ ‘여교사 폭행죄’ 등으로 8번이나 퇴학당한 경력의 소유자. 이번엔 죽어도 졸업만은 하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타고난 공력을 지닌 그를 고수들이 몰라볼 리 없다. 검도부, 유도부에서 입단 제의가 잇따르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그는 곧 전설의 무림비서인 ‘사비망록’을 둘러싼 혈투에 휘말리는데... ‘화산고’는 그간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감상하기 힘든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재현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감독의 말을 빌면 이 영화 전체가 컴퓨터 속에 담가졌다 나왔을 정도다. 100% 디지털 작업과 조명 등을 통해 전체적으로 흰색과 검은톤(정확한 표현은 ‘다크올리브그린’이다)이 나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시대와 배경은 물론,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 없는 판타지 세계다. 컴퓨터그래픽에 힘입은 기공의 흐름과 물방울이 분사되는 장면은 쉽게 접하지 못했던 장면들. 순수 국내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현란한 와이어 액션도 ‘와호장룡’과 ‘메트릭스’에 비견될 만큼 수준급이다. 특히 물기둥을 치솟게 하는 공력을 발휘하며 주인공 장혁과 허준호가 펼치는 막판 대결은 볼거리임이 분명하다. 학교를 무대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화산고’는 사실 전형적인 무협 만화쪽에 가깝다. 심각한 상황에서 갑자기 뜨악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 한껏 무게를 잡던 김경수도 짝사랑하는 검도부 주장 ‘유채이’(신민아)만 나타나면 넋나간 표정을 짓는다. 화산의 1인자를 꿈꾸며 연신 “나 장량이야”를 외치는 김수로나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며 파리채를 들고 다니는 교감 변희봉같은조연급 연기자들의 코믹한 캐릭터도 영락없는 만화 속 인물이다. ‘개척 장르’인 만큼 다양한 실험이 시도됐다. 스토리보다 감각을 중시하는 관객들의 입맛에 맞춘 탓일까. 연방 귓가를 때리는 효과음과 화면 분할 같은 다양한 연출 기법이 혼을 쏙 빼놓는다.

<새영화>원더풀 라이프

삶을 마감한 뒤 저승에서 하나의 기억만을 지닌채 영원속으로 떠나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을 택할 것인가. 8일 개봉될 일본영화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는 동화적 설정을 담은 소품같은 영화지만 대작 못지않게 철학적 사색을 요구한다. 월요일이 되면 소도시 간이역 같은 린보 역에는 막 이승을 하직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번호표를 받고 배정된 방에 들어가면 면접관들이 수요일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해 달라고 주문한다. 선택이 끝나면 린보 역의 역무원들은 각자 선택한 순간을 토요일까지 영화로 제작해 보여준다. 이제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망각한 채 자신이 그리는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면접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 많아 고르기가 힘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통 떠올리기 싫은 기억뿐이라는 사람도 있다. 호색한 같은 웃음을 흘리며 유곽에서 여자를 산 추억을 반추하던 초로의 사내는 결국 딸을 시집보내던 날을 선택하고, 주저없이 디즈니랜드를 꼽은 여중생도 막판에는 어릴 적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귀지를 파던 때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전쟁 당시 허기에 지쳐 있다가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기억이나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시절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칠순을 넘긴 와타나베가 마지막까지 선택을 주저하자 면접관 모치즈키는 그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건넸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한다. 50년전 모치즈키가 죽기 전에 사랑을 약속한 교코가 바로 와타나베의 아내가 돼 있는 것이다. 모치즈키는 테이프로 교코의 일생을 본 뒤 50년을 미뤄온 선택에 성공해 영원으로 떠나고, 꿈 속을 헤메며 선택 의지를 보이지 않던 X세대 이세야가 수습 면접관으로 린보 역에 남는다. ‘원더풀 라이프’는 ‘애프터 라이프(After Life)’라는 영어 제목으로 미국 등지에 소개됐으며 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사후(死後)’란 제목으로 상영됐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로 낭트영화제 그랑프리, 토리노영화제 각본상, 산세바스찬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긴박감 없는 줄거리와 밋밋한 화면이 118분의 러닝타임을 길어보이게 만들지만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중 열에 일여덟은 행복한 순간을 고르기 위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민에 빠지고, 나머지 두세명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달콤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삶의 고삐를 더욱 당길 것이다.

