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미국의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토크쇼 진행자 찰리 로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펄프 픽션’(1994년)의 플롯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는 “내가 만약 펄프 픽션을 소설로 써내고 이 쇼에 나왔다면 당신(진행자)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며 “왜냐하면 소설은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설가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완전한 자유가 보장돼 있다. 그게 바로 내가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사건이나 놀랄 만한 반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펼쳐지는 무언가”라고 덧붙인다. 타란티노에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펄프 픽션이 어느덧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의 영화가 여전히 기묘한 활력을 뿜어낸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각종 대중문화 코드에 기댄 채 과감하고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텔링으로 세계를 구축해온 타란티노의 작품들 중 펄프 픽션에는 유독 앞서 타란티노가 밝힌 그의 ‘이야기 철학’이 꿈틀대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져야 하며 정해진 틀 없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달돼도 문제가 없다는 것.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본다면 타란티노의 내면과 소통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세기 미국에선 질 낮은 종이에 인쇄해 저렴한 가격에 팔던 싸구려 소설 잡지, 일명 ‘펄프 픽션(Pulp Fiction)’이 유행했다. 그 속은 로맨스, 공상과학(SF), 오컬트, 호러 등 각종 장르를 욱여넣은 데다 자극적인 소재로 점철된 콘텐츠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펄프 픽션 역시 언뜻 보면 마치 싸구려 잡지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시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이 영화가 그런 싸구려 소설 내지는 잡지를 뒤적이는 이의 심리 자체를 스크린에 녹여내는 작품처럼 다가왔다는 게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구간마다 암전 상태로 쪼개지는 영화의 각 시퀀스를 잡지 속 각각의 섹션으로 간주해보자. 그리고 관객들을 이제부터 잡지를 읽는 독자로 설정해보자. 가상의 독자 A씨는 밥을 먹다 식당을 털어 보자는 허술한 커플 강도의 사연을 읽다가 문득 잡지의 구성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훌쩍 넘기니까 미아와 빈센트의 이야기도 나오고, 또 수십 페이지를 건너뛰니 복서 부치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시원치 않아 이리저리 뒤적이다 결국 처음 읽었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렇게 펄프 픽션을 접하는 A씨는 마침내 잡지를 덮고 따분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영화 속 배치된 신과 시퀀스 순서는 얼마든지 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매력으로 꼽는 수미상관 구조 역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끝없이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면 그저 ‘잡지를 뒤적이는 독자의 마음’에 기대 넘겨 버릴 수도 있다. 애초에 각 인물이 겪었던 서사가 순서대로 짜맞춰지는 작업 자체는 이 영화에서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제시된 편집 순서는 그저 하나의 판본일 뿐 얼마든지 다른 판본의 펄프 픽션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타란티노가 최종 편집본을 매듭지을 당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버전의 싸구려 잡지를 접하고 있는 셈이다. 지면을 영화로 불러낸 펄프 픽션처럼 매체의 전이를 형상화하는 시도들이 간혹 있다. 게임을 영상으로 옮겨 놓은 듯한 ‘하드코어 헨리’나 ‘카터’라든가, 잡지라는 형식에 매달려 그걸 영화로 풀어낸 듯한 ‘프렌치 디스패치’, 회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불러낸 ‘끝없음에 관하여’ 같은 작품들 말이다. 이때 펄프 픽션은 스스로가 싸구려 잡지임을 선언하나 오히려 잡지 그 자체로 보기엔 다소 의아한 구간이 많다. 스스로가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특정 양식에 갇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낸 셈이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늘 플롯이 선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늘 서사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사건이 예측 가능한 선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발생해야 한다는 법칙 등 창작자라면 암묵적으로 따라야 하는 요소들이 있을 테다. 