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2만불 시대로/ 경기중기청 공동 기획

Health Up 가랑비가 축축하게 내리던 지난 4일. 세계적 기업으로의 도약을 선포하고 2달여전 서울 한강에서 선상파티를 개최했던 모투스를 다시 찾았다. 분당의 협력업체를 만나고 막 도착한 모투스의 신관식 사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활력이 넘쳐보였다. 그동안의 거처를 물으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신 사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단의 체육부장관이 한국 스포츠업체를 시찰하려고 합니다. 만날 용의가 있으면 스케줄을 잡아 주세요.” 문화관광부의 이재복 사무관이었다. 스포츠산업에 관심이 많은 수단의 체육부장관 일행이 오는 16~20일 한국을 방문하는데 모투스를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모투스가 기술한국의 위상을 높이며 국내 휘트니스제조 분야의 대표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단적인 예 하나다. 헬스기구 최고봉, 세계인 ‘몸짱 만든다’ 세계적 기업으로의 도약을 선포하고 2달여전 서울 한강에서 선상파티를 개최했던 모투스를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지난 4일 다시 찾았다.¶분당의 협력업체를 만나고 막 도착한 모투스의 신관식 사장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활력이 넘쳐보였다.¶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신 사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수단의 체육부장관이 한국 스포츠업체를 시찰하려고 합니다. 만날 용의가 있으면 스케줄을 잡아 주세요.”¶문화관광부의 이재복 사무관이었다. 스포츠산업에 관심이 많은 수단의 체육부장관 일행이 오는 16~20일 한국을 방문하는데 모투스를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모투스가 기술한국의 위상을 높이며 국내 휘트니스제조 분야의 대표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신관식 사장은 9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유산소 운동기구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국내는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운동에 관한 국민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지만 ‘생활체육’의 인식은 매우 희박했던 때이다. 신 사장은 88부터 3년여 동안 운영하던 재활용 운동기구 제조업체를 접고 91년 선진국의 스포츠산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여행길을 마친 그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분명히 머지않아 휘트니스 산업은 뜬다.” 신 사장은 무작정 유산소 운동기구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체기술력이 없는 신 사장이 세계 유수 업체들의 기술력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또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다보니 해외업체의 납품가 인상, 부품공급 중단 등의 횡포는 날로 더해졌다. 결국 그는 국내 토종 브랜드를 앞세워 세계무대에 당당히 진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여러 전문가를 찾아 열심히 발품을 팔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몇개월이 흘르던 93년말 신 사장은 황해웅 현 한국기계연구원장과 계양전기의 전 박남식 사장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명쾌한 해답을 찾았다. 황 원장이 ‘롤러가공방법’ 자료를 제공했고 박 사장은 설계에서부터 기계제작까지 총괄지휘하며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모투스의 지난해 수출실적은 65만달러에 그쳤다. 하지만 매출은 90억, 중소기업에서는 보기 드물게 12.6% 순이익을 달성했다. 또 국내 시장 점유율도 15%로 단연 1위를 차지했다. 수출규모면으로 볼때 지난해 실적은 저조한 편이다. 하지만 이는 신 사장의 깐깐한 경영 철학때문이다. 지난해말 세계 4위의 굴지 기업인 미국의 스타트렉이 부사장과 임원, 동남아담당 4명이 모투스를 방문했다. “‘한국에 이 처럼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회사를 보고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스타트렉의 인도 해외수출 물류기지를 제안했어요.” 그러나 모투스의 신관식 사장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독자 브랜드와 독자기술로 세계 유수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다. 또한 한번 책정된 제품가격은 고집스럽게 고수한다. 결코 밀어내기식 판매는 하지 않는다. “한번 협상에서 가격을 다운시키면 계속 내려야 하죠. 초기의 가격을 고집하지 못하면 손실이 클 뿐더러 채산성을 맞추다보면 자연스럽게 품질은 떨어지지요.” 기술력 하나만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기 때문에 이 같은 자신감도 나올 수 있다. 모투스의 제품은 클럽용시장에서 유수의 외산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 개발과 최고 품질을 지향하는 모투스의 정신이 뒷 바침했기에 가능했다. 사후봉사에 남다른 정성을 쏟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스패인의 인터내셔널사에 6만달러어치의 제품을 납품했는데 얼마 후 인터내셔널사의 바이어에게 제품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메일 한통이 날라왔어요” 신 사장은 제품의 하자를 직감하고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임원들과 어떻게 대응할 지 고심하던 그는 곧바로 연구원과 해외영업팀장으로 구성된 A/S팀을 현지에 급파했다. 며칠 후 현지에 도착한 A/S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장님, 인터내셔널사에 가보니 제품에 하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제품의 작동 미숙입니다” 영어실력이 모자란 스패인 바이어가 작동방법을 잘 못 전해 빚어진 사태였던 것이다.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했던 실수였다. 인터내셔널사는 단숨에 스페인까지 A/S팀을 보내온 모투스의 철저한 사후관리와 고객서비스에 감동을 받았고 현재는 ‘파트너’로서 모투스의 제품을 유럽에 알리고 있다. 세계 러닝머신 시장은 라이프피트니스, 사이벡스, 프리코, 테크노짐 등 미국과 유럽업체들이 양분하고 있다. 이 처럼 축적된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무장한 세계 공룡 기업들과 모투스가 경쟁하기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신 사장은 모투스가 세계 3대 메이저 업체로 성장하기 위서는 연구개발(R&D)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카이스트, 생산기술연구원, 포항공대 등 산학연을 연계한 개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특성상 R&D인력과 연구비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이다. KAIST와 산학협력을 통해 국내 유일하게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가정용 런닝머신 ‘KAIST 710T’를 개발했으며 2월부터는 고속철도 시스템적용을 총괄했던 정경력 박사와 올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제품개발을 진행중이다. “정부의 지원을 알차게 활용하면 중소기업에게는 분명 도움이 됩니다. 지원비가 적다고 투정부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도움을 받아 기술개발에 노력해야죠.” 신 사장은 ‘신상품개발=경쟁력’이라는 경영 이념으로 제품의 고급·첨단화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올 8월께 부터는 KT와 연계한 홈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국내의 IT기반을 활용한 E-Health 개발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인터뷰/ 신관식 사장 “투명경영, 나눔경영을 실천한 것이 현재의 모투스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모투스의 신관식 사장은 휘트니스 제조업계 국내 시장점유율과 고객인지도면에서 단연 1위의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 이 같이 자신있게 밝혔다. “중소기업의 경영위기는 수 없이 찾아온다. 365일 위기에 놓여 있어 순간의 방심은 곧 사업의 성패로 직결된다.” 신 사장은 투명한 경영이 직원들을 한데 뭉치게 했고 이는 직원들의 주인의식 고취로 이어져 내부 조직역량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수 직원 육성에 가장 열정적이다. 신 사장은 “세계적 기업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항상 최고를 지향해야 한다”며 “타부서 업무를 6개월간 습득케 하는 선순환시스템과 전문 컨설팅사를 통한 세부 교육을 통해 최고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항상 업계 최고 대우를 보장해 주는가 하면 2002년 하반기부터는 주5일 근무제를 채택하는 등 사원 복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신관식 사장은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제품을 개발해 운동과 건강의 통합서비스 제공을 실천하겠다“며 “꾸준한 R&D 투자와 고객 만족을 실천해 항상 고객 곁에 가까이 있는 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겠다”고 말했다.