<새영화>'와니와 준하'

영화 ‘와니와 준하’(제작 청년필름) 앞에 붙은 ‘순정영화’라는 수식어는 사실이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희선과 주진모라는 순정만화 속에서 갓 빠져나온 것 같은 가녀린 외모를 지닌 배우들을 내세워 20대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순정 만화풍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평범하지 않은 첫사랑의 아픈 사연을 간직한 26살의 애니메이터 와니(김희선)와 그녀를 사랑하는 작가 준하(주진모)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 와니와 준하는 춘천에서 함께 동거하는 사이다. 와니는 유학을 떠난 첫사랑의 연인이자 이복 동생인 영민(조승우)을 잊지 못한다. 그의 방을 열쇠로 잠가둔 채 아픈 기억을 삭이며 지내는 와니는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그녀가 과거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영민(조승우)이 돌아온다는 소식과 함께 영민을 짝사랑하던 후배 소양(촤강희)이 집으로 찾아오면서부터. 아버지가 영민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날, 또 흥분됐던 영민과의 입맞춤, 소양(최강희)과 셋이서 어울리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하나둘씩 스쳐간다. 다정다감하던 준하는 조금씩 흔들리는 와니의 변화를 눈치채고 가슴 아파한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잔잔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돼 단조로움을 덜어준다.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는 와니의 아픈 과거는 천천히 하나씩 드러난다. 앞머리와 뒷부분을 수채화 풍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점이나 흑백 사진과 몽당연필, 프라모델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이 빚어낸 깔끔한 영상이 돋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의 시선을 끝까지 붙들기에는 흡인력이 다소 달리는 편. 그나마 와니의 고교 친구들과 직장 동료 등 주변 인물들이 순정 만화에서처럼 코믹하게 그려져 있어 심심함을 달래준다. 23일 개봉.

<새영화>'GO'

재일교포 3세의 청춘을 그린 한일합작영화 ‘GO(고)’가 지난달 말부터 일본 열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데 이어 24일 한반도에 상륙한다. ‘GO’는 재일교포 3세에 대한 선입관을 통렬히 깬 영화. 원작소설을 쓴 가네시로 가즈키도 선배작가들이 지닌 무겁고 답답한 시선을 거부하고 정체성과 차별 등의 문제를 밝고 감각적으로 그려내 지난해 나오키상을 차지했다. 영화속 주인공 스기하라(한국명 이정호)는 원작자와 마찬가지로 조총련계 초-중학교를 거쳐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뒤 일본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조선 국적으로는 하와이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온 가족의 국적을 옮겼기 때문이다. 프로복서였던 아버지로부터 권투를 익힌 스기하라는 그의 콧대를 누르려는 일본인 친구들을 간단히 때려눕히고 ‘짱’으로 떠오른다. 거칠 것 없이 젊음을 불사르던 그는 친구 가토의 생일 파티장에서 일본 여학생 사쿠라이와 마주치자마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스기하라가 재일교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잊고 살다가 관계가 깊어질수록 불안감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한몸이 되기직전 스기하라가 한국인이라고 고백하자 사쿠라이는 이별을 고한다. 재일교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의 영화와 달리 스기하라는 피해와 가해의 역사나 남북의 이데올로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여자친구에게 버림을 받을까봐 국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모국인들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스기하라가 재일교포 신세대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신세대 스타 구보쓰카 요스케와 시바사키 고가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중견배우 야마자키 쓰토무와 ‘철도원’의 아내 오다케 시노부가 스기하라의 부모역을 맡았다. 김민과 명계남도 각각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얼굴을 내밀어 한일합작영화의 의의를 살렸다.