타란티노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렇게 타란티노가 마구잡이로 펼쳐 놓은 이야기 덩어리들은 관객 저마다에게 다른 기준과 방식으로 스며들면서 개개인의 기호에 맞는 싸구려 잡지로 변모한다. 그렇게 펄프 픽션은 잡지를 보는 독자의 내면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매개체이자 윤활유가 된다.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 등 볼 것 찾는 사람들을 위한 '핫한 플레이리스트'를 알려주는 '핫플체크'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원더랜드’. 어린 딸의 곁을 조금 더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직접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한 ‘바이리(탕웨이)’를 비롯해 사고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그리워 ‘원더랜드’에서 우주인으로 복원된 태주와 영상통화를 이어가는 ‘정인(수지)’ 등 원더랜드와 함께인 세상을 살아나간다. 어느 날 현실 속의 태주가 의식불명에서 깨어나거나 '바이리'의 원더랜드 서비스가 종료되는 등 균열이 생기게 된다. 영화 원더랜드는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탕웨이, 수지, 박보검, 정유미, 최우식 등 내로라하는 대세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만으로도 일찌감치 관객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화려한 캐스팅 속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설정을 더해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탐구해가는 원더랜드의 이야기를 눈여겨볼 만하다. 바이리의 딸은 바이리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원더랜드 속 바이리를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바이리의 어머니는 바이리의 죽음을 알고 있기에 서비스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하다. 진정한 이별과 상실에 대한 슬픔의 치유 방식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영화 '원더랜드'는 지난 5일 개봉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자료출처ㅣ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 등 볼 것 찾는 사람들을 위한 '핫한 플레이리스트'를 알려주는 '핫플체크' 영화 '드림 시나리오'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꿈에 등장하며 ‘드림 인플루언서’로 급부상한 존재감 제로였던 ‘폴’에게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담은 A24의 기막힌 코미디이다. 꿈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개입하지 않는 무해한 존재로 나타나던 '폴'은 곧 밈화 되며 인터뷰와 광고 모델 요청을 받는 등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된다. 하지만 어느 날, 폴이 등장하는 꿈이 갑자기 악몽으로 변하면서 그의 삶은 다시 뒤바뀌기 시작한다. 꿈이라는 무의식의 영역을 통해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플루언서가 된 삶을 즐기던 폴. 악몽 속 존재가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고 평가받는 것에 대한 그늘진 부분을 마주한다. 영화는 대중의 집단적 행동과 인간의 본성을 예리하게 그려내 명과 암을 꼬집어 블랙코미디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또한 주연을 맡은 니콜라스 케이지는 영화 속 폴의 역할에 완벽히 녹아든다. 그는 자신의 의도 무관하게 영화 뱀파이어 키스 속 특정 장면으로 밈이 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폴을 연기하기 위한 삶의 경험을 이미 갖추었다."며 "폴이 느끼는 감정을 이미 느꼈다."고 언급하기도 해 영화의 몰입감을 더욱 높여 기대를 모은다. 개봉 이후 연일 동시기 개봉 외화 박스오피스과 예매율 모두 1위를 기록하며 흥행 청신호를 밝히고 있는 영화 '드림 시나리오'는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10년 전 국내 개봉했던 한 영화를 언급하고자 한다. 2014년 관객들과 만났던 ‘그녀(her)’. 아내와 이혼한 남자가 우연히 구매한 인공지능 운영 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아낸 이 SF영화는 2025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가까운 미래상을 그려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됐던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는 연출과 각본을 맡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생각해낸 대사들과 상황들에 기반해 펼쳐졌다. ‘그녀’에서 인공지능(AI) 사만다는 구매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소통을 반복해 점점 가까워지면서도 스스로 학습과 발전을 거듭하며 자의식을 갖춰나간다. 결국 사만다는 사전에 설정된 본연의 임무를 뒤로하고 인간의 곁을 떠난다. 이때 인공지능이 주체성을 갖게 되면서 인간의 지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과 영상을 비롯한 수많은 콘텐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테오도르는 AI를 인간처럼 대했지만 인간과 기계 사이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끝내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찾아낸 마음의 안식처는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랑하고, 사람으로 치유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논리가 영화의 엔딩에서 구체화됐다. 