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공공의 적

강우석 감독이 충무로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른 것은 ‘투 캅스’ 시리즈나 ‘마누라 죽이기’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탁월한 제작ㆍ투자ㆍ배급능력 덕분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공·사석에서 사장이나 회장, 대표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며 연출에 대한 미련과 애착과 자신감을 감추지 않아왔다. 25일 개봉할 ‘공공(公共)의 적(敵)’은 그가 감독으로서 녹슬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검증하는 시험대이자 야심작이다. 주인공은 시쳇말로 ‘꼴통’ 기질을 지닌 다혈질 형사 강철중(설경구)과 명석한 두뇌의 냉혈한 펀드매니저 조규환(이성재). 둘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끌고나간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어느 여름밤, 주택가 골목에서 잠복근무 중이던 철중은 변의를 참지 못하고 전봇대 뒤에서 볼일을 본 뒤 일어서다가 판초를 걸친 사내와 부딪쳐 넘어진다. 화가 치민 철중은 달려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지만 그의 품에서 나온 비수가 눈가를 스치자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인근 주택에서 칼로 난자당한 노부부의 시신이 발견된다. 철중은 노부부의 외아들인 규환을 보고 그가 바로 비오는 날 마주쳤던 사내이자 살인범임을 직감한다. 이때부터 살인의 단서를 찾아내려는 철중과 그를 무력화 시키려는 규환의 본격적인 대결이 불꽃을 튀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두 배우의 연기력. 범죄 덮어씌우기나 마약 강탈 등도 서슴지 않는 악질경찰이 돌연 정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는 설정이 다소 생뚱같이 비칠만도 하나 설경구의 사실적인 표정과 말투는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여기에는 이성재의 밉살스런 분위기도 크게 한몫한다. ‘공공의 적’은 모처럼 강우석 감독의 영화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려는 관객도 섭섭지 않게 배려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풍자와 역설적 상황이 빚어내는 ‘강우석표’ 유머는 확실히 오버액션이나 말 장난을 동원한 억지웃음에 비해 ‘본전 생각’을 나지 않게 만든다. 강신일(엄반장)ㆍ이문식(주류업자)ㆍ성지루(정보원)ㆍ유해진(건달) 등 낯익으면서도 이름 귀에 선 조연들의 감초연기도 빛을 발하며, 탄탄한 짜임새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드는 솜씨도 상당하다. 그러나 결정적 단서를 추적해내는 추리적 요소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어차피 관객들이 범인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너무 일찍 사건의 실마리를 노출시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어쨌든 강감독에게 엄청난 걸작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유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극장 문을 나설 수 있다.

<새영화>아프리카

11일 개봉할 ‘아프리카’는 펑키 코믹액션쇼를 표방한 영화답게 도발적인 설정에 통쾌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 주인공들의 반란은 우연히 권총 두 자루를 손에 넣으면서 시작된다. 일이 잘 안풀려 의기소침해 하던 대학생 지원(이요원)과 소현(김민선)은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빌린 차 안에 권총 두 자루를 발견한다. 이 총은 형사인 김반장(성지루)과 조직폭력배 중간보스 날치(이제락)가 도박판에서 판돈 대신 걸었다가 밤무대 가수 리키(박일준)에게 잃은 것. 소현의 남자 친구는 소현의 환심을 사려고 차를 훔쳤다가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원과 소현은 서울에 돌아가는 대로 주인을 찾아 돌려주기로 마음먹지만 돌발사태가 이어져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 더구나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시골 다방의 영미(조은지)와 자신을 농락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꿔오던 진아(이영진)가 차례로 합류하면서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한편 김반장과 날치는 이들을 추적하나 번번이 허탕만 친다. 반면에 이들을 흉내낸 모방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사이버공간에서는 ‘네 명의 혁명적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팬클럽 ‘A.F.R.I.K.A(Adoring Four Revolutionary Idolsin Korean Area)’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중견 신승수 감독은 노련한 솜씨로 4명의 여배우들을 조율해 개성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룬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이요원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팀의 리더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눈물’에서 재능을 선보였던 조은지는 좌충우돌하는 폭소연기로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민선과 이영진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보여준 대로 각각 새침데기다운 매력과 중성적인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썩 괜찮은 페미니즘 영화의 탄생을 기대하던 관객을 다소 실망시킨다. 이른바 ‘조폭 코드’를 드러내는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해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빼앗아가고 통쾌한 감동을 값싼 웃음으로 희화화시키는 것이다.