가자! 2만불 시대로/신성전자통신

세계 혼스피커 시장의 ‘지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진 기업’ ‘해외규격 인증 제조기’ ‘기술집약적 기업’ ‘수요자가 알아서 찾는 기업’…자체 기술력으로 혼스피커와 전자식 안정기를 개발해 미국의 유명 음향기기업체인 아트라사운드를 넘어 미 국방성에까지 ‘메이드인 코리아’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는 신성전자통신㈜(대표 김상훈)에 따라 붙은 형형색색의 수식어들이다. 끊임없는 기술개발 노력과 끈질긴 생명력, 정보화로 무장하고 미국, 일본의 초일류 기업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세계시장을 무대로 외유(外遊)하고 있는 신성전자통신. 이처럼 신성전자통신은 20여년 이상 우리나라 수출 금자탑의 주춧돌 역할을 하며 기술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현재진행형 기업이다. 지난 1984년 한상전자를 퇴사하고 봉제인형 제조업체를 운영하던 김상훈 사장은 우연찮게 신성전자통신과 인연이 닿았다. 미국의 대표적 통신업체인 ATNT사에서 근무하던 선배가 전자식 안정기 개발을 권유하던 시점이였고 또 김 사장도 스피커 분야에 관심도 많았던 터 였다. 김 사장은 원래 한상전자에 근무하면서 보온병과 보온밥통을 개발해 히트를 쳤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당시 그가 개발한 보온밥통은 하루 3천대 이상 생산됐고 물량이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밥통제조 업계에서는 일대 혁명이었다. 그만큼 김 사장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봉제공장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이곳 저곳을 알아보던 그는 1978년 창업해 신성 차임벨로 유명한 신성전자를 인수할 기회를 갖게 됐다. 이후 김 사장은 1987년 회사를 인수하고 미국을 타깃으로 한 틈새시장 공략을 위해 파주의 변두리에 위치한 공장연구실 형광등 아래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품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김 사장은 1988년 전자식 형광램프 안정기를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 ATNT로부터 품질인증을 받고 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1년여 동안 비지땀을 흘리며 제품개발에 매달린 결과물이었다.¶▲¶신성전자통신은 한국전기전자통신연구소 등 3개 기관으로부터 유망중소기업으로 지정될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최근까지 획득한 UL, CSA, TUV, CE, ISO 등 해외인증 규격이 이를 대변한다. 현재 세계 굴지의 기업인 일본의 에이폰사, 미국의 윌록사, 아트라사운드사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납품하고 있으며 미국 혼스피커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미 국방성까지 신성전자통신의 스피커가 설치돼 있을 정도. 신성전자통신은 이 처럼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아트라사운드사로부터 연간 수주를 받는다. 그만큼 계획생산을 할 수 있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절약돼 1992년부터는 격주근무제를 실시하며 노사관계 안정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연간 수주를 받다보니 경영안정을 이룰 수 있었고 어음거래를 피할 수 있었다. 여기에 2~3만개의 소량 주문에 대해서는 30% 이상 납품가를 올려받아 채산성관리에도 신경을 쓸 수 있게 됐다. 신성전자통신은 1996년부터 혼스피커, 산업·교육용 스피커, PA 앰프를 생산하며 사업 영역의 다양화를 시도했다. 아트라사운드사가 김 사장에게 가벼우면서도 출력이 뛰어난 혼스피커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곧바로 바이어가 원하는 혼스피커를 만들기 위해 개발에 착수했고 진동판의 일부 부품을 일본회사에 의존해 오던 것을 3년간의 국산화 노력끝에 전자통신연구소의 도움으로 제품개발에 성공했다. 신성전자통신의 혼스피커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가벼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 소형으로 만들어졌지만 출력이 커 야외활동시 휴대 하기에 편리하다. 여기에 외장은 분체도장을 적용해 고급스러우면서 내구성이 뛰어나고 생활 방수기능이 있어 야외에서 비가 올 때 사용해도 고장이 없다는게 특징이다. 세계 굴지의 음향기기업체인 아트라사운드사가 종업원이 45명에 남짓한 신성전자통신을 찾는 이유다. 현재 신성전자통신은 혼스피커의 경우 월 4만개 이상을, 전자식 안정기는 5만개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미국 시카고 지사를 LA로 옮겨 미국시장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세계시장 석권을 노리고 있다.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원지영기자 jywon@kgib.co.kr ■인터뷰/김상훈 사장 ‘신용·품질·최고상품’ 경영 3박자 “최고 품질의 제품이 최고의 상품이라는 경영철학으로 ‘신용’ ‘품질’ ‘최고 상품개발’의 3박자를 갖춘 것이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신성전자통신의 김상훈 사장은 미국의 틈새시장을 공략, 300만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리는 알짜 기업으로 키운 저력을 이 같이 자신있게 평가했다. 이 업체의 지난해 매출액은 46억1천400만원. 이중 수출이 98%를 차지했으며 또한 미국시장의 50%를 잠식했다. 김 사장은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신념으로 10여년동안 외길을 걸어왔다”면서 “세계 방방곡곡에 신성전자통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자나깨나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은 직원들이 곧 생명력”이라고 강조하면서 “원만한 노사관계를 위해 노력한 결과 자발적 일더하기, 근로의욕고취 등으로 이어져 생산성 향상을 이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철저한 신용을 바탕으로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라고 믿는 그지만 ‘거래은행은 다변화해야하고, 어음거래는 사절해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터득한 경영철학이다. “IMF사태 당시 주 거래은행이었던 경기은행의 워크아웃으로 수출신용장을 끊었지만 네고를 진행할 수 없어 여러 은행을 돌며 발품을 파는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당좌거래가 없었고 50만달러 이상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 당시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때 만약 네고가 원활했다면 10억원 이상의 환차이익을 남겼을 것이라는 김 사장은 “철저하게 최고의 품질로 승부하고 현금으로 거래하는 것만이 중소기업이 살 길”이라고 고 김사장은 덧붙였다. 김 사장은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차별화된 전략을 바탕으로 신기술 개발에 앞장서는 신성전자통신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가자! 2만불 시대로/(주)서울전기산업

초경량 휴대용 전기스쿠터 “세계시장이 좁다” ㈜서울전기산업(대표 정인수)은 휴대용 전기스쿠터를 생산하는 업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전기스쿠터는 보통 스쿠터와는 다르게 충전식 리튬이온 배터리를 이용해 전기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1994년 창업과 함께 생산을 시작한 이 전기스쿠터는 현재 국내시장점유율 50~60%를 차지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국내 1위의 기업일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서울전기산업이 가장 인기 끄는 지역은 유럽과 일본, 미국 등. 그동안 이 분야는 미국과 유럽이 우위를 보였으나 서울전기산업은 6.5kg의 무게로 동급대비 최경량 스쿠터를 개발해 세계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은 크게 두가지 모델로 나뉜다. 첫째는 전기 충전식 배터리를 이용한 승용물이고 둘째는 산업용 감·변속기이다. 전기스쿠터는 소음이 적고 유지비용이 저렴해 경제적이다. 또 친환경적인 제품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해 미국과 유럽에서는 경기장이나 공장내 순찰용, 시설물관리용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업용 동력 전달장치인 누유 방지형 감속기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수자원공사에 납품할 정도다. 獨 선진기술 접목 자체개발 성공 세계가 주목 ‘1인승 자동차’ 결실 터키 수출계약·中 시장도 ‘노크’ 동력 전달장치분야는 산업의 근간이며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국내 실정은 너무 열악하기 그지 없었어요.” 정인수 사장은 외국과 국내의 동력 전달장치분야를 비교해 보니 국내 사정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느끼고 모터 감·변속기 기술개발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지난 1994년 서울전기산업을 창업하고 모터 감·변속기의 기술개발에 주력했다. 정 사장은 저가로는 값싼 인력이 풍부한 개발도상국과의 가격경쟁력에서 밀린다고 판단하고 철저하게 고급화를 추구했다. 여기에 1989~1993년 4년간 독일의 SEW유로드라이버사에서 기술영업팀장을 근무했을 당시 습득한 유럽 선진기술을 접목시켰다. 1년여동안 기술개발에 매달린 끝에 1995년 어린이용 전동차 11종(오토바이, 3륜차, 자동차 개발) 및 교육용 신호등 일체를 독자기술로 개발하고 전국의 어린이 교통공원과 유치원에 제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또한 어린이용 자동차모델에 동전투입장치를 부착하고 상업용으로도 시판했다. 소자본으로 벌일 수 있는 어린이 교통공원 사업이 전망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정 사장의 재치와 사업수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국내 드라이빙 시스템 분야에서 서울전기산업은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기술경쟁력이 뛰어납니다. 국내에서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고 세계시장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죠.” 정 사장은 독일의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자체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서울전기산업은 자연히 초기단계였던 국내 전기 배터리 승용물시장에서 우위를 보이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국내에는 기술력을 뒷받침해 줄 마땅한 부품·소재업체가 없어 부품업체 관리에 어려움이 따랐다. 여기에 IMF사태가 터지면서 3억8천만원 규모의 크고 작은 어음결제가 줄을 이었고 서울전기산업은 폐업하느냐 소생하느냐의 갈림길에 놓였다. “창업초기 3년간은 정말 잘나가는 기업이었죠. 전직원 4명중 3명의 자녀를 회사에서 대학등록금까지 지급해줄 정도였으니까요.” 정 사장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내수시장 위주에서 수출시장으로 눈을 돌렸고 산업용 감·변속기에서 생활·레저용품으로 생산제품을 다양화했다. 결국 정 사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생활·레저용품인 전기스쿠터가 호응을 얻었고 수출이 매출액의 80%를 넘어섰다. 