<새영화>엔젤 아이즈

성큼 다가온 추위로 가슴이 움츠러드는 요즘, 진지한 멜로 영화 한 편이 관객들의 시린 가슴을 달래줄 것으로 보인다. 16일 개봉되는 ‘엔젤 아이즈’.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는 두 남녀가 운명처럼 만나 서로 상처를 보듬어주며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미국의 유명 남성 잡지 ‘FHM’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 연예인’으로 2년 연속 뽑힌 가수이자 배우 제니퍼 로페즈가 주연을 맡았다. ‘더 셀’ ‘웨딩플래너’등에서 주로 섹시한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던 그녀가 이번엔 거친 범죄자들을 가뿐히 제압하는 터프한 여경으로 나와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영화는 시카고의 여자 경찰관인 샤론(제니퍼 로페즈)이 교통사고를 당한 ‘누군가’의 의식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그로부터 1년 뒤. 샤론은 용의자를 쫓던 중 범인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놓이는데 이 때 항상 그녀 옆을 떠돌던 정체 모를 남자 ‘캐치’가 나타나 샤론의 목숨을 구한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한 전력때문에 가족들의 외면 속에 혼자 살던 샤론, 자동차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뒤 충격으로 자신의 실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낡은 아파트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캐치.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사랑에 빠지고 서로 위로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얼마 뒤 샤론은 가끔 이상행동을 보이던 캐치가 1년전 자신이 조사했던 교통사고의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병속에 담긴 편지’의 루이스 만도키 감독은 큰 특색없는 줄거리를 가지고도 멜로와 스릴러를 적당히 섞어놓으며 솜씨좋게 요리해냈다. 캐치의 과거를 알게된 샤론은 상처를 치료하려하지만 그녀의 성급한 시도는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고, 둘 사이는 멀어진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또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을 찬찬히, 설득력있게 그린다.

<새영화>북경 자전거

중국의 도시를 처음 찾는 사람은 거리를 메운 엄청난 자전거의 물결에 놀라게 된다. 한손으로 치맛자락을 핸들과 함께 쥔 채 페달을 밟는 아가씨들, 자전거의 몇배나 되는 높이의 짐을 실은 배달원, 넥타이를 휘날리며 출근길을 서두르는 화이트 칼라 직장인… 중국 제6세대 감독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왕샤오솨이(王小帥)가 중국 도시의 상징이 돼온 자전거를 영화의 화두로 삼은 것은 여러모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는 ‘북경 자전거’로 올해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곰상)을 거머쥔데 이어 전주영화제에서도 관객들의 갈채를 독차지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17살 소년 구웨이는 자전거 퀵서비스 회사에 취직해 신제품 실버 자전거를 대여받는다. 열심히 일해 자전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돈도 모을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베이징 거리를 누빈다. 자전거는 구웨이의 전재산이자 생계수단이자 장래의 희망이다. 그러나 자전거 대여비를 거의 갚았을 무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진다. 고급 사우나에서 의뢰인을 찾다가 나와보니 자전거가 없어진 것이다. 회사에서 쫓겨난 구웨이는 자전거를 찾기 위해 베이징 시내를 헤매다가 같은 또래의 고교생 지안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안은 집에서 훔쳐낸 돈으로 중고시장에서 구웨이의 자전거를 샀던 것. 구웨이는 지안이 안보는 틈을 타 자전거를 되찾지만 지안의 친구들에게 뭇매를 맞고 도로 빼앗긴다. 여학생과 데이트를 즐기려면 멋진 자전거가 필수여서 지안 역시 구웨이 못지않게 자전거를 향한 애착이 절실하다. 여러 차례의 실랑이 끝에 구웨이와 지안은 하루씩 자전거를 번갈아 타기로 한다. 베이징 청소년들에게 자전거는 ‘욕망으로 가는 전차’이다. 구웨이와 지안은 개방정책의 산물인 도심의 빌딩 숲 대신 문화혁명의 유산인 뒷골목의 낡은 가옥을 누비며 베이징의 단면을 보여준다. ‘북경 자전거’의 가장 큰 매력은 추이린(崔林·구웨이)과 리빈(李濱·지안)의 풋풋한 마스크와 자연스런 연기. 극도로 절제된 대사 때문에 답답해할 관객도 있겠지만 유리알처럼 투명한 이들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0일개봉.