<새영화>에너미라인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적진에 추락한 미군 조종사가 적과 홀로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의 전쟁영화 ‘에너미라인스(원제 Behind EnemyLines)’는 ‘전혀 새롭지 않은’ 내용과 형식이지만 ‘테러와의 전쟁’ 선포 이후 한껏 고무된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분노를 떠안기에는 더없이 적격인 영화였다. 지난 95년 보스니아에서 총상을 입고 구출된 공군 비행사의 실화를 다룬 영화라는 점이 긴장감을 더해줬다. 미군 한명이 수백, 수천 명의 적을 소탕하는 ‘미국식 영웅주의’가 대미를 장식하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대원 한 명을 살리기위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는 ‘동료애’가 가슴을 저며온다. 미 조종사 ‘버네트’(오웬 윌슨)는 동료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 지역을 정찰하던중 세르비아 반군의 무장 지역과 학살된 군중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이를 눈치챈 반군은 버네트의 정찰기를 미사일로 격추한 뒤 그의 동료를 살해한다. 적진에서 혼자 살아남은 버네트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반군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 이에 버네트의 상관인 ‘리가트’(진 해크만)가 부대를 투입해 그를 구하려 하지만 냉엄한 국제 관계에 얽혀 구출 작전은 난관에 부딪힌다. ‘에너미…’는 무엇보다 ‘소탕해야 할 적(敵)’을 찾기위해 안간힘을 쏟는 할리우드 전쟁 영화의 ‘고뇌’를 읽게 한다. 할리우드의 풍족한 자본과 최첨단 기술은 전쟁의 참상과 애국심을 담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2차 대전’과 ‘베트남 전’에서만 전쟁영화의 소재를 찾기에는 부담을 느꼈는지 보스니아나 소말리아 같은 ‘제3세계’ 국가의 내전에 눈을 돌려보지만 어쩐지 명분은 약해보인다. 꽁무니를 바짝 뒤쫓으며 추격해오는 요격 미사일을 피하기위해 전투기가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하거나 전투기의 추락 순간에 조종사들의 비상탈출 장면, 최첨단위성 시스템으로 병사의 소재를 파악하는 대목 등은 ‘21세기 전쟁 오락 영화’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18일 개봉.

<새영화>마리이야기

새해에 유년시절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마리이야기’는 바닷가 외딴 마을에 사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 신비한 구슬을 통해 요정 ‘마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이성강 감독의 첫 장편이다. 토종 캐릭터와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에피소드를 내세운 ‘마리…’는 가슴 한구석에 뭔가 ‘허전함’을 품고 사는 고향을 떠나온 도시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여타 만화 속에서 항상 봐왔던 ‘얼굴에 절반을 차지하는’ 큰 눈을 가진 주인공들은 찾아볼 수 없다. 조그마한 눈에 구릿빛 피부를 지닌, 촌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시골 소년, 소녀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다. 목욕탕을 나서다가 같은 반 여자 친구를 만나 얼굴을 붉힌 일, 한 여름밤 모기장 속에서 친구와 배를 내놓고 잠잤던 경험같은 소소한 추억들은 PC게임에 열광하는 요즘 어린이들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마리…’는 ‘전체관람가’이지만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가깝다. 바닷가에서 할머니, 엄마와 함께 사는 소년 남우.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 역시 병세가 완연하고, 단짝 친구마저 곧 서울로 전학 가려하자 남우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던중 남우는 우연히 구슬속에 살고있는 요정 ‘마리’를 만나면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온몸을 흰 털로 감싼 눈처럼 하얀소녀 ‘마리’의 이름은 ‘한 마리’ ‘두 마리’같은 동물을 세는 단위에서 따왔다. 쪽빛 바다와 우뚝솟은 등대, 환한 전등을 매단 오징어잡이 배, 털북숭이 개 등 매 장면 장면이 도화지 위에 파스텔톤으로 그려진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특히 남우가 경험하는 판타지의 세계를 강조하기위해 인물이나 사물 등 ‘현실세계’는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초반에 하늘을 나는 갈매기의 활로를 따라 보여주는 회색빛 도시의 풍광과 버스, 어촌의 풍경, 소소한 사물 하나하나까지 정밀묘사를 하듯 그렸다. 인물은 2D, 배경은 3D를 이용해 공간감과 빛 등을 현실감있게 표현했고, 캐릭터의 선을 없애 회화적인 느낌을 살렸다. 목소리 배우들이 눈에 띈다. 이병헌이 주인공 남우의 성인 역으로 등장하는 것을 비롯해 배종옥이 남우 엄마, 안성기는 남우 엄마를 사랑하는 바닷가 아저씨, 나문희는 남우 할머니, 공형진은 남 우의 친구 준호, 장항선은 선장인 준호 아버지의 목소리를 각각 연기했다.