정사장은 기업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기술력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매출액 대비 R&D비중을 꾸준히 늘리며 신제품 개발에 주력한다. 올 7~8월께는 지난 1996년부터 연구개발의 결실인 전기 배터리 1인승 자동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정 사장은 1회 충전으로 300km를 주행하고 시속 80km 까지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1인승 자동차 출시를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이미 터키의 한 업체와 월 70만~80만달러정도의 수출계약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또 중국시장에 대한 공략 채비도 끝마친 상태다. 지난해 11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지사화사업에 참여, 직원 2명을 이미 중국에 파견시켜 중국시장조사를 벌이는가 하면 현지 특판 및 전문판매딜러를 물색하고 있다. 서울전기산업 임직원들은 기술우위를 발판 삼아 올해에는 세계적인 수출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정 사장은 회의할 때 직원들이 모든 생각을 거리낌없이 털어놓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사원들이 갖고 있는 발상을 최대한 집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건성으로 참여하는 회의가 아니라 실무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회의를 전개한다. 여기에서 가장 최선의 전략을 짜내는 것이다. 서울전기산업이야말로 사원들의 지혜가 합쳐진 작지만 강한 기업이다. ■인터뷰/정인수 사장 “보조교통수단 활성화…수출시장 다변화 맞춰 최고의 제품생산 공략” “외부 환경변화에 맞게 끊임없이 변신해 경쟁사와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 시장을 공략하겠다.” ㈜서울전기산업의 정인수 사장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기업모토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소비자가 원하는, 소비자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정 사장은 유럽의 특수모터 제조업체 근무 당시 우연한 기회에 국내외 전기 배터리 분야를 비교하게 됐고 국내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창업을 결심했다. 특히 국내 대중교통수단 활성화를 위한 보조교통수단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정 사장은 “안산의 경우 안산·정왕역 등 4호선 전철역과 공단을 이어주는 교통수단의 부족으로 대부분 승용차를 타지 않고 출퇴근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선진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연계 교통수단 개발에 적극 나서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보조 교통수단의 대안으로 매연과 소음이 없는 전기 스쿠터가 적격”이라면서 “대부분의 제품이 레포츠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빠른 시일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신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자체 브랜드인 유로모터스의 최대 강점은 컨트롤러와 디자인이라고 꼽은 정 사장은 “자전거 문화가 발달한 유럽, 미국 등지에서는 전기 스쿠터 종류의 신제품이 나오면 없어서 못팔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 사장은 “세계시장 석권을 위해 신제품 개발을 통한 수출확대에 주력할 것”이라며 “수출시장 다변화와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가자! 2만불 시대로/Fidelix

"세계 무선네트워크 주도 ‘앙팡테리블’ ‘한국 R&D 산업의 리더’ ‘벤처캐피탈이 인정하는 모범 기업’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기업’. 창업 3년만에 17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벤처업계의 ‘앙팡테리블’로 부상한 ㈜피델릭스(대표 박찬범)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대기업 못지 않은 기술력으로 우리나라 수출 금자탑의 주춧돌 역할을 다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많이 있다. 중소기업중 대표적인 업체가 피델릭스이다. 대기업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끈질긴 생존력, 그리고 원천 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세계시장에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승부근성·패기 무장 ‘4총사 뭉쳤다’ “멋진 제품을 개발하자,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 우리들만의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조해보자.” 박찬범 사장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지난 2000년 11월 피델릭스를 창업했다. 당시 인력은 고작 4명. 하지만 각 분야 배터랑들로 똘똘 뭉쳤기에 피델릭스가 ‘CDMA 업계의 기린아’로 성장한 것은 예견된 일이다. 우선 삼성전자 개발팀의 CDMA 시스템 연구원 출신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CDMA 전문가인 박 사장이 피델릭스의 선두에 나서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피델릭스의 양팔 역할을 대학 동기이자 삼성과 LG에서 관련 분야 연구원 출신인 양정훈 박사와 허성욱 현기술연구소 이사가 맡았고 고교 동창인 김영기 현 부사장이 대우에서의 해외영업팀 근무경력을 바탕으로 시장공략을 책임지기로 의기투합했다.그렇게 피델릭스의 4총사는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꿈의 돛을 달고 성공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승부근성과 패기를 무기삼아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 머무는 등 고객을 잡기 위해 악착같이 발품을 팔았다. 결국 이들은 회사설립 3년만인 지난해 3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하며 세계속의 R&D기업으로 거듭났다. ■기술·잠재성장력으로 자금위기 극복 피델릭스의 창업자금은 5천만원. “회사를 새로 창업한다면 연초에 할꺼에요. 연말에 회사를 창업하다보니 한달 일주인만에 회계연도 적자로 시작되더라구요. 당영히 금융권 거래에 문제가 발생했지요.” 초기 자금난으로 기술개발에 어려움이 따랐던 피델릭스는 2001년 3월 기보로부터 4억9천800억원의 창업자금을 대출받았고 제품개발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IT산업이 거품논쟁에 휩싸였고 벤처 버블까지 꺼지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침체를 거듭했다. 당시 창업한 피델릭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피델릭스는 그 와중에서도 거액의 자금을 성공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다. 회사의 뛰어난 기술력과 잠재성장 가능성으로 무장한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이 이같은 걱정을 다 털게끔 한 것이다. 2001년 9월에는 ㈜한국기술투자와 동원창업투자㈜ 등 국내 벤처캐피탈이 잇따라 투자했고 2003년 5월에는 ㈜삼성벤처투자의 기금을 유치했다. 현재 피델릭스의 자본금은 8억9천800만원이며 최대주주인 박 사장이 30.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성공발판은 R&D분야 집중투자 회사를 설립한지 4년이 채 되지 않은 피델릭스가 단시간 내에 성공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탁월한 기술개발 능력이다. 피델릭스의 총 직원 수는 40명. 이 가운데 27명이 평균 7∼8년 이상 CDMA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을 정도. 그만큼 연구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70억원의 매출 중 수출이 99%를 차지할 정도로 해외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연구개발 덕택이었다. 피델릭스는 CDMA 통신 시스템 및 단말분야의 핵심기술인 IS-95 A·B·C, IS-2000, WCDMA 부문에서 핵심요소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이같은 기술경쟁 우위를 기반으로 시장의 수요에 민첩하게 대응하며 시스템 및 응용 단말기 상품화에 성공했다. R&D 부문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결실로 지난 2002년에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로부터 해외규격 인증을 획득했으며 이에 대한 특허출원과 더불어 CDMA 모뎀 모듈 및 무선통신망(WLL) 전화기 개발을 완료, 본격적인 양산체제를 구축하고 세계시장 석권의 발판을 만들었다. ■해외서도 알아주는 업계 ‘최고봉’ 피델릭스는 처음부터 단말기를 만들지 않았다. 박 사장은 CDMA 모듈이 핸드폰처럼 메이저 시장은 아니지만 중소기업 아이템으로는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휴대폰의 경우 인기모델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재고량이 많이 발생한다. 그만큼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옥죌 수 있다. 하지만 CDMA 모듈은 수요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금압박 부담을 덜수 있었다. 철저한 아웃소싱 전략도 피델릭스의 국제경쟁력 가운데 하나다. 피델릭스는 생산라인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다. 전량 아웃소싱을 통해 제품을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고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다. 이것만으로도 수출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다. 피델릭스가 처음으로 손을 댄 것은 ‘첨단 CDMA 모듈’. 무선통신을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이 모두 집약된 말하자면 ‘만능 무선통신 부품’이다. 이 모듈은 휴대폰을 비롯해 무선 PDA, 웹패드, 노트북 등 모든 정보기기에 들어간다. 또 정보기기에 탑재되는 순간 그 정보기기는 통신기기로 탈바꿈하게 한다. “다른 업체, 특히 대기업이 잘하고 있는 시장에 뛰어 들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시장여건과 맞아 떨어져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gib.co.kr ■인터뷰/박찬범사장 “300만불 수출탑… 이제부터 시작” “고객이 만족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피델릭스의 박찬범 사장(37)은 3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할 수 있는 알짜기업으로 키운 저력을 피델릭스의 3대 정신(신뢰받을 수 있는 개인, 신뢰받을 수 있는 회사, 신뢰받을 수 있는 제품)으로 대신했다. 그는 “신뢰라는 것은 내부적인 것만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회사에 투자한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라며 “투명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기술 우위의 경쟁력과 신뢰, 끈임없는 노력이 피델릭스가 불과 3년여만에 기술집약적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박 사장은 ‘한번 한다’는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저돌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인간관계 있어서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따른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면서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압축했다. 그는 위기를 성공으로 연결시킨 사례로 창업초기 자금난을 들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피델릭스 정신’과 신뢰를 바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도약 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박 사장은 “고객과 종업원, 주주, 모두가 회사 발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경영으로 기업활동의 투명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앞으로 모든 종류의 컴퓨터와 통신수단, 오디오와 비디오 기기들간의 투명한 접속을 가능케 하는 무선 네트워크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자! 2만불 시대로/hanrim

