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5. 가평 남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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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미술관 제1전시관 전경. 홍기웅기자

 

산 높고 물 맑은 가평에 멋진 미술관이 있다. 남송미술관은 연인산도립공원과 명지산군립공원 자락에 안겨 있다. 푸른 숲에 둘러싸인 미술관에 들어서면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길가에 우뚝 서 있는 남송미술관은 궁궐의 정문처럼 위풍당당하다. 미술관에서 조금 걸으면 외벽이 커다란 캔버스처럼 카페 허수아비가 불쑥 나타난다. 허수아비마을의 카페 벽을 장식한 그림은 남송미술관을 설립한 남궁원 화백의 자화상이다. 붓을 든 남궁 화백의 눈빛이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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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미술관 별관, 에코뮤지엄 전경. 홍기웅기자

 

■ 사랑을 키우고 사람은 살리는 허수아비 미술관

 

허수아비는 남송미술관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1960~70년대 시골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과 조각을 미술관 곳곳에서 만난다. 마주하는 풍경이 고향처럼 푸근하다. 가을 들판을 지키던 허수아비가 미술관의 주인공이 된 사연은 무엇일까. “허수아비는 어린 시절의 향수이자 삶의 철학을 담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허수아비의 허(虛)는 비움과 나눔을, 수(守)는 지킴을, 아(我)는 키움을, 비(非)는 세움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지요. 허수아비는 개인의 고통 치유와 사회적 공헌을 동시에 꾀하는 정신적 기반입니다.”

 

남궁 관장이 들려주는 허수아비 철학이 흥미롭다.

 

1997년 가을, 남궁 화백은 고향 가평군 북면 백둔에 허수아비 마을을 조성한다. 이어 2006년에는 남송미술관을 개관한다. 1만3천200㎡(4천평)의 대지에 1천650㎡(500평)의 전시 공간을 갖춘 허수아비 마을과 남송미술관은 지역민은 물론이고 동료 화가들에게도 큰 주목을 받았다. 경원대 미대 교수로, 경기도 예총 회장으로, 안양문화재단 대표이사로 활동했던 다채로운 경력의 유명한 미술가가 고향 가평에 미술관을 세운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이 깊은 산골에 미술관을 세워 어떻게 운영할지 궁금해하고 염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씻고 목련, 철쭉 등 15개 전시실과 아트홀, 미디어 갤러리, 영화관, 카페 등을 갖춘 허수아비 마을 남송미술관은 곧 지역의 명소로 자리를 잡는다. 내년이면 여든이 되는 남송미술관 남궁 관장의 인생과 작품 세계가 새삼 궁금해진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영화로 작가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재미있다. 남궁 관장은 영상물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할 정도로 감각이 젊고 도전적이다. 미술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영상실로 자리를 옮겨 다큐 영화를 감상한다. 지난해 결혼 5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40분 분량의 이 자전적 영화는 남궁 화백의 유년부터 현재까지의 모습과 도전으로 더욱 풍성해진 그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보여준다. 왜 허수아비가 미술관의 주인공이 됐는지 그 궁금증도 시원하게 풀어준다. 부친의 사망 및 어머니의 재가로 유년기에 겪은 쓰라린 경험과 사랑하는 딸의 때 이른 죽음이 안겨준 상실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전시실에서 뜻밖의 사랑 이야기를 배치해 관람객을 미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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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미술관 별관, 에코뮤지엄인 허수아비 마을의 조형 모습. 홍기웅기자

 

■ 부부가 함께 가꾸는 예술의 향기

 

바로 두 사람을 부부로 이어준 ‘연애편지’다. 정원이 아름다운 에코박물관 목련관과 진달래관에서 남궁 화백의 신작을 만난다. 백장미처럼 커다란 꽃 모양의 작품이 관람객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작품의 색깔과 질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전시실 중앙에 놓인 유리관에 편지가 가득하다. 무슨 편지일까. “하하, 내가 총각 시절에 음악 교사이던 아내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전시한 것이지요.” 관람객을 위해 펼쳐 놓은 편지를 천천히 읽어본다. “순미! 가슴을 조이며 꼬옥 잡은 듯 안기운 무거운 펜을 지금 드는 순간, 원은 미의 곁에 있음을 알리는 영원한 종소리와도 같은….” 총각 미술 교사가 같은 학교의 음악 교사에게 1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366통의 편지를 보내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남궁 화백이 써 보낸 편지의 여백에 김순미 여사가 쓴 다짐의 글귀가 적혀 있다. “꼭 잡으리라. 영원불변하도록 우리들의 맹세, 우린 항해를 시작했다. 우리의 이 순간을 축복하고 언제나 변함없기를. 원! 사랑해요.”