<새영화>'비독'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100년간 프랑스는 질풍노도의 세월을 보낸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나폴레옹이 등장했으며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이 거쳐갔다. 시절이 하수상하면 민초들은 영웅을 기대하게 마련이고 필요하면 만들어 내기도한다. 실존인물인 비독(Vidocq:1775∼1875)은 1세기를 사는 동안 대도(大盜)와 명탐정을 오가며 민중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었다. 50차례가 넘는 투옥과 탈옥 경력을 지닌 그는 돌연 경찰로 변신해 경찰 개혁에 앞장서며 훈장까지 받았다가 훗날 사설 탐정으로 활약한다. 루팡과 셜록 홈즈를 합쳐 놓은 인물에게 반하지 않을 민중이 있을까. 28일 개봉될 ‘비독’의 무대는 1830년 파리. 이곳에는 거울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살인마가 나타나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시민들의 열망을 한몸에 안고 연쇄살인범 추적에 나선 명탐정 비독은 그의 꼬리를 붙잡는 데 성공하지만 검술대결에서 불의의 일격을 받아 화염이 치솟는 구덩이로 추락한다. 비독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온 파리시내가 비통함에 잠겨있는 가운데 그의 전기를 집필하던 젊은 기자 에틴 보아세가 비독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조사한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관련자들은 하나씩 죽어나간다. 영화 속 배경은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 왕정복고운동을 이끈 샤를 10세가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시절. 그는 대혁명으로 이미 자유의 바람에 중독된 민중들을 탄압하며 왕권 강화와 귀족 우대 정책을 펼치다가 1830년 7월혁명이 발발하자 단두대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비독과 유리가면의 대결 뒤에는 민중과 귀족들의 막판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것이다. 화면에서 혁명 전야의 긴박한 고요를 감지하기는 어렵지만 비독이 영웅으로 떠올랐던 속사정은 짐작이 간다. 특수효과 전문가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피토프는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를 내세워 관객들의 애국심을 한껏 자극했다. 이 전략은 잘 맞아떨어져 지난 9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로부터 프랑스 영화시장을 지켜내는 데 톡톡하게 기여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만큼 비독에 대한 열망이 없을 수밖에 없는 국내 관객들이 얼마나 영화에 빠져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지막 의외의 인물로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에만 집중할 것. 곁가지들은 오히려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방해가 된다.

<새영화>'죄와 벌'

도마 위를 겁없이 기어가던 커다란 바퀴벌레 한마리가 단칼에 동강이 난다. 무표정한 얼굴의 한 사내가 벌레를 칼로 치워버린 뒤 다시 고깃덩어리를 들고 뼈와 살을 발라낸다. 갈고리에 걸려있는 수많은 고깃덩어리들과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시뻘건 피… 영화 ‘죄와 벌’의 첫 장면인 도축장의 광경은 이 작품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핀란드 출신의 ‘괴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데뷔작인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의 모티브를 현대의 핀란드로 옮겨왔다. 원작 ‘죄와 벌’에서 주인공이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해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사상에 사로잡혀 ‘이(蝨)’같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사회정의’인 법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벌레같은’ 남자를 죽임으로써 이 사회에 ‘본때’를 보여준다. 영화는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관해 다루지만 원작과 달리 살인에 동기를 부여하고, 신에 의한 구원은 배제함으로써 주인공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갖춰준다. 헬싱키에 사는 라이카이넨. 법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도축장에서 일하는 그는 일을 마친 뒤 혼카넨이라는 사람의 아파트로 찾아가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이 때 에바가 출장요리를 나왔다가 사건을 목격하지만 그를 모른 체해 준다. 숨진 혼카넨이 3년 전 라이카이넨의 애인을 뺑소니 사고로 죽인 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안 경찰은 복수극으로 판단, 라이카이넨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나 법을 공부한 그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노숙자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경찰을 조롱한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잡아들일 방법이 없다. “그가 역겨워서 죽였어. 벌레를 죽였을뿐야. 내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원칙이야” 라이카이넨은 다시 말한다. “벌레를 죽여도 결국 벌레의 숫자는 줄지 않아” 복수를 하면 통쾌할 거라 믿었지만, 자기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법망을 피해나가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는 결국 자기도 죽은 혼카넨과 별반 다를 바없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수함으로써 ‘사회와의 전쟁’을 끝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한 편이다. 마치 후반 작업을 거치지않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길 정도다. 그러나 데뷔작으로 고전을 선택한 감독의 배짱과 고전을 독특하게 재해석해 보여준 감독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무미건조함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새영화>화산고