"세계 전지시장 석권… 기술력 빛났다 독자적인 기술로 세계 유수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지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기업인이 있다. 담뱃갑만한 배터리 팩 하나로 2천만불 수출탑까지 거머쥐며 정보기술화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한림포스텍의 정춘길 사장(59)이 바로 그 주인공. 정 사장은 정보기술 업계의 새로운 표준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오늘도 연구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우수한 배터리 팩을 만들어 차세대 전지산업의 리딩메이커로 발돋움하고야 말겠다”는 정 사장의 야심찬 포부에서 성공시대 예감을 느낀다. ■‘관리·시스템·노하우’ 회사 원동력 3박자 화학을 전공하고 국립공원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정 사장에게 어느날 친한 선배가 찾아왔다. “야 이런것이 다 있더라. 조그만 것이 복잡하고 어렵더라. 그런데 모든 동력의 근간이란다.” 정 사장은 선배가 건네준 배터리가 마냥 신기했다. 이후 ‘최소공간의 최대용량의 배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지난 92년 10월 정 사장은 창업을 결심하고 직원 20여명과 서울 변두리에 한림포스텍이란 배터리 팩 연구개발(R&D)기업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이듬해 93년 수원 장안구 파장동의 현 사옥으로 이전한다. 설비를 갖추고 생산라인을 가동시켜 완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R&D기업에서 제조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마친 시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품개발에 전념했지요. 결국 1년여의 연구끝에 제품개발을 완료했죠.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94년 3월부터는 삼성과 현대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제품을 납품하게 됐어요.” 한림포스텍은 올해를 재도약의 원년으로 삼고 대대적인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2년전부터 자체기술력으로 개발한 무선충전시스템을 3·4분기에 출시, 세계 전지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먹이사슬의 맨 꼭데기에 있는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은 강하다. 생존하기 위해 이빨이 강해졌기 때문이죠.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강자만이 살아남는 기업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이테크놀로지를 갖추어야 하죠.” 정 사장은 매년 매출액의 8% 가량을 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한다. 파워풀한 기술력은 기업의 원동력이요, 곧 경쟁력이란 믿음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관리, 시스템, 노하우의 3박자 리듬을 탄다. 연구원을 분야별로 베스트화시켜 인력을 육성한다. 또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철저하게 자기책임제를 고집한다. 그리고 보유한 지식은 항상 자랑하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직원간 지식전파를 위해서다 ■“전문성이 경쟁력” 고급인력양성에 주력 “한림포스텍은 이미 창업, 양산, 성숙단계를 넘어 숙성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고급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인력양성과 관리에 주력하고 있어요.” 한림포스텍은 ‘배터리 사관학교’로 불릴 만큼 우수인력을 배출하기로도 유명하다. 정 사장이 직원들에게 반복하듯이 주문하고 묻는 말이 있다. “너희들 직업이 뭐냐. 직업과 직무를 혼돈하지 말아라. 자기특성에 맞는 직업을 가져라.” 21세기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요구한다. 따라서 기업은 다방면에 능통한 직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정 사장은 반문한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도 중요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져야 더욱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분야’, 그것이 정 사장이 말하는 직업이다. “예를 든다면 경리과 직원은 전반적인 경리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그 경리업무 중에서도 세무조정이나 절세방안 등을 가진 전문인력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 사장은 고객중심 지향과 신뢰를 강조한다. 그래서 신뢰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위해 직원들과의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는다. 94년 일시적 자금난을 겪고 있을 무렵, 정 사장은 월급지급과 원자재 구입을 놓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그는 직원과의 약속을 선택했다. “직원들 월급을 모두 주고 나니까 수입통관 절차도 밟기 힘들 정도로 자금압박을 받았죠. 그런데 직원들이 월급을 모두 제 책상위에 올려놓고 나가는 거예요.” “저를 무조건 믿고 회사를 사랑하는 직원들이 마냥 고맙고 용기도 생기더라구요” 정 사장은 당시의 파노라마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또한 정 사장은 고객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신속한 납기는 물론 파격적인 가격에 질 좋은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요.” 한림포스텍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는 이유다. ■차세대 전지산업 리더 꿈꿔 “찬스는 위기에서 오죠,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회는 우연히 온다거나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는 머피의 법칙을 강조하는 정 사장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기업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기업경영은 종합예술”이라며 “어느 한 부분만 잘한다고 기업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하모니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이론을 펼친다. 그를 통해 한림포스텍이 멀지 않아 ‘차세대 전지산업의 중심으로 우뚝 설수 있을 것’이란 강한 믿음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경영학의 거장인 피터 드러커가 ‘리더십은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림포스텍 사무실에서 2시간여에 걸쳐 만나본 정 사장에게서 강한 흡입력과 의지, 패기를 엿볼 수 있었다./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원지영기자 jywon@kgib.co.kr ■인터뷰/정춘길 사장 매출 1,500억 ‘작지만 강한 기업’ “오직(Only) 세계 최고의 전지(Battery)를 만들기 위해 한 길을 걸었기에 찬스가 생겼다.” 한림포스텍의 정춘길 사장(59)은 전지업계를 선도하며 매출액 1천500억원을 올리는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키운 저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를 넘어서 세계 전지에너지 분야의 리딩기업으로 당당히 설 것이라는 포부를 밝힌 정 사장은 “생산성 향상은 이미 평준화됐다. 기술, 연구, 신뢰성이 상호조화를 이루어야 기업이 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중소기업이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메이저급 기업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는 “100년, 200년 장수하는 기업이 되려면 전문성과 파워풀한 기술력, 고객중심의 마케팅이 필수”라면서 특히 “끊임없는 연구개발에 의한 제품개발”이 중소기업의 당면과제라고 밝혔다. 배터리는 21세기를 주도할 3대 핵심전략산업의 하나로 ‘두뇌’인 반도체, ‘눈’인 액정표시장치(LCD)와 함께 ‘심장’에 비유되고 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배터리산업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휴대형 전자정보통신기기 등에 없어서는 안될 에너지 공급원이 배터리”라면서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 기술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차세대 전지에너지 기술개발의 발판격인 무접점 휴대폰충전기를 연내 기필코 출시하겠다”면서 세계시장 석권을 위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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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 앨범’… 세계인의 추억을 담는다 ㈜칸나(대표 이상배)는 국내 문구류 시장에서 가장 손꼽히는 기업이다. 이 회사는 21세기 정보통신 그늘에 가려진 국내 제조업체 가운데 문구류의 자존심을 지키며 세계시장에 ‘코리아’와 ‘칸나’를 알리고 있다. 앨범시장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칸나는 최근들어 다양성을 요구하는 시대 변화에 부응하고 글로벌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인이 함께 쓰는 문구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25년간 한길을 걸어온 칸나의 가족들. 이들은 일류 제품만을 유혹하는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오늘도 제품 개발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1.