<새영화>시크릿 러브

한국 관객에게는 낯선 스위스의 영화 한편을 모처럼 만날 기회가 찾아온다. 10일 개봉될 ‘시크릿 러브(Secret Love)’는 청각장애인 수녀와 소매치기의 따뜻한 사랑을 그린 이야기. 제목이 풍겨내는 묘한 유혹에 빠져 ‘엉뚱한’ 기대를 품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열에 일곱, 여덟은 후회할 게 뻔하다. 주인공 안토니아는 20세가 되자 수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침묵에 갇혀 사는 수녀원 생활이 딱 맞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수녀들 틈에서 혼자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서있는 시간은 너무 외로웠다. 그도 수화로 노래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 하느님께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운명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수녀원의 규율에 따라 노숙자 숙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부터. 안토니아는 리투아니아에서 흘러들어온 소매치기 마카스가 말을 못해 곤란을 겪자 친절하게 도움을 준다. 마카스는 금세 안토니아의 따뜻함과 청순함에 반하지만 자신의 정체와 상대의 신분 때문에 주저하고, 안토니아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갈등에 빠진다. 안토니아는 과연 수녀복을 벗어던지고 마카스에게 몸을 던질 것인가. 사랑의 결실은 이뤄지지 않지만 안토니아는 꿈을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라스 오테르스테드와 에마뉘엘 라보릿은 실제로 청각장애를 지닌 배우. 이들은 각각 스웨덴과 프랑스 출신이어서 통역자가 필요했으나 서로 상대방의 ‘침묵의 소리’를 알아 듣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영화 속에서는 세계공용수화를 쓴다). 수화를 모르는 관객들도 둘의 그윽한 눈빛이나 표정을 보면 자막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감정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소극장 연극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처럼 주변 등장인물이 적고 배경이 단조로와 재미는 적다.

<새영화>방콕 데인저러스

부산국제영화제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었던 태국영화들이 극장가에 대거 상륙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99년과 지난해 각각 흥행 1위를 차지한 ‘낭낙’과 ‘철의 여인들’, 지난 7월 부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차지한 ‘티어스 오브 블랙 타이거’ 등 10여편이 이미 수입돼 개봉 시기를 고르고 있다. 먼저 태국영화 ‘충무로 입성 1호’로 기록될 ‘방콕 데인저러스’(Bangkok Dangerous)는 22일 간판을 내건다. 지난 7월 ‘티어스 오브 블랙 타이거’와 함께 부천을 찾았으며 지난해 토론토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받았다. 주인공 콩은 고독한 킬러. 어릴 때부터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지녀 따돌림을 받고 자라다가 킬러인 조로부터 사격솜씨를 인정받아 조와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된다. 콩은 약국에서 일하는 폰의 순수한 모습에 이끌려 서로 가까워지는데 공원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으며 콩의 정체가 드러나자 폰은 그를 멀리하려고 애쓴다. 한편 조는 애인인 밤무대 댄서 아움이 조직폭력배로부터 강간당하자 복수에 나섰으나 죽음을 맞고 아움마저도 무참히 살해된다. 콩은 폰에게 편지를 남긴 뒤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마피아의 아지트로 향하고 콩의 죽음을 예감한 폰은 그를 만나기 위해 집을 뛰쳐나온다. 옥시드 팽과 대니 팽 쌍둥이 형제는 지난해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이 영화로 태국비평가협회상 6개부문을 휩쓸며 ‘태국의 우위썬(吳宇森) 감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검붉은 피가 화장실 타일 바닥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시작 타이틀이나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고 튀어나오는 장면 등은 확실히 우위썬의 비장미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총구에서 뿜어져나온 원이 점점 커지다가 장면이 바뀌는 대목을 비롯해 광각렌즈촬영, 스텝 프린팅(저속촬영후 정상속도로 프린트하는 기법), 핸드 헬드(들고 찍기)등을 동원한 화면을 보면 왕자웨이(王家衛)에 가깝다. 비트 강한 금속성 배경음악, 뮤직비디오를 방불케 하는 빠른 장면 전환, 극도로 절제된 대사, 방콕 홍등가의 오색 불빛과 암흑가 흑백풍 조명의 대비 등은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고독한 킬러의 내면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새영화>봄날은 간다