학원 무협물. 국내 관객들에게는 낯선 장르다. 손가락 하나 대지않고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학생과 교사들이 공중에 떠 무술을 겨룬다니. 분필이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고, 물기둥이 솟는 것은 또 어떤가. 화제의 영화 ‘화산고’가 오랜 산고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황당한 만화적 상상력이 스크린에서 어떤 모습으로 옮겨질지 진작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아왔던 터. 순제작비 48억원, 제작 기간만 1년 5개월이 걸렸다. 때는 화산 108년. 무공의 고수들만 다니는 ‘화산고(高)’가 무대. 화산고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김경수(장혁)가 전학 오면서부터. 그는 ‘기물파손’ ‘여교사 폭행죄’ 등으로 8번이나 퇴학당한 경력의 소유자. 이번엔 죽어도 졸업만은 하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타고난 공력을 지닌 그를 고수들이 몰라볼 리 없다. 검도부, 유도부에서 입단 제의가 잇따르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그는 곧 전설의 무림비서인 ‘사비망록’을 둘러싼 혈투에 휘말리는데... ‘화산고’는 그간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감상하기 힘든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재현해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감독의 말을 빌면 이 영화 전체가 컴퓨터 속에 담가졌다 나왔을 정도다. 100% 디지털 작업과 조명 등을 통해 전체적으로 흰색과 검은톤(정확한 표현은 ‘다크올리브그린’이다)이 나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시대와 배경은 물론,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 없는 판타지 세계다. 컴퓨터그래픽에 힘입은 기공의 흐름과 물방울이 분사되는 장면은 쉽게 접하지 못했던 장면들. 순수 국내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현란한 와이어 액션도 ‘와호장룡’과 ‘메트릭스’에 비견될 만큼 수준급이다. 특히 물기둥을 치솟게 하는 공력을 발휘하며 주인공 장혁과 허준호가 펼치는 막판 대결은 볼거리임이 분명하다. 학교를 무대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화산고’는 사실 전형적인 무협 만화쪽에 가깝다. 심각한 상황에서 갑자기 뜨악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 한껏 무게를 잡던 김경수도 짝사랑하는 검도부 주장 ‘유채이’(신민아)만 나타나면 넋나간 표정을 짓는다. 화산의 1인자를 꿈꾸며 연신 “나 장량이야”를 외치는 김수로나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며 파리채를 들고 다니는 교감 변희봉같은조연급 연기자들의 코믹한 캐릭터도 영락없는 만화 속 인물이다. ‘개척 장르’인 만큼 다양한 실험이 시도됐다. 스토리보다 감각을 중시하는 관객들의 입맛에 맞춘 탓일까. 연방 귓가를 때리는 효과음과 화면 분할 같은 다양한 연출 기법이 혼을 쏙 빼놓는다.

<새영화>원더풀 라이프

삶을 마감한 뒤 저승에서 하나의 기억만을 지닌채 영원속으로 떠나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순간을 택할 것인가. 8일 개봉될 일본영화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는 동화적 설정을 담은 소품같은 영화지만 대작 못지않게 철학적 사색을 요구한다. 월요일이 되면 소도시 간이역 같은 린보 역에는 막 이승을 하직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번호표를 받고 배정된 방에 들어가면 면접관들이 수요일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해 달라고 주문한다. 선택이 끝나면 린보 역의 역무원들은 각자 선택한 순간을 토요일까지 영화로 제작해 보여준다. 이제 괴로웠던 기억은 모두 망각한 채 자신이 그리는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면접관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 행복한 기억이 많아 고르기가 힘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통 떠올리기 싫은 기억뿐이라는 사람도 있다. 호색한 같은 웃음을 흘리며 유곽에서 여자를 산 추억을 반추하던 초로의 사내는 결국 딸을 시집보내던 날을 선택하고, 주저없이 디즈니랜드를 꼽은 여중생도 막판에는 어릴 적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귀지를 파던 때를 간직하고 싶어한다. 전쟁 당시 허기에 지쳐 있다가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은 기억이나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시절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칠순을 넘긴 와타나베가 마지막까지 선택을 주저하자 면접관 모치즈키는 그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건넸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한다. 50년전 모치즈키가 죽기 전에 사랑을 약속한 교코가 바로 와타나베의 아내가 돼 있는 것이다. 모치즈키는 테이프로 교코의 일생을 본 뒤 50년을 미뤄온 선택에 성공해 영원으로 떠나고, 꿈 속을 헤메며 선택 의지를 보이지 않던 X세대 이세야가 수습 면접관으로 린보 역에 남는다. ‘원더풀 라이프’는 ‘애프터 라이프(After Life)’라는 영어 제목으로 미국 등지에 소개됐으며 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사후(死後)’란 제목으로 상영됐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로 낭트영화제 그랑프리, 토리노영화제 각본상, 산세바스찬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긴박감 없는 줄거리와 밋밋한 화면이 118분의 러닝타임을 길어보이게 만들지만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중 열에 일여덟은 행복한 순간을 고르기 위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민에 빠지고, 나머지 두세명은 앞으로 남은 인생에 달콤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삶의 고삐를 더욱 당길 것이다.

