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국민들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 되는 기능 이전에 관계 중심 ‘도달하는 국가’ “국가란 국민 ‘곁에’ 있어야할 존재” 강조
해발 3,600미터. 하늘과 맞닿은 도시, 볼리비아 라파스. 숨이 턱 막히는 고도에서 나는 문득 질문 하나를 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산소가 희박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존재의 무게가 피부에 와닿았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고도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국가’라는 단어가, 실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말 그대로, ‘도달하는 국가.’ 우리 외교는 지금, 바로 그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지난 6월 말. 볼리비아에서 진행된 1주간의 해외안전 자문단 파견은 단순한 행정 점검이 아니었다. 볼리비아 대선을 앞둔 정치적 긴장 속에서 우리의 외교부, 대사관, 경찰청, 민간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상의 위기 상황을 설정하고, 재외국민 보호 훈련을 시행했다. 실제에 가까운, 살아 있는 실험이었다.
라파스 주재 한국대사관은 수개월 전부터 조용히 준비를 이어왔다. 교민 밀집 지역의 위험 요소를 점검하고, 긴급 연락망을 정비하며, 병원·소방·치안기관과의 협조 체계를 촘촘히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준비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외교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특히 해외 안전상황실은 전체 훈련의 실무를 총괄하며, 위기 대응 매뉴얼을 공유하고, 시나리오별 실시간 연습을 조율했다. 책상 위의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상황에 가까운 대응 훈련.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훈련이 ‘기술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과 제도, 공동체 간의 연결. 위기 대응의 성패는 결국 ‘곁에 있고, 신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훈련이 끝난 뒤 열린 교민 간담회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 교민이 말했다. “여기는 제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도 늘 ‘만약’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그 ‘만약’이 와도 버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묻게 했다.
외교는 조약의 서명이 아니다. 닿는 손길이며, 도착하는 신뢰다. 실제로 한국 외교는 수차례 그 손길을 입증해 왔다. 최근, 중동 정세가 급변했던 이란에서 66명의 교민을 귀환시켰고, 2023년 수단 내전 당시에는 총성이 울리던 카르툼에서 육해공 전력을 동원해 200여 명을 구조했다. 또한 팬데믹 초기에는 마스크와 의약품을 들고 재외국민에게 가장 먼저 도달했다. 그 신속한 대응은 교민들의 마음속에 ‘국가’라는 두 글자를 새기게 했다.
이처럼 국가는 ‘기능’이기 이전에, 감각되어야 할 존재다. 그 손길이 닿을 수 있다는 확신, 그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재외국민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이 국가가 실천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약속이다.
20세기 논증학자 스티븐 툴민과 샤이메 페렐만은 말했다. ‘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체감되고 설득될 때 살아난다. 외교와 국가 역시 사람들의 감각과 공감 속에서 그 존재가 입증된다.
이번 라파스 훈련은 그 체감의 현장이었다. 외교는 멀리 있는 국민에게 도달하는 일이며, 국가는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곁에 있어야 할 존재다. 선언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과 신뢰로 완성되는 연결. 그것이 우리가 준비하고 실험한, ‘도달하는 외교’의 본질이었다.
고도 3,600미터 안데스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국가는 단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곁에 있어야 하고, 함께 숨 쉬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나는 다시 새겼다. 그것이야말로 외교의 본질이며,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