 

지난해 결혼 50년을 맞이한 부부는 삶의 동지이자 예술의 동지로 깊이 연결돼 있다. 김 여사의 뜨개질 작품 조각을 캔버스로 활용하는 남궁 화백의 실험적 작업이 흥미롭다. “회화에 뜨개질의 따뜻한 질감과 손맛을 더하니 허수아비 비움과 지킴과 키움과 세움의 허수아비 철학을 더욱 친밀하게 구현한 시도로 평가받았지요.”

 

허수아비 철학을 함께 구현하고 회화 이상의 의미를 담아내는 예술공동체를 지향하는 부부 예술가의 모습이 보기 좋다. 김 여사의 뜨개질 작품은 허수아비 철학을 따뜻하게 확장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부는 딸의 10주기를 맞이한 2022년 여름에 특별한 축제를 준비한다.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금혼식에 딸 송이를 기리며 365점의 작품 제작·기부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2022년 7월부터 1년 동안 매일 하나씩 총 365점의 ‘그림일기’를 제작했지요. 단 하루도 쉼 없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매일 한 작품씩 그리고 감상을 기록했다니 놀라운 정성과 집중력이다. 이렇게 부부가 힘을 합해 정성껏 제작한 작품으로 2024년 5월부터 6월까지 ‘남궁 원의 그림 축제’을 열었다.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에게 작품을 나눠주고 수익금은 지역사회에 기부했다. “1년 동안 매일 제작한 총 360여점의 그림 하나당 5만원에서 20만원을 기부하고 작품을 가지도록 했는데 수익은 가평군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봐주라는 딸 송이의 뜻을 평생 실천하는 부부의 마음이 고맙다. ‘그림 축제’는 허수아비 철학을 예술적으로 확장하는 통로가 됐다. 남궁 화백의 과거 작품들을 시대순으로 감상하고 미디어아트 작품을 만나려면 남송미술관 전시실을 찾아야 한다. 회화와 영상 예술이 조화를 이룬 흥미로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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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미술관 별관, 에코뮤지엄에 위치한 오픈 스튜디오 모습. 홍기웅기자

 

■ 남궁 화백이 꿈꾸는 함께 사는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예술가 부부의 열망이 가득한 남송미술관 정원을 산책하는 시간이 즐겁다. 정원 곳곳에 조각품들이 보석처럼 숨어 있다. 사슴과 강아지 같은 귀여운 동물 조각도 있고 거대한 사람의 얼굴을 조각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미술관의 상징인 허수아비는 얼마나 많을까. 제각각인 허수아비의 모습과 몸짓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무 조각에 실을 칭칭 감아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붉은 머리의 허수아비 앞에 선다. 허수아비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미술관을 산책하며 남궁 관장의 젊은 감각과 열정에 놀란다. 2016년부터 남궁 관장이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아트1TV’는 국내 최초의 미술 전문 인터넷 방송이다. “소외된 작가들과의 소통을 중심에 둡니다. 예술 교육과 현장 전시를 주로 소개하지요. 예술 홍보를 넘어 사회적 봉사와 문화 확산이라는 비전 아래 운영하고 있습니다.” 남궁 관장의 스케치북 ‘나는 대한민국의 화가다’ 역시 주목되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윤인자, 장순업, 국경오 등 중견작가를 심층 취재해 대중에게 소개해 왔다. 인터뷰 콘텐츠 600여편을 제작해 유튜브로 방영했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이런 활동으로 남궁 관장은 지난해 아트코리아방송 메세나 부문 언론봉사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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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관에서 전시중인 각·자·도·생 전에서 정혜례나 작가의 '탈주' 작품. 홍기웅기자

 

남송미술관은 관람객과 적극 소통하는 예술적 치유의 공간이다. 남궁 관장의 소망은 또 있다. “우리나라에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전업작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작가 중에서 실력파를 찾아내 소개하는 ‘작은 봉사’ 활동을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작가들의 작품을 선별해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 도민들에게는 관람의 기회를, 작가에게는 전시와 보존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요.”물 맑고 산 깊은 가평에는 예술로 아픈 세상을 치유하려는 아름다운 소망을 가진 미술관이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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