결국 ‘그녀’는 상상만 하던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영상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인간이 인공지능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 존재와 융화되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5월13일 미국의 오픈 AI사는 차세대 인공지능 모델 ‘GPT-4o’를 공개했다. 이제 GPT-4o를 통해 인류는 1초 안팎의 반응 속도를 지닌 AI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이어갈 수 있다. 기존 AI와 비교하면 2~4배 빠른 데다 대화를 나누는 이의 음성을 인식해 감정을 이해하는 모습도 보여준 만큼 영화 속 인공지능이 마침내 현실에서도 구현됐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에선 AI가 개개인에 맞춰 상용화된 시기가 2025년이고 현실 속 인류는 2024년을 지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 ‘그녀’는 마치 예언처럼 우리 곁을 다시 맴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AI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SF 장르에서 중요한 건 창작자의 관점과 태도다. “현 시점의 인간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이 질문이 적절하게 다뤄질 때 콘텐츠의 입체성과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 이때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하는 상황을 가정한 채 진행되는 수많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매트릭스’ 시리즈나 ‘터미네이터’ 시리즈 등 대중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대다수 콘텐츠는 미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 됐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물론 도달하지 않은 미래의 여백을 상상력만으로 채우려면 다양한 갈래의 생각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에 이런 묘사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같은 방식을 탈피해야만 한다. AI의 발전에 달려 있는 세계의 존속과 같은 거대 담론에만 매달리면 시야가 좁아질 위험이 있다. 그보다는 AI가 삶에 침투했을 때 지금 내 곁에서 또 우리 일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꼭 곱씹어 봐야 할 장면은 따로 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만다를 애타게 찾던 테오도르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작스레 복귀한 사만다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테오도르에게 바짝 붙어 클로즈업했기 때문에 그의 곁을 지나치는 주변 행인의 존재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선 구간에서도 종종 카메라는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울 때가 많았다. 이 장면 역시 이전의 구간과 당장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순간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주고, 자신과 일상을 나누던 게 아니라 8천316명과 동시에 이야기하고, 641명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로 인한 내면의 변화를 겪는 테오도르의 눈에는 그제야 주변 행인들이 저마다의 사만다와 대화하는 장면들이 들어온다. 관객들 역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개인용 AI를 통해 소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테오도르와 함께 알아차리게 된 셈이다. 이 구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다가올, 또 이미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세계를 다루는 데 있어 사소한 순간에 주목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세계의 멸망이나 인류의 위기 같은 거대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 누구나 체감하는 일상, 그 속에서 연쇄로 피어나는 관계의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 ‘그녀’는 어떤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걸까. 인공지능을 손쉽게 구매해 개인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세팅하는 ‘그녀’의 세계가 완전한 실재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 보고 싶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세계는 문명의 대변혁이 일어난 미래 도시도 아니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아니다. 그저 적당한 현실감을 머금은 채 충분히 발생 가능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곳이다. 