문구류 업계와 첫인연 칸나의 이상배 사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풀뿌리로 배를 채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지난 78년 무작정 서울로의 상경을 결심한다. “배고픔을 겪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을 모르죠. 그래서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친척집에 신세를 졌죠. 아무래도 서울이 기회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문구류 제조업체인 이화산업에 입사를 하게 됐다. “너는 이 일을 해야한다는 신의 뜻인지…. 열심히 하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조건 노력했어요.” 그것이 그가 문구류업체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몇년간 열심히 돈을 모았고 틈틈이 공부도 해 야간대학에 입학했다. “새벽 5시에 아침밥을 먹고 자정에 귀가해 저녁을 먹었죠. 낮에는 배가 얼마나 고프던지 당시 120원이던 자장면 냄새가 가장 참기 힘들었어요. 잠도 하루 4~5시간으로 줄였어요.” 이 사장은 열심히 일해 사업밑천을 만들었고 취직한지 10개월후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문구류 유통업을 시작했다. #2.’98년 우여곡절 끝 칸나 인수 이 사장은 지난 98년 1월17일 계몽사 계열사인 영문고의 부도로 98년 5월1일 우여곡절 끝에 칸나를 인수했다. 당시 문구업체들은 IMF환란의 여파로 줄도산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유통업과 제조업 사이에서 갈등했다. “과연 제조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업종을 전환해서 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교차되더군요.” 이 사장은 1차산업이 없으면 한국경제는 살 수 없다는 믿음과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칸나 재건을 결심했다. 칸나 인수를 결정한 이 사장은 절차에 따르지 않았다. 칸나 가족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일궈낸 브랜드 이기에 역사속에 사라지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칸나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존 조직이 그대로 경영을 맡고 자금을 투자하는 형식으로 회사를 인수했어요.” 하지만 부도가 나자 기존 바이어들이 모두 등을 돌렸다. “모든 거래처를 찾아 다녔어요. 부도난 회사가 제품이나 만들 수 있냐는 핀잔도 많이 들었죠.” 당연히 일이 생길리 없었다. 이 사장은 일단 물건을 주고 돈은 나중에 받기로하는 등 거래처의 조건에 따랐다. 위험한 거래방식이지만 어쩔 수 없이 외상거래를 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몇번 거래가 생기는 과정에서 기존의 단골 거래처와의 거래는 물론 신규 거래처도 생겼다. #3.사면초가 위기속 새 도전 이 사장은 회사를 인수한 이듬해인 99년 8월 홍수로 재산피해를 입었다. 2002년 1월에는 불의의 화재사고로 25억원의 재산피해를 입었고 같은해 태풍 루사까지 겹쳤다. 특히 2002년 FIFA와 스포츠 마케팅에 대한 라이센싱을 체결하고 월드컵 상품화 사업을 추진했지만 제품이 팔리지 않았다. 붉은 악마 열풍 뒤에서 로열티지급, 제품제고, 기술신보의 10억대출 압박 등으로 연매출의 40%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것. 말그대로 사면초가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투자를 결심하고 대대적인 회사 시스템 개편작업을 벌였다. 전사적 자원관리(ERP) 시스템도 정부의 보조를 받아 총 1억원을 투입해 구축했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어디서 클레임이 걸리는지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어요. 어차피 회사시스템을 새로 구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투자하기로 생각했죠.” 재난과 화재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칸나는 15% 이상의 생산원가 절감효과는 물론 물류비,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4.시장 선두주자 비결은… 첫째, 프로정신을 가져야 한다. 한눈팔지 않고 자기 분야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면 길은 보인다. 칸나하면 앨범을 떠올리는 것은 25년간 한 길을 걸어왔기에 가능했다. 둘째, 노력하라 한번 마음먹은 꿈은 꼭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미루거나 포기하면 안된다. 셋째, 신용을 지켜라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항상 약속장소에 10~20분전에 나가 준비했다. 나와 알고 지내는 바이어들은 계약서나 차용증 없이도 돈을 빌려줄 뿐 아니라 외상거래도 해준다.” 넷째, 저가 공략보다는 품질이 우선 바이어들은 최고의 제품이 아니면 외면한다. 또 중국 등 개도국의 저가공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력이 겸비된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품질관리는 철저히 품질관리는 기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품질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타 업체보다 경쟁우위에 있을 수 있다.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원지영기자 jywon@kgib.co.kr ■인터뷰/이상배 사장 “연매출 70억원… 신용으로 키웠어요” “차용증을 쓰지 않아도 돈을 빌려주는 곳이 있어요” ㈜칸나의 이상배 사장(48)은 98년 화재, 태풍, 월드컵 마케팅 실패 등 봇물처럼 쏟아지는 연이은 악재로 고사위기에 처해졌지만 납품기일을 연기해 주고 반품을 받아주는 거래처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말그대로 신용이 칸나를 연매출 70억원 이상을 올리는 알짜 기업으로 키운 숨은 공신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일류상품을 만들기 위한 기술력의 향상도 중요하다고 이 사장은 덧붙였다. “자기 분야에 최고가 되려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노력해야 하죠. 그래서 우리도 디지털 대중화 바람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는 세계인이 쓰는 일류 상품을 만들기 위해 “회사 매출액의 8%정도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있다”면서 “지난 2002년부터 온-오프라인을 공존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함께 디지털 앨범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와 PC의 보급으로 앨범과 문구류 시장이 주춤하고 있다고 전제한 이 사장은 “어렵다고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신기술을 도입해 대체 분야를 개발하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미래를 위해선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온-오프라인의 브랜드 마케팅을 통해 고객에게 좀 더 친근히 다가가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가자! 2만불 시대로/동양전자 주식회사

"토종 ‘온도퓨우즈’… 외국인 ‘러브콜’ 세계 40개국 수출 ‘名品’ 인정 윤 사장의 학창시절 꿈은 화학자였다. 외우는 것보다 따지는 것이 좋아 대학 전공도 물리학을 선택했을 정도.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 “물리학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더라”는 교수님의 말에 윤 사장은 학자의 꿈을 접고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윤 사장은 이후 35년동안 사업을 하면서 배전반, 화공약품, 스위치박스 등 7가지 품목을 생산한 경험이 있다. 그만큼 여러가지 일을 해봤다는 의미지만 시련도 많이 겪었다는 뜻이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지난 1985년, 윤 사장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찾아왔다. 당시 상공부(현 산자부)가 온도퓨우즈를 권장품목으로 정하고 개발자금을 지원했던 것. 윤 사장은 고민끝에 온도퓨우즈 분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2년여간 시장조사를 거쳐 자금을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온도퓨우즈를 제조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설비투자, 해외규격인증, 인건비, 정보·기술력 부족…. 모든 것이 윤 사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은행도 동일 품목의 매출이 없다는 이유로 대출을 외면했다. 윤 사장은 할 수 없이 사채시장을 전전해야 했다. “정부의 개발자금을 지원받았던 삼주퓨우즈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어려울 수록 더욱 더 욕심이 생겼고 도전하고 싶은 오기가 발동했다.” 자금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윤 사장은 황일헌 현 전무를 만났다. 황 전무는 1981년부터 관련 제조업을 했었기에 윤 사장에게는 천군만마(千軍萬馬)나 다름없었다. 결국 윤 사장은 국내 기술로는 생산하지 못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온도퓨우즈를 지난 1987년 자체 기술로 개발·생산해 수입대체에 성공했으며 이제는 국내를 넘어 세계 각국으로 수출해 기술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인내와 끈기, 도전정신으로 무장하고 한번 시작한 것은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버텨온 윤 사장의 인간 승리의 순간이다. 인내·끈기·도전정신 ‘삼박자’ 첫째, 정부의 사업을 적극 활용하라 정부나 지자체, KOTRA의 해외전시회, 해외시장개척사업 등을 적극 활용하면 해외시장에 눈을 뜨는데 도움이 된다. “현재 미국, 대만, 일본 등 6대주 40여개국에 25종의 온도퓨우즈를 수출하고 있다. 이중 95% 이상은 KOTRA 등의 해외시장개척사업에 참여해 일궈낸 것들이다.” 둘째, 정보를 확인하라 “제품을 보고 그냥 주문하는 바이어는 없다” 해외바이어와 수출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미리 현지 KOTRA 등을 활용해 상대 업체의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사보다 뛰어난 부분을 철저하게 체크해 준비하는 것은 나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셋째, 선금을 받아라 윤 사장은 35년간 사업을 해왔지만 어음거래는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아무리 좋은 수주라도 그것이 어음거래면 포기했다. 항상 선금을 받고 수출했다. 중소기업은 자금력이 부족해서 어음부도가 발생하거나 수출대금을 떼이면 고사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윤 사장의 경영철학이다. 넷째, 발로 뛰어라 현실에 안주하는 ‘우물안 개구리’가 돼서는 안 된다. 특히 해외시장을 개척할 경우에는 사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기술을 습득하려면 직접 발로 뛰며 부딪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실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자부심을 가져라 최근 모 리서치기관에서 “제조업하는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Never”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의 품질을 인정받아 세계대열에 낄 수 있다는 것에서 제조업을 하는 사람은 희열을 느낀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각종 국제대회에 나가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이 기업 사장은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세계무대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인식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 ‘제품은 기술로 살아남는다’ 윤 사장은 IMF 환란 전까지 자금이 바닥나 3차례나 동업자를 구하려고 시도한적이 있다. 