요즘은 판타지로 포장된 사랑 이야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다룬 ‘현실밀착형’ 멜로 영화들이 환영받는 분위기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그랬고,‘하루’ ‘선물’ ‘불후의 명작’등도 비슷한 범주에 있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은 한가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일상에 관한 지나친 강박관념 때문에 단순하게 일상의 에피소드만 나열하기가 쉬운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내 얘기야’라고 맞장구치지만 극장문을 나서서까지 여운과 감흥을 느낄 수 없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 ‘봄날은 간다’는 좀 다르다. 남녀의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을 정말 그럴듯하게, 유머와 위트를 섞어 풀어내면서도 사랑과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력도 빼놓지 않는다. 다가설 듯 말듯 망설이는 사랑을 다뤘던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감독은 이번엔 불같은 사랑을 택했다. 격정적인 만큼 후유증도 큰 사랑이다. 이혼 경력이 있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 PD 은수(이영애)와 26살의 녹음기사 상우(유지태)가 주인공.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프로그램의 아나운서 은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소리채집을 위해 대나무숲, 강가 등을 여행하면서 가까워지고, 은수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상우는 불 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이란 말 앞에서 의외로 쉽게 삐걱댄다.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힐 수 있느냐’고 묻던 은수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상우가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이후부터 그녀의 태도는 급변한다. “헤어져”라고 야멸찬 말을 내뱉는 은수에게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다. 다른 한 축에는 집 나간 남편을 매일같이 기다리는 치매 걸린 상우의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젊은 시절 남편의 모습만 기억한다. 실연의 상처에 허덕이던 상우는 마지막 순간 “여자와 버스는 떠난 다음 잡지 않는 거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간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다. 어린 상우의 불같은 사랑과 할머니의 남편의 사랑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평생 잊지못할 것 같던 사랑의 아픔도 긴 인생에서 보면 작은 흠집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누구나 가장 행복했고 아름다운 순간인 인생의 ‘봄날’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고, 인생이 아니냐고 감독은 말한다. 이영애와 유지태의 실감나는 연기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도 또 쉽게 그 사랑을 잊을 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여주인공 ‘은수’역을 맡은 이영애는 그동안 작품 가운데 가장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밑에서 찍은 대나무 숲과 고요한 산사의 풍경 등 한 컷 한 컷 공들여찍은 미려한 영상과 정선 아우라지 물소리, 보리밭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도 감상할 수 있다.

<새영화>스파이더 게임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지성파 흑인배우의 표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모건 프리먼이 4년 만에 알렉스 크로스 박사로 돌아왔다. 18일 개봉될 ‘스파이더 게임’(원제 Along Came a Spider)은 97년 ‘키스 더걸’의 속편 격으로 형사와 범죄자의 심리게임을 담은 정통 수사물. 전편의 연쇄살인범에 이어 이번에는 린드버그 신드롬에 빠진 유괴범이 알렉스 크로스 박사와 맞대결을 벌인다. 린드버그 신드롬이란 비행기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이 유괴당해 유명해졌던 것처럼 이름난 인물이나 그의 가족을 납치해 언론의 각광을 받으려는 범죄심리를 일컫는 말. 악역 전문배우 마이클 윈콧이 유괴범 게리 손지로 등장해 최고의 납치를 꿈꾼다. 미국 워싱턴 D.C 경찰국의 크로스 박사는 범죄심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강간범의 심리수사에 착수했다가 동료 여형사가 숨지자 자신의 실수로 여겨 한동안 칩거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상원의원의 딸 메건 로즈를 납치한 손지가 전화를 걸어 자신을 수사해달라고 요청한다. 로즈를 미끼로 삼아 그의 남자 친구인 러시아 대통령의 아들을 납치하려는손지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로스 박사의 대결이 불을 뿜는 가운데 누군가의 개입으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모건 프리먼의 노련한 형사연기는 전편과 함께 ‘아웃 브레이크’나 ‘세븐’ 등을 통해 익히 알려진 터이고 마이클 윈콧의 성격연기도 일품이지만 크로스의 새로운 파트너 제시카 플래니건으로 등장한 모니카 포터의 연기는 다소 역부족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뉴질랜드 출신 감독인 리 타마호리의 독특한 색채가 전혀화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 96년 서부극 풍의 갱스터 영화 ‘머홀랜드 폴스’로 할리우드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그는 관객과 평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수사물을 만드는 데 그쳤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는 영화가의 통설은 이제 ‘언터처블(untouchable)’의신화로 굳어진 것일까.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