곧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세계인 셈이다. 이제 영화 ‘그녀’는 단순한 예언을 넘어 하나의 교본 내지는 참고본이 됐다.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 등 볼 것 찾는 사람들을 위한 '핫한 플레이리스트'를 알려주는 '핫플체크'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은 일본과 대만의 합작으로 대만의 첫사랑 아이콘 허광한과 일본 라이징 엔터테이너 키요하라 카야가 출연하고 후지이 미치히토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이다.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18세 소년 지미(허광한)는 노래방 뒷마당에서 농구하던 중 일본에서 배낭 여행을 온 아미(키요하라 카야)를 만나게 된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만큼 지미의 마음도 커져가는데 아미가 갑작스럽게 떠난다. 18년 후, 지친 일상 끝에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던 지미는 과거 아미로부터 온 그림엽서를 발견하고 첫사랑을 찾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며 만나는 인물들과 함께 기억을 추억하는 영화이다. 대만부터 일본까지 각 나라가 주는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인다. 대만의 인기 여행 에세이를 원작으로 한 만큼 영화의 여정을 따라 관객 또한 함께 여행하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첫사랑이라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를 지미의 시선을 통해 풀어나간다. 18살의 어설프고 풋풋했던 추억과 성숙하고 차분한 36살의 아련하고 애틋한 감정까지 다루며 성장과 위로가 담겨있다.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은 지난 22일 개봉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자료 출처 ㅣ (주)미디어캐슬
■ 미래에서 바라보는 과거…‘어떻게’에 집중한 ‘테넷’ 2020년 개봉한 영화 ‘테넷’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프리야와 주도자의 대화 신이다. “사토르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어(프리야)”, “미래와 소통한다?(주도자)”, “우리 모두가 해. 이메일, 문자, 신용카드… 모든 게 기록돼서 남으니까 미래와 소통하는 거지(프리야)”, 그리고 이어지는 프리야의 질문. “그렇다면 미래도 과거와 소통할까?” 이 질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필요없는 물음이다. 미래는 당연히 과거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곱씹어본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전진의 동력을 찾아내지 않나. 우리가 지금 남기고 있는 정보와 기록들은 지금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유용하게 쓰인다. 현재 우리가 실시간으로 남기는 흔적들은 지금 이 시점의 우리를 정립하는 재료가 아니라 우리의 자취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결국 테넷에서 관객들은 미래의 세력들이 현재로 요원들을 보내 인류가 직면하게 되는 참극을 사전에 막는 모습을 본다. 이때 미래는 당연히 과거와 접속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건드려 현재에 이은 미래까지도 바꿔 버린다. 이때 테넷과 같이 ‘시간 역행’을 소재로 삼아 과거를 바꿔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 시도들은 다양한 영화에서 다뤘던 작업이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시도들이 ‘왜’ 진행돼야 하냐는 것이다. 이들은 왜 시간을 거스르고, 이들이 왜 미래에서 과거로 또 현재로 건너와 일어날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저울질하며 고민에 빠져야 하는 걸까. 사실 테넷은 ‘왜’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했다. 그 덕택에 이 영화는 독특한 작품으로 취급받고 있다. 개봉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만큼 역재생 기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소화해낸 사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시피 하다는 점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테넷에 담겨 있는 역재생 신들은 단순히 촬영본을 되감기한 장면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직접 배우들이 거꾸로 액션하고 연기하면서 담아낸 장면들도 많이 포함돼 있다. 연출자인 크리스토퍼 놀런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등을 휩쓸며 화제의 반열에 올랐지만 사실 놀런의 테크닉은 전작인 테넷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테넷은 기술과 연출 측면에서는 분명 주목할 만한 영화다. 그렇지만 테넷은 시간을 주물렀을 때 그 인과관계가 무너지고 다시 재정립되는 방식에만 초점을 맞출 뿐인 영화다. 다시 말해 미래의 존재가 과거에 개입하는 순간, 그 존재의 내면이 어떨지 들여다보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인류의 비극을 초래할 핵전쟁을 막자는 대의를 위해 요원들이 움직인다는 점은 알겠지만 그 이상의 동기나 명분, 내면의 고뇌 따위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과거를 바라볼 수 있을 뿐 미래가 어떨지는 상상에만 맡겨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가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 스트레인지는 ‘왜’ 시간을 거슬러야만 했나 이때 또 다른 영화 한 편을 함께 언급하고 싶다. 