그러나 온도퓨우즈를 작은 부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열심히 하기만 하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윤 사장은 강자만이 살 수 있는 냉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주위의 싸늘한 외면속에서 그가 찾은 해답은 기술우위의 제품을 개발하는 것. 뛰어난 기술력으로 무장한 제품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생존논리를 알게 된 윤 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 나은 상품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윤 사장은 순수기술로 10여년의 연구 끝에 25종의 온도퓨우즈를 개발했고 세계적 메이커인 일본의 NEC와도 당당히 어깨를 겨룰 만큼 기술력 하나는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양전자의 온도퓨우즈는 전체 생산량의 95% 이상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으며 국내 자동차 메이커는 대부분 동양전자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어느 제품이든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보다 제품을 더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법과 원칙을 알면 세계 시장의 석권도 가능하다.” 윤 사장은 포드, GM, 피아트 등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지만 납품을 하지 못하고 있는 벤츠, BMW까지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제품개발에 오늘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원지영기자 jywon@kgib.co.kr ■인터뷰/동양전자 윤영함 사장 “세계적 수준 기술력 자부” 日 세계적 메이커 NEC와 견줄만 “제품에 문제가 생겨 클레임이 걸리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허사가 돼 버리기 때문에 항상 완벽을 기해야 한다” 동양전자의 윤영함 사장은 “시행착오는 상품의 완벽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제품에 하지가 발생하면 그동안 쌍인 회사 이미지는 물론 신뢰까지 잃게 된다”면서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동양전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자체 생산설비를 통해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퍼펙트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전제한 윤 사장은 “남들은 원자재를 사서 조립하는 정도의 수준인데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만큼 기술력 하나는 세계적 수준이라는 자부심 때문.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에서 기술개발에 매진했다는 윤 사장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스스로 돈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동양전자가 온도퓨우즈를 개발하기 이전에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온도퓨우즈가 지난 1986년 정부의 국산화 대상품목에 고시되면서 개발에 착수해 국산화에 성공했다.” 윤 사장은 “이제 세계적 메이커인 일본의 NEC와도 당당히 어깨를 겨룰 만큼 성장했다”며 “NEC에 비해 동양전자가 부족한 점은 중소기업이라는 점 밖에 없고 기술적인 면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윤 사장의 자신감에서 ‘동양전자’라는 네임벨류만 쌓인다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은 이미 마련돼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었다. ■연혁 1987. 8. 18 동양전자 주식회사 설립 1988. 4. 16 전기용품 형식 승인 및 취득 1989. 5. 4 UL 인증 취득(E 117626) 1995. 9. 20 NT 표시 인증 1996. 12. 16 EM 품질 인증 1998. 1. Dentory 인증 취득(일본) 1998. 11. VDE 인증 취득 1999. 12. 무역의날 백만불수출탑 및 대통령표창 수상 2000. 8. 30 제조물 배상책임(PL) 보험 가입 2001. 4. ISO 9001 인증 획득(2000 version) 2003. 8. 21 CCC 인증 취득 (승인번호:2003010205079617)

가자! 2만불 시대로/(주)알파켐

"세계 프린터 잉크시장을 물들인다 연 평균 100% 신장 올 매출 240억원 예상 세계프린터 잉크, 카트리지 시장의 선두 기업으로 우뚝 선 ㈜알파켐(대표 조규오 43). 캐논, 삼성도 무시했던 이 시장에서 알파켐은 금년도 무려 24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창업한지 5년에 불과한 중소기업이 자이언트 기업들이 거들떠 보지 않던 이 시장에서 기술력 하나로 ‘옥토’로 바꿔 놓은 것이다. 2005년 코스닥 등록을 통해 무한변신을 준비중인 알파켐은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을 주름잡기 위해 오늘도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 산골에서 태어난 조규오 사장은 7살때부터 생계를 위해 지게를 져야 할 만큼 고생을 했다. 중학교때 부산으로 유학, 부산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첫 직장인 스위스 시바가이기(CIBA GEIC)의 국내 합작회사인 스위스화학에서 12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조 사장은 칼라분산 분야의 전문 연구원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94년 그는 삼성종합기술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조 사장은 “한 분야에서 인생을 걸기위해 이직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평소 존경하던 선배의 사망으로 전의를 상실, 결국 95년 삼성종합기술원 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선천적으로 매사에 호기심이 많으며 가만히 있는 걸 못참는 성격이란다. 첫 직장인 스위스화학에서 중형 반응기 3개로 제품을 만드는 것을 보고 사장과 임원들 앞에서 “대형 반응기 1개면 인력은 줄고 생산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가 미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충고는 몇개월 후에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회사 매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알파켐은 지난 98년 경기중소기업 진흥재단 창업보육센터 입주 벤처기업 공개모집에서 칼라분야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5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둥지를 틀었다. 그 당시 자본금은 친구와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5천만원이 전부였다. 현재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에 4천평 규모의 공장과 연구소, 본사빌딩까지 갖추고 있는 이 회사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단기간 급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알파켐의 저력은 오직 ‘기술력’으로 무장하고 승부했기에 가능했다. 조규오 사장은 이 때부터 2년여간 365일중 명절을 제외하곤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16시간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대학 지도교수의 소개로 들어간 스위스화학에서 12년간 연구원 생활을 한데다 95년부터 3년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전자재료 관련 기술까지 터득했기에 자신감 또한 충만했다. 현재 주 생산품인 잉크젯 프린터 카트리지 리필킷, 대체 카트리지, 대형 실사 및 전사출력물 시장에서 국내 최대의 판매업체이자 프린터용 잉크시장을 선도하는 업체가 됐다. 창업 첫해 5억원인 매출이 2000년 18억원, 2001년 50억원, 2002년 75억원, 지난해 120억원을 올린 데 이어 올해에는 240억원을 예상, 연평균 100% 이상의 매출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창업한지 1년반만에 50평에서 수원시 매탄동 512번지 700평규모의 공장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조 사장. 그는 그때 심한 갈등을 겪었다. 회사의 주력 상품을 놓고 잉크 분야에서 손을 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잉크분야로 한평생 먹고 살 수 있지만 남자에겐 도전과 야망이 있다는 조 사장은 사업확대를 계획하고 레이저프린트 분야의 핵심부품인 OPC드럼 개발에 전력했다. 이어 2002년 8월 5천평 규모의 현 공장으로 또 한번 이전하고 설비라인에 120억원을 투자했다. 결국 조 사장의 판단은 주요했고 OPC드럼은 지난해 10월부터 제품주문이 들어와 올해 2월에만 93만달러를 수출할 수 있었다. 특히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삼성전자, LG필립스 등 대기업의 하청업체로의 전락을 고집스럽게 외면하며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제품에 승부수를 띄운 것이 알파켐을 독자적인 브랜드로 키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조 사장은 기업경영의 성패여부는 정직과 투명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과 회사의 정보를 공유한다. 매달 1일이면 어김없이 월례회의를 갖고 전직원들에게 매출, 불량률 등 회사내역을 공개한다. 회사가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 직원들이 직접 살림살이를 알아야 믿고 따라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각종 인센티브를 지급해 직원들의 사기함양에도 노력한다. 올해 예상 매출액 270억원을 달성하면 상여금 1천200%가 지급된다. 그러면 국내 최고라는 삼성전자보다 월급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조 사장도 직원들과 똑같이 월급을 받아가고 운전도 손수한다. 그만큼 그는 직원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 회사 자본은 직원들과의 공동 재산이기 때문에 전용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기 때문. 약속은 한번도 어겨지 않고 철저히 지킨다. 직원들의 월급, 협력업체 결제, 납기 등 …. 약속은 곧 믿음, 신용이며 회사 미래기 때문이란다. 무엇보다 그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일본사람을 좋아한다. 