<새영화>'와니와 준하'

영화 ‘와니와 준하’(제작 청년필름) 앞에 붙은 ‘순정영화’라는 수식어는 사실이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희선과 주진모라는 순정만화 속에서 갓 빠져나온 것 같은 가녀린 외모를 지닌 배우들을 내세워 20대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순정 만화풍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평범하지 않은 첫사랑의 아픈 사연을 간직한 26살의 애니메이터 와니(김희선)와 그녀를 사랑하는 작가 준하(주진모)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 와니와 준하는 춘천에서 함께 동거하는 사이다. 와니는 유학을 떠난 첫사랑의 연인이자 이복 동생인 영민(조승우)을 잊지 못한다. 그의 방을 열쇠로 잠가둔 채 아픈 기억을 삭이며 지내는 와니는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그녀가 과거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영민(조승우)이 돌아온다는 소식과 함께 영민을 짝사랑하던 후배 소양(촤강희)이 집으로 찾아오면서부터. 아버지가 영민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오던 날, 또 흥분됐던 영민과의 입맞춤, 소양(최강희)과 셋이서 어울리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하나둘씩 스쳐간다. 다정다감하던 준하는 조금씩 흔들리는 와니의 변화를 눈치채고 가슴 아파한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잔잔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돼 단조로움을 덜어준다.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는 와니의 아픈 과거는 천천히 하나씩 드러난다. 앞머리와 뒷부분을 수채화 풍의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점이나 흑백 사진과 몽당연필, 프라모델 같은 아기자기한 소품이 빚어낸 깔끔한 영상이 돋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의 시선을 끝까지 붙들기에는 흡인력이 다소 달리는 편. 그나마 와니의 고교 친구들과 직장 동료 등 주변 인물들이 순정 만화에서처럼 코믹하게 그려져 있어 심심함을 달래준다. 23일 개봉.

<새영화>'GO'

재일교포 3세의 청춘을 그린 한일합작영화 ‘GO(고)’가 지난달 말부터 일본 열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데 이어 24일 한반도에 상륙한다. ‘GO’는 재일교포 3세에 대한 선입관을 통렬히 깬 영화. 원작소설을 쓴 가네시로 가즈키도 선배작가들이 지닌 무겁고 답답한 시선을 거부하고 정체성과 차별 등의 문제를 밝고 감각적으로 그려내 지난해 나오키상을 차지했다. 영화속 주인공 스기하라(한국명 이정호)는 원작자와 마찬가지로 조총련계 초-중학교를 거쳐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뒤 일본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조선 국적으로는 하와이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온 가족의 국적을 옮겼기 때문이다. 프로복서였던 아버지로부터 권투를 익힌 스기하라는 그의 콧대를 누르려는 일본인 친구들을 간단히 때려눕히고 ‘짱’으로 떠오른다. 거칠 것 없이 젊음을 불사르던 그는 친구 가토의 생일 파티장에서 일본 여학생 사쿠라이와 마주치자마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스기하라가 재일교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잊고 살다가 관계가 깊어질수록 불안감을 느낀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한몸이 되기직전 스기하라가 한국인이라고 고백하자 사쿠라이는 이별을 고한다. 재일교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의 영화와 달리 스기하라는 피해와 가해의 역사나 남북의 이데올로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여자친구에게 버림을 받을까봐 국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모국인들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스기하라가 재일교포 신세대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신세대 스타 구보쓰카 요스케와 시바사키 고가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중견배우 야마자키 쓰토무와 ‘철도원’의 아내 오다케 시노부가 스기하라의 부모역을 맡았다. 김민과 명계남도 각각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얼굴을 내밀어 한일합작영화의 의의를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