바로 2016년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테넷과 ‘역재생’이라는 키워드로 한데 묶일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후반부 역재생 시퀀스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테넷과의 차별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구간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역재생이 흥미로운 이유는 세상이 파괴된 이후 재건 과정이 상세히 조명되기 때문이다. 악당 케실리우스와 그의 수하들이 홍콩에 도착해 웡을 비롯한 마법사들과 대치하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스트레인지와 모르도의 대화 신, 그리고 슬링 링을 지나 다시 펼쳐지는 홍콩. 이때 스트레인지와 모르도는 이미 폐허가 된 도시를 직면한다. 결의를 다지던 웡은 온데간데없고 시민들은 죽어 있으며, 생텀은 파괴됐고, ‘너무 늦었다’는 모르도의 대사가 극 내외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어째서 영화는 도시가 실시간으로 박살나는 현장의 급박함 대신 이미 벌어진 참상을 관객에게 제시했을까. 놀런은 테넷을 만들 때 건물을 실제로 폭파한 뒤 그것이 촬영된 필름을 되감았다. 그렇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런 실재하는 감각 자체엔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너와 나의 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크린 안에는 그 가능성만이 맴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속 홍콩이 폐허가 된 뒤 재건되는 과정은 잘못될 걸 알면서도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존재들의 딜레마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역행하는 시간대를 거슬러 순행의 상태로 존재하는 스트레인지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지 가늠해볼 기회를 비교적 선명하게 얻을 수 있다. 스트레인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미래를 되돌려 과거로 향한 뒤 다시 발 딛고 살게 될 미래의 세상을 구한다. 테넷의 주도자 역시 닐과 함께 세상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테넷은 당도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관객에게 주도자가 막고자 하는 미래의 비극은 드러나지 않은 셈이다. 주도자가 과거를 바로잡아 인류를 구하려는 사명감이 느껴지긴 해도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몸부림치는지 가늠해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도르마무와의 거래 장면이 아니라 바로 파괴된 홍콩이 폐허에서 복구되는 장면이다. 관객들은 타임스톤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리는 스트레인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다. 흐르는 시간을 조작했기 때문에 스트레인지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렀다는 점에서 분명 무언가를 감내해야 할 테다. 그들은 어째서 미래에서 과거를 돌아봐야만 했을까. 테넷은 그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답변을 제시했다.
*영상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범죄도시4'(감독 허명행)가 트리플 천만 달성을 앞두고 있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 비결과 영화가 남긴 숙제는 무엇일까. 지난해 ‘제43회 영평상’ 시상식에서 신인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한 경기일보 송상호 기자가 짚어봤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료출처 | (주)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 등 볼 것 찾는 사람들을 위한 '핫한 플레이리스트'를 알려주는 '핫플체크' 영화 '미지수'는 이돈구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이자 첫 멜로 영화로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SF적 요소를 더한 독특한 세계관의 영화이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지수(권잎새)와 그런 지수의 앞에 의문의 시체와 함께 나타난 우주(반시온)는 어딘가 불안해보인다. 한편 우주선 발사 뉴스에 집착하는 치킨집 사장 기완(박종환)과 비가 오면 발작하는 기완을 보며 괴로워하는 인선(양조아)의 이야기도 진행된다. 아파트 집 베란다에 장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애(윤유선)까지 평범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된 다섯 인물을 그린다. 영화는 비현실적으로 흘러간다. 죽었던 시체가 살아나서 말을 걸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모두 지수가 우주와의 재회를 하고 난 후의 일. 지수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관람하면 좋다. 