한가지 일에 승부를 걸기 때문이라는데 이 때문에 그는 첫 직장에서 맺어진 잉크사업으로 20여년간 한우물을 파고 있다. /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사진/원지영기자 jywon@kgib.co.kr ■인터뷰/조규오 사장 신용+마케팅+기술 “회사발전 원동력” “기술만 가졌다고 기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투명한 회사를 만들어야 하죠.” ㈜알파켐의 조규오 사장(43)은 신용과 마케팅,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기업의 매출이 늘어나고 회사가 발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믿음을 주기 위해 직원들보다 많은 일을 한다는 조 사장은 “첫 직장생활부터 동료보다 몇배, 몇십배 더 많은 연구결과를 수행했다”면서 “지금도 그 당시 조 사장이 개발한 제품으로 전체 매출의 40% 이상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사장은 또 성실함을 강조한다. “아이디어와 성과는 성실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죠.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다고 하잖아요.” 조 사장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아침에 눈을 빨리 뜨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취침시간은 하루 6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9시간 이상 걸리는 해외 출장에도 잠은 5분 이상 자지 않아요. 그 시간에 책을 읽죠.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그으면서 보통 1권정도를 마스터할 수 있잖아요.” “모든 결과물은 노력한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 조 사장의 좌우명. 조 사장은 “로또 복권과 같이 기적이나 요행을 바라는 회사가 아니라 많은 땀방울과 노력으로 한단계, 한단계 성장하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회사연혁 1998년 4월 ㈜알파켐 법인 설립. 경기중소기업 진흥재단 역내 벤처 보육업체 지정 6월 잉크메이트 상표출원 9월 리필잉크 제품 출시(HP,EPSON용 리필킷). 리필킷·밀대분리형 1회용 주사기 실용실안 출원 12월 새로운 잉크제조기법 특허 출원 1999년 2월 EPSON용 대체 카트리지 출시 8월 중소기업청 벤처기업 인증 10월 수원시 매탄동 512-1번지 자가공장 매입 2000년 1월 기업부설 기술 연구소 설립 2월 수원시 매탄동 512-1번지 이전 6월 산업자원부 기반기술과제 1순위업체 지정 8월 업계최초 ISO 9001 인증획득 10월 세계최초 무침전형 전사잉크 개발 2001년 2월 경기 중소기업인상 수상. 3월 잉크젯 제조기법 NT-mark 출원 4월 상공회의소 기술개발부문 으뜸기업상 수상 일본 TOYO 잉크와 기술부문 전략적 제휴 6월 경기도 유망 중소기업 선정 중소기업은행 우량기업 및 패밀리 기업 지정 7월 중소기업청 수출기업 선정 8월 잉크젯 전사잉크 NT Mark 획득 10월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 407-1번지 신 공장부지 매입(5천평) OPC 드럼 본격생산 11월 정보통신부 전자잉크 개발 사업체로 선정 2002년 1월 유럽품질인증 CE Mark 획득 2월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 407-1번지 신 공장 착공 3월 피에조 헤드용 솔벤트형 안료 잉크 개발 4월 피에조 헤드용 오일형 안료 잉크 개발 7월 Xaar 헤드용 솔벤트형 안료 잉크 개발 알파켐 중국 현지 법인 Alprod China 설립 8월 수원시 매탄동 407-1번지 신 공장 이전 자본금 증자 (합계 19억 2천만) 12월 산업부 장관상 수상 2003년 1월 OPC 양산공장 완공 3월 신공장 완공 입주식행사 개최 8월 중소기업청 “INNO-BIZ”기업 선정 기술 신용 보증기금 “우수기술기업”선정 9월 제4회 中企 기술혁신대전 “기술혁신금상”수상 10월 “정보화 우수 중소기업”선정 11월 “전사잉크 제조기법” (잉크젯 프린터용 승화형 잉크 조성물) 특허 획득 2004년 1월 OPC 제2라인 착공

가자! 2만불 시대로/(주)로보스타

"로봇산업 미래 ‘우리손에 달렸다’ 지난해 8월 체코 프라하의 흐르잔스키궁에서 열린 일본 체코 정상회담에 일본의 첨단 인간형 로봇 ‘아시모’(사람처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이족보행로봇)가 정상회담 국빈만찬에 초대받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로봇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나라에 인간형 로봇이 초대된 이 사건은 로봇산업이 이미 21세기 각국의 운명을 쥐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세기말 전세계를 강타한 인터넷 혁명에 이어 로봇기술의 거센 충격파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로봇이 등장했는가 하면 로봇이 그린 그림이 미술관에 전시되고 아트로봇이 고가에 경매되는 소장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심지어 로봇을 입양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곧 우리 앞에 다가올 현실이다. 인간형 로봇. 그러나 이러한 최첨단 로봇 프로젝트의 베이직 프로그램은 무인공정의 자동화 생산라인의 응용에서 시작됐다. ● 존폐 위기서 로봇산업 분야 다크호스로 우리나라는 지난 97년 IMF 사태로 인한 경제공항(經濟空港)이란 ‘블랙홀’에 빠졌다. 이후 크고 작은 국내 기업들이 내실 위주 경영을 주창하며 구조조정을 본격화했다. LG산전도 99년 내실 위주 경영을 위해 구조조정이란 카드를 꺼내들고 로봇 사업부를 없애기로 했다. 당시 로보트 사업부 직원들은 21세기 차세대 성장 엔진의 하나인 로봇산업의 거대시장을 포기할 수 없어 당시 로봇 사업부 엔지니어 12명이 자본금 2억원을 모았다. 그리고 로봇(Robot)과 Gold Star(구 LG 브랜드)를 합성한 로보스타(Robostar)란 브랜드로 (주)로보스타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직원 모두가 주주로 참여했고 이후 신규로 합류한 직원에게도 주식을 보유케 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업원이 주식을 갖게 됐고 직원들은 “회사의 주인이 종업원”이라는 의식이 아주 강하게 자리잡았다. “내가 주인인 회사, 로보스타…”직원들은 주인의식을 갖고 휴일도 회사에 반납한 채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불과 60여평 남짓한 서울 구로구 공장바닥에서 전 직원이 모포에 의지한 채 새우잠을 자며 노력을 기울였다. 로보스타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설립 5년만인 지난해, 매출 규모가 150억에 달하는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의 기업으로 성장하며 매출증대라는 본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 ‘I can do it’ 12명 인재 자신감으로 ‘똘똘’ 8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LG산전에서 같이 일했던 강귀덕 現이 사와 전기만 現 부사장, 규현석 現 부장 등 12명이 의기투합했다. 로봇 개발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여기에 LG산전에서 10여년간에 걸쳐 축적된 기술과 마케팅 노하우 등은 직원들에게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더해주었다. 비록 대기업에서 내기듯 창업했지만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쾌감과 투지는 로보스타의 원동력으로 자리잡게 됐다. 모두 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려는 마음이었다. 지난해부터는 신규 사업을 위해 로봇 기술을 활용한 Linear Motor 등 초정밀 위치제어 장치와 반도체 및 정밀 전자부품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정밀 제조 장비 사업 분야에도 과감하게 투자했다. 중소기업이다보니 자금 동원력이 국내 대기업과 일본 기업보다 취약했다. 그러나 로보스타는 비전을 생각했다. 이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자동차업계 수요로 이어져 회사의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 회사발전 내부조직 역량강화 이렇게… 로보스타 김정호 사장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회사 내부의 조직역량 극대화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개인과 회사의 비전 달성을 위해 열정을 다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우선 인재 선발에서 항상 최고를 지향한다. 로봇 산업이 첨단 분야인만큼 고급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제도는 이러한 내부 프로세스의 하나이다. 인재육성은 기본이다. 개인 역량에 따른 차별적 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해외출장과 전시회참가 기회를 부여해 전 사원의 글로벌 마인드 고취에 주력한다. 직원들의 대우도 대기업 수준이다. 매년 상하반기로 목표관리평가(SYS)를 실시해 열심히 한 직원에게는 차등적 성과금을 부여한다. 또 연간 목표를 달성하면 초과이익을 직원들에게 배분한다. 이는 회사 이미지를 제고 하는 한편 고도의 인재유치 전략인 셈이다./이종철 clee@kgib.co.kr ■인터뷰/로보스타 김정호 사장 실패 두려워 않는 ‘도전정신’…오늘의 성공신화 창출 “주문받은 제품의 납기를 1주일내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납기 준수는 비교적 기술우위를 점하고 있는 일본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이다.” (주)로보스타 김정호 사장은 국내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기술적 우위를 보이고 있는 일본 업체와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최근 경쟁사들간의 과당경쟁으로 수익성 저하와 투자가 위축되고 있지만 로보스타는 철저한 사후관리와 고객응대로 연간 500억여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산업용 로봇 시장의 30% 가량을 점유하는 등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김 사장은 위기를 성공으로 연결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창업초기 로봇 산업의 후퇴기와 2001년 경기불황을 들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로보스타 정신’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김 사장은 이어 고객과 종업원, 주주, 모두가 회사 발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경영으로 기업활동의 투명성을 제고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고객과 주주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를 제공해야 고객과 함께 기업이 성장하고 직원을 존중해야 기업의 경쟁력이 제고된다는 이론 때문이다. 김 사장은 “단기적 결과와 업적을 요구하는 시장의 기대에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주문을 두려워해 임기응변으로 대응, 시장에 영합했다면 지금의 로보스타는 없었을 것”이라며 “로보스타가 세계 로봇 산업의 미래와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연혁 2003년 5월 중국 상해지사 설립 2월 CHIP부품 자동정렬기 출시 및 일본 수출개시 (일본 OKANO전기와 공동개발) 1월 산업용 로봇 누적생산대수 6000대 돌파 2002년 11월 2/4축 서보컨트롤러(RCM PLUS MODEL) CE인증 획득 9월 - KOFAS(자동화 정밀기기전) 출품 - 기업부설 기술연구소 설립 [산업기술진흥협회 인증] 7월 우수산업디자인 (GD) 선정 [SCARA ROBOT] 5월 제2대 김정호 대표이사 취임 4월 -HANNOVER MESSE 2002출품 2월 -2002 SUCCESS DESIGN 상품 선정 [SCARA ROBOT] -1축 서보컨트롤러(RCS-7000 SERIES) CE인증 획득 -KOFA2002(자동화기기전) 10부스 출품 2001년 12월 병역특례업체 지정 (3명) 11월 - 벤처기업 지정(신기술 개발기업) - 8월국제자동화정밀기기전(2001 KOFAS)출품 -부품소재 공동개발 참여(중소기업청) 8월 디자인 혁신 상품 개발사업 협약(한국 디자인 진흥원) 5월 수출유망중소기업지정(제2001-0364호) 4월 단축 CONTROLLER CE MARK 획득 2000년 12월 병역특례업체 지정(중소기업청, 병무청) 11월 DESKTOP ROBOT 2기종(CONTROLLER 내장형 및 외장형) 개발, 출시 8월 국제자동화정밀기기전 출품 5월 사업장 이전 (서울 구로 → 경기도 안양시) 4월- 해외 유명규격 인증취득 지원 협약체결(CE) -2000년 중소기업 기술혁신 개발사업 협약체결 1999년 12월 벤처기업 지정(제99112538-1981호) 10월 한국기계전 출품(306B-3Booth) 9월 SCARA ROBOT 8기종(450~1000Arm)개발,출시 7월LG산전㈜와 ROBOT사업 인수 및 A/S대행 계약체결 6월 직각좌표 ROBOT 기계부 4기종(10,30,50,80Base)개발,출시 4월 CONTROLLER 4기종(1축 2기종, 2축 1기종, 3~4축 1기종) 개발,출시 6월- LG산전㈜와 Robot OEM공급 및 A/S대행 계약체결 - 사업 시작 3월 한국무역협회 회원등록(신고번호:11615606) 2월- ㈜로보스타 법인설립 - LG산전㈜ 자동화사업부 Robot사업부문 핵심인원 12명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2억원으로 설립