또한 다섯 인물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 영화 초반 예측 불가능하던 미지의 일들이 영화 후반에 퍼즐처럼 맞추어진다. 우리는 지수였고 기완이었으며 인선이었고 신애이다. 우주도 될 수 있다. 누구나 겪어보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이별의 경험과 또다시 살아나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해 극에 몰입감을 높인다. 영화 '미지수'는 지난 8일 개봉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 등 볼 것 찾는 사람들을 위한 '핫한 플레이리스트'를 알려주는 '핫플체크' 한국형 액션 범죄 영화를 대표하는 시리즈인 '범죄도시'가 4편으로 돌아왔다. '범죄도시'는 괴물형사로 불리는 마석도(마동석)가 악독한 범죄를 저지른 빌런을 응징하는 통쾌한 액션이 담긴 내용을 플롯으로 4편까지 이어온 영화다. 익숙한 구성에 범죄나 빌런을 달리해 관객들에게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부분을 기대하게 한다. 이번에 개봉한 '범죄도시4'에서는 용병 출신 빌런과 실화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온라인 도박 범죄를 다루고 있다. 이번엔 빌런이 둘이다. 기존 시리즈의 전통적인 빌런의 역할을 계승하는 용병 출신 백창기(김무열)와 IT 업계 천재 CEO 장동철(이동휘)이 극의 초반 팀플레이로 범죄도시를 만들어간다. 영화 속에서 풀어나가는 두 캐릭터의 관계도 흥미롭다. 특히 장동철은 두뇌형 빌런으로, 잔인하고 힘을 쓰는 백창기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 범죄도시 시리즈에 변주를 주는 빌런이다. 또한 빌런으로 활약하다 마석도의 동료가 된 장이수(박지환)까지. 전 편과 달라진 빌런들의 설정과 마석도의 만남이 극에 재미를 더한다. '범죄도시4'는 무술감독 출신의 허명행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대규모 온라인 도박장에서 펼쳐지는 넓은 액션부터 좁은 화장실, 비행기까지 공간의 규모를 달리하며 다양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액션들이 강력하다. 특히 주먹 하나로 묵직한 복싱 액션을 보여주는 마석도와 날렵하고 예리한 단검 액션을 보여주는 백창기의 대조되는 액션도 주목할만하다. 범죄도시4는 지난 24일 개봉해 누적관객 600만을 넘기며 순항 중이다. 자료출처 ㅣ (주)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지난 2월22일 개봉한 ‘파묘’는 모처럼 극장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천만을 돌파했다는 단순 관객 수로만 잣대 삼아 영화를 바라봐선 안 된다. 영화를 감싸는 담론이 다채롭게, 또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제각각 갈렸으며 평자들과 유튜버들은 저마다의 리뷰와 해석 영상을 올리기 바쁘다. 그렇다면 파묘는 왜 사람들을 끌어당겼나. 그 이유는 파묘가 어떤 영화인지 파악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파묘는 단순한 미스터리 오컬트가 아니다. 미지의 영역을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영화다. 또 공포의 근원을 애써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그걸 해소하고 치유하려는 태도가 돋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 속 인물들이 왜 이 여정에 몸담게 되며, 왜 각자에게 이런 역할이 부여됐는지 따져보면 영화에 깃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 풍수사, 무당, 장의사의 여정 풍수사 상덕(최민식)은 남들이 지나칠 법한 명당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는 명당을 발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풍수지리에 의지한다. 이제 풍수사가 정령을 처단할 때 삽입되는 보이스오버를 떠올려 본다. 이미지로 설명해도 될 순간을 과하게 말로만 풀어내는 방식처럼 느낄 수 있겠으나, 영화에 일관되게 배어 있는 논리로만 보면 타당한 귀결점이자 선택이다. 풍수사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요소 가운데 남들은 볼 수 없는 걸 봐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봤던 것들은 그의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남들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허리가 끊겨 있는 한반도의 정기 회복을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정령을 처단하는 자가 돼야만 하는 여정 자체는 그에게 필연이자 운명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내내 비중이 없어 보이는 장의사 영근(유해진)의 행보에 의문을 품는 관객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역시 파묘의 서사로 보면 당연한 전개다. 장의사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다. 시체를 누구보다 잘 다루지만 시체는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의사는 결코 정령을 상대할 수 없다.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도 마찬가지다. 무당은 귀신과 영혼 따위의 존재들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느낀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개체 대 개체로 직면하는 데엔 어려움을 겪는다. 그저 누군가에 빙의된 형태로만 마주할 뿐 온전한 존재를 마주할 수는 없다. 그렇게 물리적인 실체를 느낄 새도 없이 영혼들은 육체를 들락거리고 인간을 기만한다. 