가자! 2만불 시대로/노아화학

"‘광기능 코팅재’ 수출… 글로벌 기업 ‘우뚝’ ‘영업직과 생산직 직원이 단 한명도 없는 기업’. 하지만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알려진 기업’. ‘제품을 PR하지 않아도 수요자가 먼저 찾는 기술 집약적인 기업’. 광기능성 코팅재료 및 시스템 개발 전문 벤처기업인 노아화학(대표 김대웅)에 따라 붙는 형형색색의 수식어다. 올해로 만 10살인 노아화학은 매년 10%대의 매출신장률을 보이며 세계속의 기업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는 지방의 작은 벤처기업에서 일궈낸 결과물이기에 노아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다. 김 사장을 주축으로 20여명 남짓한 직원들이 연구실 형광등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기울였기에 가능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가 됐다”는 어느 연예인의 말과 달리 기술력과 신용, 투지를 무기로 험하디 험한 난관을 극복하며 성공이란 등불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기술력. 신용으로 고객에 어필 ‘판촉사원이 단 한명도 없다. 더욱이 생산직도 없다.’ 노아는 연구원들이 제품개발부터 포장, 판촉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책임지게 하는 독특한 판매·경영 전략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발된 제품은 개발한 사람이 잘 안다’는 김 사장의 기업경영 신념 때문에 연구원들이 직접 A/S까지 관리토록 하면서 회사의 공신력을 쌓아가고 있다. 연구원이 직접 제품을 생산하고 사후관리까지 힘을 기울이다 보니 자연히 직원들의 해외출장도 잦아져 공장가동률이 50~60%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저한 컨설팅을 바탕으로 구축된 신용 덕분에 고객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주문물량은 꾸준히 늘고 있는 기업이다. “지난해에는 4개월간 해외에 체류하는 등 철저한 고객서비스를 지향하고 있다” 김 사장은 회사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시간과 노력, 정성이 곱절로 들지만 제품의 품질 향상은 물론 고객만족도의 극대화로 고객들에게 노아를 세뇌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노아를 접한 고객이라면 누구나 의문점 해결과 시원한 서비스로 대만족을 누릴 뿐 아니라 제품을 개발할 때면 노아를 다시 찾게 된다. 이러한 독특한 경영전략으로 현재 노아는 독일과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판매신장을 거듭하며 지난 2001년 240만달러, 2002년 270만달러, 지난해 300만달러 등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기술우위 바탕 틈새시장 공략 김 사장은 20여년간 몸담았던 고려화학(주)을 그만두고 지난 94년 유럽여행 중 우연한 기회에 안면이 있던 해외바이어로부터 금속증착전사용 접착제 및 감광성 코팅재를 개발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고민 끝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보다는 기존 시장을 공략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원천기술보다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위험부담이 적은 기존 시장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기존 시장이라 하더라도 남이 하지 않고 있는 틈새 시장을 노린다면 시장 선점효과로 인해 시장 지배력을 갖추어 갈 수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고려화학 중앙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친구공장에서 연구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광기능성 코팅재를 개발해 독일에 수출할 수 있었다. 이어 독일에서 시제품이 나오자 개발제품에 놀란 미국 등에서 거래 요청이 쇄도했다. 특히 노아가 개발·생산하는 제품은 ‘1단계:공정코팅재료(원재료)개발→2단계:코팅설비를 이용해 상품화(제품 개발업체)→3단계:후가공(기술을 바탕으로 응용해 상품화)’의 3단계 과정을 거친다는 특성상 전과정이 모두 고객이 되는 셈이다. 사후책임은 1~2단계 뿐이지만 김 사장은 1차 고객만 관리하지 않고 항상 2~3차 고객까지 염두에 두고 사후관리에 주력한다. 이와 함께 고객의 주문을 받아 노아가 직접 개발한 제품들은 기술력이 필요한 고부가 가치 분야이기 때문에 독점 공급을 할 수 있다. 시너지 효과의 극대화 ‘노아는 우리나라 산업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노아가 해외로 전량 납품하는 시스템은 순수 국산기계(설비)와 원재료가 사용된다. 따라서 국내 제2의 수출기업을 발생시키고 그 회사의 PR까지 해주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 연간 500만불 가량의 부가가치를 창출시키며 우리나라의 기업을 해외에 알리고 있다. 노아는 기술을 이전하면서 까다롭기로도 유명하다. 제품개발 소요시간이 보통 1년 정도로 길은데다 노아가 개발한 제품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세계 곳곳에 심어주기 위해서다. 그만큼 노아 연구원들의 생산·개발제품의 시장성, 제품성, 소비자 반응 등을 곰꼼하게 따진 후 제품개발에 착수하기 때문에 개발기간과 절차가 까다롭고도 길다. 이러한 까다로운 절차 덕분에 노아의 제품들은 자기 자신을 PR하고 다닌다. 게다가 고객이 요구하기전에 찾아가 제품의 업그레이드,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기 때문에 노아의 홍보효과는 물론 기업의 신뢰까지 저절로 쌓이는 일조이조의 효과가 발생한다. 김 사장은 “한번 확보된 고객은 노아의 영원한 고객이라는 ‘life 스타일’ 마케팅전략으로 기술과 신용을 수출한다”면서 “연구원들이 직접 제품을 판매하는 만큼 책임질 수 있는 제품개발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사업을 적극 활용하라 김 사장은 정부의 중소·벤처기업 지원사업들이 기업에게 ‘당근’이 될 수도, ‘채찍’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지원사업에 선정된 기업은 우선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싸인다는 것이다. 이는 곧 직원들의 사기함양으로 이어져 제품의 질이 향상되고 생산성도 좋아진다는 이론이다. 반면 정부의 자금지원을 위안 삼아 나태해진다면 그 기업은 고사위기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경우 정부의 각종 사업을 활용해 열악한 R&D 투자 여건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현재 특허출원중인 ‘투명홀로그램 인쇄물 및 그 제조방법’ ‘단열차광복합 기능성필름 제조방법’은 중소기업청의 기술혁신사업 과제를 수행해 개발한 것들이다. 김 사장은 “보통 1년단위의 정부 지원사업 특성상 지원자금의 규모가 작지만 적절한 사업을 찾는 다면 분명 기업에게도 이득이 된다”며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이종철기자 jclee@kgib.co.kr ■인터뷰/김대웅 사장 “도전정신이 성공비결이죠” 끊임없는 연구개발… 연간 300만달러 수출실적 달성 “남들이 하지 않을 때 과감하게 도전하는 게 바로 성공을 일궈낸 밑바탕이자 원동력이다.” 노아화학의 김대웅 사장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연간 300만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릴 수 있는 알짜 기업으로 키운 저력을 이 같이 평가했다. 김 사장이 감광성 코팅재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20여년간 몸담았던 고려화학(주)을 지난 93년 그만두고 해외여행을 즐기던 중 관련기술 개발 권유를 받았다. 친구공장에서 연구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개발을 완료하고 독일에 수출하자 개발품에 놀란 미국 등의 국가에서 주문 요청이 쇄도했다. 김 사장은 이 때의 상황을 “좋은 연구제품은 스스로가 판촉한다”고 회상하며 설명했다. 지금도 단 한명의 판촉직원 없이 연간 수십억원대의 수출실적을 올리는 기업으로 커가고 있는 것은 이 때 터득한 경영마인드 때문이다. 김 사장은 또 빠른 기간내에 중국 등 아시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지난 99년 중국과 합자회사인 노아화학유한공사를 설립하고 부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사장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연구분야인 만큼 노아의 개발품은 독일과 미국,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판매신장을 거듭하고 있다”며 “그야말로 연구기술력 하나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기술집약적 ‘글로벌 벤처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연혁 1994년 01월 노아화학 설립: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장안리 679-3번지 1994년 06월 기능성박막 도포제 수출시작:유럽, 중국, 미국, 호주 1998년 12월 잉크젯 잉크 수상도포제 개발성공(경기도 신기술과제) 1999년 04월 기능성 광경화성 수지 개발성고(산업자원부 첨단기술과제) 1999년 06월 중국 양주시 기술투자합자회사 설립 1999년 05월 광학적 기능성 고분자 합성수지 유럽, 중국, 미주, 호주 수출 1999년 11월 ITO(Indium Tin Oxide)Sol 습식합성 개발성공(중기청기술혁신과제) 2000년 09월 실용신안(등록 제0205949호)금속증착전사지 2000년 07월 발명특허(출원번호 제39325호)금속증착전사지 제조기술개발 2000년 10월 벤처기업선정(중소기업청 제20002162271-23685호) 2000년 12월 기술경쟁력 우수기업지정(중소기업청 제기술2001-147호) 2001년 06월 수출유망중소기업지정(중소기업청 제2001-0280호) 2001년 07월 유망중소기업지정(제2001=173호) 2001년 07월 금속증착 전사지 제조기술 성공(중소기업청 기술혁신과제) 2001년 07월 디지털 전사잉크시스템 개발기술 성공(중소깅버청 부품소재과제) 2001녀 08월 경기중소기업인상수상(경기중소기업청장) 2001년 11월 INNO-BIZ기업선정 2003년 01월 벤처기업재선정(중소기업청 제031622035-2-68호) 2003년 02월 Solar Control Film 개발 성공(중소기업청 기술혁신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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