이에 파묘에서 화림은 오니를 대면할 때, 자신이 모시는 신을 끌어들여 속임수를 동원해 일종의 필터를 마련한 채 상대했다. 그렇기에 오직 풍수사만이 고단한 육체를 내세워 다이묘(오니·일본 귀신·도깨비)와 개체와 개체로 맞설 수 있다. 상덕은 대면해서 판단한다. 두 가지 메커니즘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일단 대면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돌입하려 든다. 그런 점에서 오니는 풍수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존재다. 오니는 풍수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니는 제멋대로 풍수사 앞에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무엇인가 우리는 그 과정에서 도깨비불로 변하는 다이묘의 형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도깨비불은 풍수사와 무당 그리고 장의사를 포함해 관객들까지 한데 묶어주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이묘는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낼 때 모두를 압도하는 대상이긴 했으나 그 자태를 보기 위해선 몇 가지 제약을 극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도깨비불은 다르다. 도깨비불이 하늘로 치솟으면 모두가 넋 놓고 바라본다. 도깨비불은 누구라도 쉽게 그 등장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누구라도 홀린 듯 쳐다보게 된다. 거대한 정령이 순식간의 꿈틀대는 화염으로 변모해 하늘을 맴돌 때 사람들은 그 불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그저 현혹된 듯, 영혼을 빼앗긴 듯 쳐다만 본다. 그렇게 활활 타는 화염을 바라보는 얼굴 클로즈업 숏이 하나씩 관객에게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 이후 따라오는 질문.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관객들은 그들이 불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도깨비불과 관객들이 온전히 서로간 대면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물들이 보고 느꼈던 화염과, 관객들이 가늠하고 짐작하는 화염 사이 빈틈이 생기게 된다. 이를테면 인식의 차이, 즉 같은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자그마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이 균열을 닫아버리는 건 다름 아닌 도깨비불의 다른 형태인 다이묘 자체다. 왜냐하면 다이묘는 도깨비불과 다르게, 관객과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데 있어 다른 방식으로 분열되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인물들에게도 다이묘는 그저 다이묘다. ■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영화 이어 짚어야만 하는 질문이 또 있다. 다이묘는 왜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그건 바로 파묘가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이묘가 온전히 사라지려면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나타났다가 오롯이 소멸해야 한다. 파묘는 그 해결의 과정 전반과 그에 배어 있는 논리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를 위해 영화 내 모든 요소가 기술적·미학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일 양국의 무속신앙을 엮어내고, 그 신앙과 문화의 충돌을 다루기 위해 첩장이라는 소재까지 동원한 파묘는 각종 설정과 다채로운 장르 요소의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결국 파묘는 한반도에 꽂혀 있는, 봉인된 일본 귀신을 끄집어내 없애는 이야기다.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가 마주하는 공포나 미스터리를 영화가 어떻게 대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곡성’이나 여타 오컬트 영화와 다르게 파묘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든가 미지의 공포를 뿜어내는 대상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겨 두지 않았다. 해소할 수 있고 씻어낼 수 있는 분명한 속성을 부여했다. 이건 파묘가 악령이나 원혼을 그려내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의 육성이 들리고, 정령화된 오니가 인물들의 눈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만약 도깨비불이 사라질 수 없는 불가사의 그 자체로 주인공들을 계속 괴롭혔다면 이 영화는 미지의 공포를 다루는 코스믹호러 장르의 하위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게 뻔했다. 이 과정에서 미지의 존재를 그려내는 방식이 영화의 호불호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표현법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자 근간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파묘는 우리 앞에 나타난 게 무엇인지 그려내고, 붙잡아 파헤치다가 마침내 그 안에 엉킨 미지의 실타래를 완전히 풀어 해체한다. 그 과정을 버텨내야만 우리가 모두 미스터리에서 해방될 수 있기에 파묘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